宋은 한국의 쇠망 모델이 아닐까?
  • 趙甲濟  /조갑제닷컴 대표
  • 宋은 한국의 쇠망 모델이 아닐까?
      
       
      '宋의 눈물'의 著者 鄭淳台 씨(前 월간중앙 주간)에 따르면 宋은 중국의 近代이다. 오늘 중국인이 누리는 문명의 토대를 만든 시대였다는 뜻이다. 중국 문화와 文明을 상징하는 중국요리, 茶, 도자기, 의자생활, 소설 삼국지·수호전뿐 아니라 그 뒤 약 1000년간 중국과 한반도의 정치제도를 규정한 과거시험과 性理學(성리학)이 또한 宋産이다. 北宋과 南宋을 합쳐 약 300년간 찬란한 물질문명과 예술·문화를 꽃피운 이 시대의 인물들도 문화적이고 예술적이었다. 鄭 씨의 실감 나는 내레이션을 읽다가 보면 宋의 수도 開封(개봉)의 삶은 르네상스 시대 피렌체의 활기와 풍요를 연상시킨다. 
      
       <‘청명상하도’에는, 성문을 통해 개봉의 성내에 들어가면 2층 酒樓(주루)가 성업 중인 모습도 담겨 있다. 개봉에는 北宋식 룸살롱인 이런 주루가 불야성을 이루었고, 플레이보이 황제 徽宗(휘종)은 밤만 되면 변장을 하고 寵臣(총신)들과 함께 홍등가의 주루를 순례했다. 휘종의 애인은 李師師(이사사)라는 이름의 룸살롱의 가수이자 호스티스였다. 이사사는 황제를 후원자로 둔 것이다. 휘종은 정치에는 관심이 없고 대부분의 국정은 재상 蔡京(채경)에게 맡겨버렸다. 
      
      2층 酒樓(주루)의 1층 귀퉁이에는 ‘孫羊店(손양점)’이란 간판의 양고기 꼬치집도 영업하고 있다. 룸살롱과 잔술집의 共存(공존)—이것이 개봉의 매력이었을 것이다. 주루 앞 대로에는 낙타를 끌고 가는 턱수염 기른 서역인 隊商(대상)의 모습도 보인다>.
       
      
      너그러운 사람이 만든 나라
       
      권력자라기보다는 예술가에 가까웠던 휘종은 그 화려한 삶과 함께 비극적 말로로써 宋의 모습을 대표한다. 宋을 세운 趙匡胤(조광윤)은 너그러운 이였다. 유방, 주원장의 예에서 보듯, 칼로 새 나라를 세운 영웅들은 권력의 안정을 위하여 開國공신들을 죽이는 게 하나의 관례였다. 조광윤은 이런 피비린내 나는 전례를 무시했다. 그는 개국공신들(군인)을 불러 ‘너희들이 쿠데타를 일으킬까봐 잠이 오지 않는다’고 하소연한 뒤 이들에게 듬뿍 돈과 땅을 준 뒤 지방으로 내려 보냈다.
       
      宋은 요새 말로 하면 자유시장경제를 허용했다. 수도 어디서든 상점을 내는 자유가 보장되었고 철야 영업도 했다는 것이다. 物産의 풍요로움과 사람들의 여유는 이런 자유에서 나왔을 것이다. ‘자유가 번영을 만든다’는 건 만고불변의 진리이다. 언론의 자유도 상당히 보장되었는데, 때론 과잉으로 흘러, 宋 태조는 ‘너무 언론을 의식하다가 사대부를 죽여선 안 된다’는 유언도 남겼다. 이 도시엔 50여 개의 연극공연장(句欄)이 있었다고 한다. 
      
      鄭淳台 씨는 ‘宋代 이전 귀족사회에서는 벌레 취급을 받았던 서민도 宋代에 들어 비로소 인간다운 생활이 가능하게 되었다’고 평했다. 宋代의 과학기술 수준은 동시대의 유럽을 능가하였다. 연간 철 생산량이 4만 톤이었는데 이는 산업혁명 직전 유럽 전체보다 많은 양이었다. 
      
      宋은 그러나 이런 근대적 자유와 풍요와 삶과 제도를 지켜낼 수 없었다. 安保(안보)가 무너졌기 때문이다. 자유와 풍요를 유지하려면 지도층의 용기와 희생과 단합이 필요한데, 宋은 이 부분에서 실패한 것이다. 그 결과는 북방의 사나운 야만족(문명국 宋에 비교한 표현)이 세운 거란, 金, 몽골제국에 차례로 겁탈을 당하는 일이었다. 
      
      '宋의 눈물'은 대한민국 멸망 예언서가 아닌가?
      살찐 돼지가 야윈 늑대에 먹히고, 배부른 군대가 배고픈 군대에 진 이야기.

     지킬 힘과 자원이 있음에도 정신력이 보태어지지 못하면 야윈 늑대에 먹히는 ‘살찐 돼지’ 신세가 된다. 한국은 ‘웰빙 체질’의 살찐 돼지 같은 宋을 닮고, 북한 정권은 야윈 늑대 같은 북방의 야만족을 닮은 듯하다. 그런 점에서 宋의 이야기는 韓의 이야기이고 宋의 눈물은 韓의 눈물이다.    
      
