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대통령의 '영화정치'는 위험하다
    가짜인 영화로 진짜인 현실을 조작하려 든다면 전체주의의 망령이 배회하게 될 것이다.
    趙甲濟  /조갑제닷컴 대표
  • 영화와 현실은 가짜와 진짜의 차이인데 영화를 이용, 현실을 바꿔치기 하려고 한다면 이는 영화를 여론 조작의 흉기로 이용하는 전형적인 좌익 선동이다. 히틀러와 스탈린과 김정일이 영화를 선전과 선동의 도구로 이용한 것은 이들이 전체주의 체제의 수괴들이란 징표이다. 좌익독재는 집단독제이므로 군부 독재와 달리 전체주의화할 가능성이 높다. 독재는 사생활을 건드리지 않지만 전체주의는 사생활과 양심 등 인간 삶의 모든 면을 억압한다. 특히 비정치적인 분야, 즉 언론, 문화, 예술, 체육 등을 통치수단이나 국민의식화용으로 쓴다면 양심의 자유, 표현의 자유, 예술의 자유, 사생활의 자유는 말살된다. 
     
    문재인 대통령이 13일 영화 '택시운전사'를 관람했다.영화를 본 문 대통령은 "아직 광주의 진실이 다 규명되지 못했고 이것은 우리에게 남은 과제"라면서 "이 영화가 그 과제를 푸는 데 큰 힘을 줄 것 같다"고 말했다고 한다. 
      
       극영화는 현실이 아니라 현실의 조작이다. 정치인이 이를 마치 다규멘터리인 것처럼 착각하고, 영화를 기초로 하여 진실을 규명해야 한다고 주장한다는 것은 가짜인 영화를 선전 선동의 도구로 활용하여 현실을 조작하려 든다는 비판을 면하지 못할 것이다. 
       영화는 인간의 이성을 마비, 또는 약화시키고 감성에 호소하는 힘이 있다. 선진국에선 영화를 영화로 보지 영화를 정치적으로 이용하려는 이들도 적고 국민들도 잘 속지 않는다. 영화와 현실을 분별하기 때문이다. 
      
       광주사태는 다섯 번의 국가적 조사를 거쳐 진상이 가장 정확하게 해명된 경우이다. 더 밝힐 진실이 없다. 그런데도 문재인 대통령은 있지도 않은 발포 명령자, 있지도 않은 헬기 사격을 규명하여야 한다는 취지의 말을 한다. 여기에 영향을 받았는지 광주의 법원은 전두환 전 대통령의 회고록에서 '헬기 사격이 없었다'는 기술을 삭제하지 않으면 책을 팔 수 없다는 가처분 판결을 내렸다. 법원마저 다섯 번의 국가적 조사를 부정하고 근거도 없이 헬기 사격이 있었다고 단정, 또는 권력의 취향에 영합, 전직 대통령의 기본권(양심의 자유)를 제한하려 한다. 
      
       다섯 번의 국가적 조사란 1980년 광주사태 이후의 계엄사 발표, 1985년의 국방부 재조사 발표, 1988년의 국회 청문회 보고서, 1995년의 국방부 검찰 합동 조사, 1996년의 이른바 역사바로세우기 재판을 가리킨다. 
      
       사망자 숫자, 발포과정, 헬기사격 有無, 전두환의 개입 정도에 대한 사실관계가 이 조사에 의하여 확정되었다. 그럼에도 전두환 당시 국군보안사령관을 발포명령자로 몰려는 집요한 시도와 헬기 사격설 주장이 이어졌다. 이는 일부에서 주장하는 북한군 600명 침투설처럼 근거가 없다. 헬기 사격으로 다친 사람도, 사격을 명령한 사람도 없다. 전두환 사령관으로부터 사격지침이나, 작전 명령을 받은 장교도 없다. 전두환에 관한 한 모든 것을 밝혀낼 수 있었던 김영삼 정부도 확인하지 못하였다는 것은 그런 사실이 없었다는 이야기이다. 
      
