• <조선일보 류근일 칼럼>
                                                                           
      미국은 결정해야 한다. 북한 핵 보유를 인정하고 살든가, 아니면 그렇게 살 수 없다고 하든가
    택해야 한다.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지금으로선 단호해 보인다. 북한 핵을 절대로 용인할 수 없다는 입장이다. 그러나 그가 언제 홱 돌아서서 "북한과 적당한 선에서 타협 하겠다"고 할지 누가 알겠는가? 틸러슨 국무장관은 이미 북한에 대해 대화 창구를 열었다고 했다. 갈피를 잡을 수 없다. 지금까지 선제타격이라도 할 듯 세게 나왔지만, 한반도 문제에 대한 미국의 해법이 무언지는 분명치 않다.

     미국의 싱크탱크 전문가들은 요즘 "한반도 문제 이렇게 풀자"며 여러 가지 전에 없던 의견들을 취향대로 내놓고 있다. 아직은 짜임새가 촘촘하지 못한 총론 수준이지만, 미국 내부의 그런 색다른 여론들을 예의주시할 필요는 있다. 싱크탱크의 의견들이 미국 정부의 공식 입장으로 채택된 적이 적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들의 의견을 종합하면 대체로 이런 이야기가 된다. 북한의 레짐 체인지, 다시 말해 김정은 정권을 무너지게 하고, 북한 핵을 없애고, 남한이 한반도를 통일하게 하고, 통일된 한반도가 주변국들에 위협이 되지 않게 하고, 그러기 위해 미국은 한반도 통일 후엔 손을 떼라는 것이다. 그래야 중국이 안심할 것이란 이유다. 헨리 키신저 전(前) 국무장관, 케이토(Cato)연구소의 도그 밴도 연구원, 카네기 국제평화재단의 마이클 스웨인 연구원 등의 주장이 예컨대 그런 것들이다. 중국이 이런 한반도 해법을 받아들이도록 유인(誘引)해야 한다는 것이다. 어떻게?

     헨리 키신저는 "한반도가 통일되면 미국은 한국에서 철수(exit)하겠다는 것을 중국·러시아에 약속하라"고 했다. 도그 밴도는 "한반도가 통일되면 미국은 한·미 동맹도 끝내겠다는 것을 약속하라"고 했다. 마이클 스웨인은 "중국은 전엔 북한의 반발을 우려해 한반도 미래에 관한 미·중 협력을 사절했으나 지금은 그렇지 않을 것"이라고 했다. 세 사람의 말은 요컨대, 남한에 의한 한반도 통일이 중국에 위협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 중국이 알게 하라는 것이다.
  •  이런 구상들은 그러나 한국의 자유인들이 전폭 받아들일 좋은 한반도 미래상이라곤 할 수 없다. '남한에 의한 통일'이라는 솔깃한 대목이 있긴 하지만, 전체적으로는 위험 부담이 더 크다. 이들의 주장은 한마디로 한반도를 중국 손아귀에 내맡기자는 것이다. 도그 밴도는 한반도의 전략적 가치가 이제는 없어졌다고 했다. 한국을 그만 버리자는 소리다. 마이클 스웨인은 한반도를 중국과 일본 사이의 중립지대로 만들자고 했다.

      이런 진단과 대안은 그러나, 평화협정을 맺는답시고 남(南)베트남을 북(北)베트남에 넘겨준 '키신저 배신'의 되풀이밖엔 안 된다. 될성부른 소리도 아니다. 한국은 중립국이 되기엔 이미 이념 싸움의 늪에 깊이 빠져버린 나라다. 대한민국이냐, 김정은이냐의 죽기 살기 선택이 있을 뿐이다. 우아한 중립이란 8·15 때부터 물 건너가고 없다. 6·25 남침 전후의 역사는 그 무엇으로도 '중립화'될 수 없다. 마이클 스웨인은 또 한국을 과거 소련 앞에서 찍소리 못한 채 연명했던 핀란드처럼 만들자고 했다. 한국인들이 중국 앞에서 왜 그렇게 살아야 하나? "한반도의 전략적 가치가 사라졌다"했지만, 한반도와 그 주변 해역을 중국에 넘기면 서태평양과 남태평양에서 미국·일본을 몰아내려는 중국의 전략은 날개를 달 것이다.

     중국 역시 북한이 무너져 난민이 쏟아져 들어오고, 북한 핵무기 처리가 화급해지고, 자유민주주의 대한민국이 압록강 건너까지 올라오는 걸 좋아할 까닭이 없다. 이보다는 비록 김정은은 싫지만 북한 지역이 일·중, 미·중 사이에서 완충 지대 역할을 안정되게 해주는 게 더 낫다고 할 것이다.

     그렇다면 이런 비현실적인 구상 대신 무엇을 생각할 수 있을까? 김정은 하나만 '아웃'시키면 모두가 '해피'해질 수 있다. 극한적 대북 제재-김정은과 북한 엘리트의 분열-김정은 실각-북한 핵 폐기-북한의 개혁·개방-남북한 대화-공존-교류-협력-평화의 길이다. 미군은 휴전선 이북으론 절대 가지 않겠다고 약속한다. 중국이 이를 싫어할 까닭이 없다. 이렇게 되면 서울-평양-베이징-모스크바-EU-런던을 잇는 철도가 깔릴 수 있다. 물류가 흐르고, 한국 기업이 북한 개발에 참여하고, 북한 주민 생활이 향상될 수 있다. 모든 주변국도 안도할 수 있다. 미·중이 이제라도 이런 해법을 협의할 수 있을까? 한반도 철수 운운은 미국 쇠망의 시작이 될 것이다.

    류근일 / 전 조선일보 주필 /2017/10/3
    류근일의 탐미주의 클럽(cafe.daum.net/aestheticismclub)