      간첩을 골키퍼로 두고 축구를 한 南宋
       
      12세기 초, 北宋은 金과 연합, 宿敵(숙적) 거란을 친 뒤엔 비밀리에 거란과 동맹, 金을 공격, 失地(실지)를 회복하려 했다. 일종의 외교적 줄타기를 시도한 것이다. 이 꾀는, 거란의 天祚帝(천조제)가 金에 붙들려 宋이 보낸 密書(밀서)가 발각되면서 파탄나기 시작했다. 배신당한 金은 宋을 징벌하기 위한 군대를 일으켜 개봉을 포위했다. 포위된 개봉에선 主戰派(주전파)와 강화파가 서로 싸웠다. 宋이 굴욕적인 강화조건을 수락하자 金은 일단 포위를 풀고 물러났으나 宋이 약속을 지키지 않자 다시 남침했다. 
      
      이때 北宋은 金의 침략을 막기에 화약무기를 처음 사용했다. 그로부터 1세기 후의 이야기지만 몽골의 침략을 막기 위해 南宋도 화약무기를 사용했다. 이렇게 宋은 기술창조면에서 우수한 재능을 발휘했지만 변화보다는 안전과 조화에 가치를 둔 유학 이데올로기 때문에 그 이상의 발전을 기하지 못했다. 이와 대조적으로 유럽에서는 1280년 경 화약과 총이 등장하자 총과 대포는 성벽을 파괴했고 그 결과 봉건사회의 구조 자체가 바뀌었다. 
      
      靖康(정강) 원년(1126년) 11월, 金軍은 한 해에 두 번째로 황하를 渡河(도하), 개봉을 에워쌌다. 金軍의 격렬한 공격이 시작되자 개봉성은 籠城(농성) 40일 만에 함락되었다. 재화를 약탈당하고 부녀들은 끌려가 욕을 당했다. 세계에서 가장 번영했던 도시가 대번에 폐허로 변하고 말았다. 
      
      金軍에 복무했던 연경의 漢人들이 약탈의 안내역이었다. 역대 황제, 특히 휘종의 컬렉션이었던 서화·골동품 등은 인기 있는 약탈물이었다. 휘종과 흠종 父子는 포로가 되었다. 황족, 고급관료, 金國이 필요로 하는 기술자·예술가 등 수천 명이 북쪽으로 끌려갔다. ‘靖康의 變(정강의 변)’이다. 이렇게 宋왕조는 개국 167년 만에 멸망했다. 이 왕조를 중국史에서는 北宋이라고 한다. 
      
      北宋의 잔존세력은 양자강 남쪽으로 피란하여 南宋을 세웠다. 南宋엔 秦檜(진회)라는 奸臣(간신)이 나타나 利敵(이적) 행위를 했다. 그는 1127년 北宋이 金에 멸망할 때 어사대장관(감찰원장 격)이었는데 포로가 되었다가 전향, 金軍에서 부역하다가 가족을 데리고 南宋으로 넘어왔다. 금나라 군인들을 죽이고 탈출하였다고 했으나 金이 간첩으로 써 먹기 위하여 살려 보냈다고 보는 이들도 많았다. 그 眞僞(진위)는 알 수 없지만 남송의 재상으로 복귀하여 한 행동은 간첩질이었다. 문제는 간첩질이 늘 평화와 화해를 앞세운다는 점이다. 전쟁을 하기 싫어하는 황제에겐 달콤한 정책 대안이었다. 진회는 황제를 설득, ‘對金 햇볕정책’을 펴면서 주전파를 견제하기 시작하였다.     
      
      신경질적인 민족주의
       
      1140년과 이듬해 金軍은 올출 장군의 지휘 하에 南宋을 치기 위하여 남하했다. 이때 南宋軍은 여러 방면에서 金軍을 격파했는데 그때마다 진회가 고종에게 아뢰어 이기고 있는 남송군을 철퇴시키고 勝將(승장)을 좌천시키거나 파면했다. 올출은 진회를 이런 식으로 압박한다. 
      “강경론자 岳飛(악비)를 죽이지 않으면 평화협상에 응하지 않겠다.”
      
      진회는 악비 父子를 역모로 몰아 죽였다. 저자 정순태 씨는 秦檜(진회)를 ‘金의 고정간첩’이라고 단정했다. 진회는 제 명(65세)대로 살고 죽었는데 최후까지 利敵행위를 멈추지 않았다. 한국의 한 從北派 거두의 일생과 비슷하다. 
      
      南宋의 영종 시절 主戰論(주전론)의 대표인 한탁주는 1206년 金을 쳤으나 대패했다. 金은 이 침략사건의 책임을 물어 영종에게 韓의 목을 요구했다. 宋朝는 韓을 암살한 뒤 그 머리를 상자에 넣어 金에 보냈다. 金은 韓을 후하게 장사지내 주었다. 일본의 중국사 大家 미야자키 이치사다(宮崎市定)는 이렇게 평했다. 
      