       권력의 압박으로, 영화적 선동으로 사실을 조작하거나 국민들이 믿도록 속일 순 있겠지만 이 정도의 진실은 덮거나 왜곡이 불가능하다. 
      
       영화와 현실은 가짜와 진짜의 차이인데 영화를 이용, 현실을 바꿔치기 하려고 한다면 이는 영화를 여론 조작의 흉기로 이용하는 전형적인 좌익 선동이다. 히틀러와 스탈린과 김정일이 영화를 선전과 선동의 도구로 이용한 것은 이들이 전체주의 체제의 수괴들이란 징표이다. 좌익독재는 집단독제이므로 군부 독재와 달리 전체주의화할 가능성이 높다. 독재는 사생활을 건드리지 않지만 전체주의는 사생활과 양심 등 인간 삶의 모든 면을 억압한다. 특히 비정치적인 분야, 즉 언론, 문화, 예술, 체육 등을 통치수단이나 국민의식화용으로 쓴다면 양심의 자유, 표현의 자유, 예술의 자유, 사생활의 자유는 말살된다. 
      
       좌파 운동권 정권이 영화를 정치에 이용하려 드는 것은 매우 위험한 신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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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화려한 휴가의 화려한 조작
       
       보기 싫었던 영화
       
        「화려한 휴가」는 정말 보기 싫은 영화였다. 너무나 우호적인 언론보도를 통해서 영화의 의도와 내용이 알려져 버렸기 때문이다. 左派(좌파)-어용 언론뿐 아니라 정상적인 언론도 이 영화에 대해서는 好評(호평) 이외에 일체의 비평을 삼가고 있다는 점이 무엇보다 이 영화의 성격을 설명해 주고 있었다. 
      
      金大中, 朴槿惠, 盧武鉉 대통령이 이 영화를 보았다는 사실이 나를 냉담하게 만들었다. 大選을 앞두고 개봉되어 정치적으로 활용되는 영화이니 공수부대를 惡으로, 시민들을 善으로 그렸을 것이 뻔하다. 한편으로는 하나의 의무감이 생겼다. 
      
      1980년 5월, 부산의 국제신문 사회부 기자이던 필자가 광주사태(공식적으로는 「광주민주화운동」으로 불리나 선입감을 배제하고 객관적 기술을 하기 위해서 이 기사에선 「광주사태」라고 표기한다)를 취재하러 가지 않으면 기자로서 죄를 지을 것 같은 기분이 들었던 생각이 났다. 
      
      이 영화를 보고 나온 이들의 評(평)을 간접적으로 전해 들었다. 20代 직장여성은 충격을 받았다고 했다. 한숨과 눈물 훔치는 소리가 관람석에서 들리더라고 했다. 그러면서도 『왜 공수부대가 야수처럼 변하여 잔학한 진압을 해야 했는지 그 영화로는 잘 알 수 없었다』고 말했다. 그는 학생들이 이 영화를 보면 국군에 대해서 치를 떨게 될 것이라고 덧붙였다. 한 親韓派(친한파) 일본인은 이 영화를 두 번 보았다면서 다소 흥분해 있었다. 
      
      『저 나름대로 광주사태를 조사한 적이 있어 잘 알고 있습니다. 영화를 보고나서 화가 솟았습니다. 남의 나라 일에 간섭하는 것 같지만 사실을 왜곡한 데 대해서 화가 났습니다. 피해자의 입장에 서는 것도 이해할 수 있고, 공수부대의 잔혹상을 강조한 것도 이해할 수 있습니다만, 이 영화는 대한민국을 敵으로 돌리고 있습니다. 애국가를 부르는 평화적 시위대에 대해서 집단발포하는 장면, 그건 정말 이해할 수 없어요』
      
      기자는 혼자서 이 영화를 볼 마음이 생기지 않았다. 「실미도」, 「태극기 휘날리며」, 「황산벌」이 사실을 왜곡하고 역사를 戱畵化(희화화)했다고 비판하는 기사를 쓰도록 했던 나는 일부러 시간을 쪼개어 어떤 의도를 가지고 영화를 볼 마음이 내키지 않았다. 혼자서 보는 것보다는 다른 사람과 같이 가서 보는 것이 마음이 좀 편할 듯했다. 同行(동행)할 사람을 생각하다가 安富雄(안부웅)이란 이름이 떠올랐다. 
      
      
      공수부대 대대장 출신과 영화관으로
      
      安씨는, 1988년에 내가 月刊朝鮮 기자로서 「공수부대의 광주사태」(그해 7월호 게재)를 취재할 때 만난 공수 11여단 61대대장 출신이다. 1980년 5월21일 낮 전남도청 앞에서 공수부대원들이, 장갑차와 트럭 등을 몰고 돌진해 오는 시위대를 향해서 발포했을 때 그는 현장의 지휘관이었다. 「화려한 휴가」의 성격을 규정하는 가장 핵심적인 장면인 집단발포의 현장, 바로 거기에 있었던 실제 주인공이다. 고참 대령일 때 그를 만나 취재했던 기억이 다시 떠올랐다. 그가 격정적으로 쏟아 놓았던 이야기는 月刊朝鮮 기사에선 匿名(익명)의 증언으로 처리되었다. 
      
      1988년 가을, 국회의 광주사태 청문회 때 증인으로 불려나온 그는 내가 쓴 기사로 인해서 곤욕을 치렀다. 月刊朝鮮의 「공수부대의 광주사태」는 청문회 국회의원들의 교재가 되어 증인신문에 자주 인용되었다. 1995년 5·18 사건이 再수사될 때도 安씨는 여러 번 검찰에 불려가 신문을 받았다. 광주에 투입된 공수부대의 지휘관들 가운데 가장 많이 조사를 받은 이다. 그는 법정에 증인으로도 나와 당당하게 자신의 역할을 설명했다. 安씨는 광주사태의 핵심인 발포 경위를 조사할 때 뺄 수 없는 인물이 되었다. 
      
      66세인 安富雄씨를 19년 만에 다시 만난 곳은 경기도 성남시 분당구의 한 교회 입구에서였다. 그는 내가 찾아온 의도를 묻지 않았는데도 알고 있었다. 그가 먼저 이야기를 꺼냈다. 
      
      『제가 다니는 교회 목사님이 말씀하시더라고요. 제가 공수대대장이었다는 것을 모르고 말입니다. 영화 「화려한 휴가」를 보았는데, 「군인들이 너무했더군」 하셔요. 제가 말했지요. 「아니 목사님, 그런 영화를 믿으십니까?」 그런데 저도 한번 영화를 보기는 해야겠는데 내키지 않아요』
      
      『잘 되었군요. 우리 식사하고 같이 영화 보러 갑시다』 
      
      安富雄 예비역 대령은 서울 출생으로 갑종 출신 장교이다. 월남 전선에 두 번 파견되었다. 광주에 투입된 공수여단 대대장 중에 공수부대 경력이 가장 많다. 직업군인 출신답게 모양과 행동이 아직도 각이 진 느낌을 준다. 그는 『이제 잊을 만했는데 그 영화 때문에 또 생각하게 되었다』고 말했다. 남편이 뻘?륫ㅀ凱形ㅉ卉ㅏ?여러 번 불려다니는 데 신경을 쓰던 부인은 심장병을 얻었다고 한다. 
      
      『저는 지난 3년간 호스피스 일을 했습니다. 말기 암 환자들이 수용된 시설에 매일 나가서 죽어 가는 이들의 말동무를 했습니다. 저의 인생관도 많이 바뀌었습니다. 요사이는 교회 일을 돕습니다. 친구들과 함께 교회에서 색소폰 연습도 자주 합니다』
      
      安씨는 검찰이 결론 내린 것을 되풀이해서 강조했다. 
      