      <무력에 자신이 있었던 여진족의 국민주의는 敵國(적국)의 입장을 인정할 정도로 아량이 있었으나, 국력이 쇠퇴하여 敵國으로부터의 압력을 받고 있었던 南宋은 강력한 민족주의에 눈을 떴으나 이것은 단순히 신경질적인 적개심으로서만 발로되었다.> 
      
      宋은 경제적·문화적인 富國이었으나 지도층이 文弱(문약), 경제력을 自主국방력으로 전환시키지 못하고 끝내는 몽골에 망했다. 富國이었으나 强兵(강병) 만들기에 실패했다. 돈으로 평화를 사려 했으나 여기서도 실패했다. 
      
      이 책을 다 읽은 독자들은 宋과 한국을 비교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宋의 末路(말로)가 쇠망하는 한국의 모델이 될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될 것이다.
       
      
      배부른 나라가 배고픈 나라에 먹히다
       
      송과 한국은 공통점이 많다. 
      
      *宋과 한국은 물질적 풍요에 젖어 자주국방과 尙武(상무)정신을 잃어간 점에서 같다.
      *문화, 예술은 발달했으나 애국심과 단결심과 지도층의 청렴성이 부족했다. 
      *文尊武卑(문존무비)의 폐단이 많았다. 
      *외교에 의리가 없었다. 從北(종북) 정권이 들어서서 韓美FTA를 일방적으로 폐기하면 한국은 신용불량자가 되어 韓美동맹도 흔들릴 것이다.
      *지도층이 敵前(적전)분열했다. 화평파가 金의 공갈에 넘어가 利敵행위를 했다. 
      *진회와 같은 간첩이 애국자들을 죽였다. 
      *화려한 예술과 문화와 위선적 명분론[性理學]이 국가 정신을 좀먹었다. 
       
      같은 차원에서 저자는 한국의 지나치게 커진 좌파 문화권력을 걱정한다. 
      <오늘의 한국도 文化권력이 좌파 지식인들에 의해 장악되고 있다는 점에서 北宋과 별반 다를 바 없는 나라다. 우리 학계 예술계 언론계의 현실이 바로 그러하여 바른 소리를 하는 사람이 오히려 좌파의 포위 공격을 당하고 있다. 아직도 우리 사회에서는 金日成-金正日 주의를 비호 동조하는 깽판 세력이 ‘進步(진보)’의 이름으로 횡행하고 있다.>
      
      그는 국가 지도층의 타락도 지적했다. 
      <군대 안 간 대통령이 군대 안 간 학자를 국무총리로 뽑는 나라는 宋의 문관優位(우위) 체제와 하등 다를 바 없다. 그 어떤 이유에서든 국민의 의무를 이행하지 못한 사람이 국가지도자가 된다면 국군의 사기와 국방력은 저하될 수밖에 없다. 宋의 亡國史에서 교훈을 얻지 못한다면 대한민국은 위험하다.> 
      
      요사이 한글專用(전용)으로 된 역사서를 읽으면 머리가 아픈데 이 책은 저자와 출판사의 뜻이 맞아 漢字를 適所(적소)에 썼다. 《宋의 눈물》은, 지난 40여 년간 기자로서 글을 썼고, 중국사에 정통한 60代 후반 문필가의 성숙된 시각이 깔려 있는 1급 역사 기행문이다. 과거와 현재를 현지紀行(기행)으로 연결하고 宋과 한국을 오버랩 시켜나간 입체적 記述(기술)로 역사적 실감이 더하다. 이노우에 야스시의 ‘風濤(풍도)’처럼 담담하게 이어지는 역사 이야기라 더 많은 생각을 하게 한다. 
      
      宋이 중국 역사상 가장 부자나라였듯이 대한민국도 韓民族 사상 최고 부자이다. 著者가 머리글에서 썼듯이 배부른 나라는 배고픈 나라에 먹힌다. 한반도의 ‘배고픈 나라’는 북한이다. 세계사의 한 법칙은, 남북 대결에선 거의가 정신력이 강한 北의 승리로 끝난다는 점이다. 신라의 삼국통일은 그런 점에서는 예외적이다. 풍요를 즐기면서 강건한 정신을 유지한다는 건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니다. 
      
      19세기 영국의 전성기에 《영웅숭배론》을 쓴 토마스 칼라일은, “가난을 이기는 사람이 100명이라면 풍요를 이기는 이는 한 명도 안 된다”고 경고했다. 한국인들도 가난과의 싸움에선 이겼지만 풍요와의 정신적 싸움에선 지고 있다. 그 결과가 宋처럼 되지 않으려면 이 책을 읽고 느끼는 바가 있어야 할 것이다. 특히 남송의 진회가 敵과 화친한다면서 利敵행위를 해간 과정은 북한과 화해한다면서 安保를 해체해간 햇볕론자들과 흡사하다. 평화제일주의는 많은 경우 입으로만 그럴 뿐 실은 피를 부르는 푸닥거리이다.  

    [조갑제닷컴=뉴데일리 특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