      『趙선생도 잘 아시겠지만 광주에서는 발포명령이 없었습니다. 군인들이 죽지 않고 살기 위해서 돌진하는 시위대 트럭과 장갑차를 향해서 쏜 것이 발포의 시작입니다. 검찰이 그렇게 캐보았지만 발포 명령자는 찾아내지 못했지 않습니까』
      
      우리 두 사람은 중국집에서 식사를 마치고 영화관으로 갔다. 「화려한 휴가」의 다음 상영까지는 거의 두 시간을 기다려야 한단다. 그렇게 공을 들여 영화를 본다는 건 자존심이 상할 일이다. 다시 오기로 하고 헤어졌다. 
      
       
      영화「화려한 휴가」에서 공수부대가 시민들을 유혈진압하는 장면. 
      
       감정 없는 살인기계
      
       
      1996년 10월14일 12·12 및 5·17사건 항소심 2차 공판에 증인으로 출두한 안부웅 前 대대장(오른쪽). 왼쪽은 양대인 前 11공수여단 참모장. 
      
      그 다음 월요일 오후 기자와 安 前 대령은 「화려한 휴가」를 보았다. 공수부대를 「惡의 化身(화신)」 정도가 아니라 「살인기계」로 그린 영화였다. 반면 궐기한 광주시민 측의 인물들은 至高至善(지고지선)의 영웅이요, 천사들이었다. 너무 도식적 설정이어서 감동은 없었다. 
      
      공수부대가 몽둥이로 시민들을 두들기는 「퍽, 퍽」 소리가 일종의 영화음악이었다. 공수부대가 왜 이런 진압방식을 썼는지에 대해선 설명이 부족했지만, 조작이라고 볼 수는 없다. 광주사태 직후 계엄사가 발표한 檢屍(검시)조서상의 死因(사인)분류 통계가 있다. 
      
      165명의 사망자 중 18명이 타박상, 4명이 刺傷(자상)으로 죽은 것으로 되어 있다. 타박상은 주로 머리이다. 공수부대가 진압봉으로 시민들의 머리를 난타하고 찔러 죽게 했다는 이야기이다. 그 모습을 본 온건한 광주시민들까지 화가 나서 돌과 화염병을 던지다가 나중엔 트럭·택시·버스·장갑차를 몰고 나와 軍警(군경)을 몰아붙였다. 시민들은, 5월21일 공수부대가 발포를 시작할 무렵엔 예비군 무기고 등을 습격하여 카빈·기관총·수류탄 등으로 무장하여 군인들과 총격전을 벌였다. 「화려한 휴가」는 그런 시각에서 만들어졌다. 
      
      이 영화에선 공수부대원들이 야수 같지도 않고 기계처럼 보인다. 야수는 감정이라도 있는데 이 영화에 나오는 공수부대원들에게선 인간적 감정 반응이 별로 보이지 않는다. 공수부대가 흥분하여 몽둥이질을 하게 된 것은 공수부대의 특권의식에다가 「계엄령下에서 민간인이 감히 군인들을 향해 돌을 던져?」라는 감정이 출발점이었다. 
      
      安富雄씨는 『釜馬사태식으로 공수부대가 나타나기만 하면 시위는 자동적으로 끝이라고 생각했다. 시민들이 군인들에게 대항한다는 것이 상상되지 않았다. 그래서 시위 진압장비를 준비하지 못했다』고 말했다. 돌을 던지는 다수 시위대를 향하여 쏠 최루탄도 가져가지 않았고, 돌을 막아 줄 방패도 없었다. 머리를 보호하는 防石網(방석망)은 軍 수송반에서 엉성하게 만든 것이었다. 
      
      이 영화에선 시민을 추격하여 골목으로 들어온 공수부대원을 시민이 쏴 죽이고 때려 눕히는 장면이 나온다. 공수부대 장교 출신 시민이 빌딩 옥상에서 공수부대를 향해서 기관총 난사를 하는 장면도 있다. 그가 시민들에게 기관총 쏘는 교육을 한다. 트럭으로 무기고를 부수고 들어가 탈취하는 장면도 실감 난다. 이런 장면을 보고도 관객들은 「이렇게 해도 되나?」라는 문제의식이 별로 생기지 않을 것이다. 그만큼 공수부대는 악당으로, 시민은 정의로운 사람들로 극적 대비를 이룬다. 
        
      나치 군대의 유태인 학살 같은 장면
         
      영화「화려한 휴가」에서 공수부대가 집단발포하는 장면. 
      
      이 영화엔 공수부대의 사격을 유발한 시위대의 장갑차, 버스 돌진이 나오지 않는다.
      
      영화 「화려한 휴가」의 가장 중요한 장면은 전남도청을 지키던 공수부대가 애국가를 부르는 시민들을 향하여 집단적으로 발포하여 수십 명(또는 수백 명)이 죽거나 다치는 대목이다. 나치 군대가 유태인을 집단학살하듯 하는 장면이다. 관객들이 공수부대를 살인집단이라고 생각하지 않을 수 없도록 한 연출이다. 이 영화를 보고 나온 이들은 이 장면을 오래 기억할 것이다. 저녁식사를 하면서 安富雄 예비역 대령에게 물었다. 
      
      『줄곧 피고인석에 앉은 기분이 들지 않았습니까?』
      
      『완전히 만화더군요. 그런 식의 발포명령을 내렸다면 감옥에 갔지 내가 무사할 수 있었겠습니까? 애국가를 부르는 시민을 향해서 발포하라고 명령했다면 부대원들이 나를 가만두었겠습니까? 부대원들 중엔 호남 출신도 많았는데. 
      
      그 영화에선 왜 「김대중을 석방하라」, 「최 돼지는 물러나라」는 구호는 안 나옵니까? 軍에서 장비를 지원해 준 것 같은데 왜 가만있는지 모르겠네요. 공수부대가 살인마가 되었는데』
      
      다음날 국방부에 알아보니 軍에서 장비를 지원해 준 사실은 없다고 했다. 영화 제작사에서 각종 장비를 모형으로 만들어 썼다는 것이다. 軍에서는 영화사 측에 사실왜곡에 대해서 항의한 적도 없다고 한다. 
      
      이 영화는 도입부에서 「사실에 근거하여 극화했다」는 자막을 내보냈다. 집단발포 장면은 사실을 왜곡하는 정도가 아니라 터무니없이 造作(조작)한 것이다. 「사실에 근거하여 극화」한 것이 아니라 「사실에 없는 내용을 극화」한 것이다. 
      
      첫째, 영화에서는 공수부대가 누군가로부터 사격명령을 받고 탄창을 M-16 소총에 끼운 뒤 무릎 쏴 자세를 취한 다음 애국가를 부르는 시민들을 향하여 아무런 경고도 없이 일제히 사격한다. 그날 전남도청 앞에서는 그런 사격도, 그런 사격 명령을 내린 장교도 없었다. 광주사태에 대해서 가장 정밀하게 조사했던 1995년의 서울지검과 국방부 검찰부도 「사격명령은 없었다」는 결론을 내렸다. 
      
      둘째, 공수부대의 발포는, 「시위대가 탈취한 장갑차를 몰고 군인들을 향하여 돌진해 공수부대원을 깔아 사망하게 한 사건을 계기로 자위적, 그리고 조건반사적 대응 차원에서 이뤄졌다」고 검찰은 밝히고 있다. 이때도 공수부대 중대장들에게만 15발씩 지급되고 일반 사병들에겐 실탄이 거의 지급되지 않은 상태였다. 
      
      셋째, 애국가를 부르는 평화적 시위대를 향해 공수부대가 집단 발포하는 장면은 공수부대가 대한민국에 대해서 발포하는 듯한 상징성을 풍긴다. 영화 관람자는 공수부대가 반란군이라는 인상을 받을 것이다. 
      
      
      공수부대만 표적으로 삼은 저의는?
      
      국방부는 이 장면에 대해서 영화사에 항의하고 국민들에게 『그런 일이 없었다』는 해명을 했어야 했다. 軍 장병들에게는 특별한 政訓(정훈)교육을 해야 할 의무가 있다. 공수부대의 난폭한 몽둥이 진압이 광주사태의 한 원인이었음을 부정할 수는 없다. 그렇다고 해서 그런 사실을 확대하여 공수부대를, 「동족을 무차별 사살하는 살인집단」으로 그릴 권한은 누구에게도 없다. 
      
      이 영화는 시작하기 전 「이 영화는 史實과 다릅니다」라는 주의를 주어야 할 터인데 거꾸로 「사실에 근거하여 극화했다」고 한 것은 2중의 왜곡이다. 국방장관은 영화를 보았다는 대통령을 찾아가 이 영화의 이 장면은 사실이 아니라고 설명했어야 했다. 
      
      盧武鉉 대통령은 지난 9월1일 서울시내 영화관에서 김지운 감독, 기획시대 제작의 이 영화를 봤다고 한다. 극장 관계자에 따르면 대통령은 영화를 본 후 눈시울을 붉혔고 영화의 완성도를 높이 평가했다는 것이다. 金大中 前 대통령도 이 영화를 보았는데, 오마이뉴스는 그가 유인택 기획시대 대표와 이런 대화를 나누었다고 전했다. 
      
      『젊은 사람들이 많이 봤으면 좋겠어요. 관객이 얼마나 들었습니까?』(DJ) 
      
      『400만 조금 넘었습니다』(유인택) 
      
      『얼마나 더 들겠습니까?(DJ) 
      
      『700만~800만 정도 예상합니다』(유인택) 
      
      『좀더 노력해서 1000만 명이 됐으면 좋겠습니다』(DJ) 
      
      『어떤 장면이 기억에 남으셨습니까?』(유인택) 
      
      『마지막 결혼식은 명장면이었습니다. 아이디어가 좋았습니다』(DJ)
      
      朴槿惠 한나라당 前 대표는 경선기간에 광주의 한 영화관에서 이 영화를 본 후 『마음이 아프고 무거운 심정으로 봤다』고 말했다. 그는 가라앉은 목소리로 『27년 전 광주시민이 겪은 아픔이 느껴지는 것 같다』며 『그 눈물과 아픔을 제 마음에 깊이 새기겠다』고 덧붙였다. 
      
      이 영화는 다큐멘터리가 아닌 극영화인데 上記 정치인들은 事實이라고 전제하고 감정적 반응을 보인 듯하다. 「이 영화는 사실을 근거로 극화했다」는 영화 제작자의 선전이 먹힌 셈이다. 
      
      이 영화는 공수부대의 「蠻行(만행)」을 부각시키는 데 주력했다. 공수부대 이외의 진압부대, 즉 31사단이나 경찰은 열외시켰다. 광주사태는 특공작전을 전문으로 하는 부대를 시위 진압에, 그것도 진압장비 없이 투입한 데서 비롯되었다. 
      
      공수부대의 투입은 정치적 결정이었다. 全斗煥 장군 그룹, 이른바 新군부가 정권을 잡기 위하여 계엄을 전국으로 확대하고, 정치인들을 연행하고, 국회를 봉쇄하고, 학교를 휴교시킨 이른바 5·17 조치의 일환으로 공수부대가 광주에 내려간 것이다. 1996년 대법원은 全斗煥 그룹의 이 조치를 내란행위로 규정했다. 이에 따라 광주사태 진압도 내란행위가 되었다. 
      
      영화는 이런 배경 설명을 소홀히 하고 공수부대의 강경진압만 부각시켰다. 광주사태에 대한 모든 책임을 공수부대에만 집중시키는 영화를 만듦으로써 反국군 감정을 자극하는 영화가 되어 버렸다. 5·18 재판 때 법원은 공수부대의 지휘관들에겐 법적 책임을 묻지 않았다. 검찰은 집권과정의 주모자만 기소했고, 광주에 파견된 군인들을 기소하지는 않았다. 「군인 신분으로서 상부의 명령을 수행했으므로 처벌할 수 없다」는 논리였다. 이 영화는 검찰이 「처벌불가」라고 결정했던 공수부대를 처벌하고 있는 셈이다. 
    [조갑제닷컴=뉴데일리 특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