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흥남 철수에 북한동포 실어달라" 이승만, 맥아더에 요청한 증언 발견
  • [연재] 이승만史(2) 한미동맹의 탄생 ④ 휴전론과 맥아더 해임

    인 보길 /뉴데일리 대표, 이승만 포럼 대표

    6.25전쟁의 휴전 문제는 바로 김일성의 남침 직후부터 튀어나왔다.
    미국 트루먼의 한국 파병안이 유엔을 통과한 직후 6월29일 영국은 서둘러 소련주재 대사에게
    훈령을 내렸다. 모스크바 영국대사 데이비드 경이 소련측에 한반도 사태의 평화적 해결을 타진하자 그로미코는 구체적 안을 요구했고, 영국은 미국에 ‘중공의 유엔 가입’ 댓가로
    한반도 원상회복 아이디어를 제안했다. 애치슨 국무장관은 단호히 거부한다. 
    인도 정부도 영국을 거들고 나섰다. 네루 수상의 여동생으로 주미대사인 판디트는
    애치슨 국무장관을 찾아가 역시 중공의 유엔가입을 조건으로 휴전협상을 타진하지만 실패한다.
    9월 들어 인천상륙작전이 성공한 뒤 유엔군이 38선으로 진격하자 이번엔 네덜란드가 
    ‘38선상 휴전’ 안을 들이민다. 유엔 사무총장 트리그브 리도 동조하였다.
    오스트레일리아도 남미 페루도 잇따라 휴전안을 제출, 유엔이 할일이 휴전 밖에 없는 듯 했다.

    영국은 유엔군이 북한 전역에 진격했을 때 ‘평북 정주와 함경남도 흥남을 잇는 완충지대’ 설정을 미국에 제시하고 이 선을 ‘유엔 라인’으로 이름붙여 유엔이 통제하자며 한층 적극적이었다.
    저마다 다른 아이디어는 ‘중국이 참전하기 전에’ 서둘러 전쟁을 끝내자는 게 초점이다.
    그러다가 중공군이 대거 밀고 내려와 장진호에서 미군이 악전고투 참패할 때 트루먼이
    “원자탄 사용 고려”라는 방어용 협박탄을 터트린 것, 크게 놀란 영국의 수상 애틀리는
    서둘러 12월4일 워싱턴으로 날아간다. 노동당 정부의 애틀리는 중국 공산당과의 협상에 자신감을 보이면서 또 다시 ‘38선 종전’안을 강력히 주장, 3일간에 걸친 협의 끝에 조기종전에 합의한다.
    회담후 트루먼 대통령은 그날 일기장에 ‘환상적’(fantastic)이라고 적어놓았다.
    그리고는 “동맹국과 사전협의 없이는 결코 원자탄을 사용하지 않겠다”는 성명을 발표하였다.
    종기종전에 의욕을 가진 트루먼은 12월16일 국가비상사태를 선포하고 물가와 임금통제를 단행, 새로운 국방예산 500억달러를 마련하지만, 미국 합참은 그러나 “한국이 전면전을 치를만큼
    가치있는 지역이 아니다”라는 이유로 추가 파병을 거부한다.

  • 트루먼과 애틀리(왼쪽)의 워싱턴 정상회담 기사, 중요한 '평화적 해결' 합의는 작은제목에 보인다.(조선일보DB, 1951.12.10일자)
    ▲ 트루먼과 애틀리(왼쪽)의 워싱턴 정상회담 기사, 중요한 '평화적 해결' 합의는 작은제목에 보인다.(조선일보DB, 1951.12.10일자)
     
  • 북한동포 10여만명이 피난한 흥남철수작전. 미군 배에 오르는 피난민들.(자료사진)
    ▲ 북한동포 10여만명이 피난한 흥남철수작전. 미군 배에 오르는 피난민들.(자료사진)
    “북한 동포를 구하라” 이승만이 미군에 피난 요청한 '흥남철수' 피난민들

    예상못한 대규모 중공군에 연패하는 맥아더의 철수 명령으로 10군단 소속 미육군 제3사단도 
    함흥으로 집결하였다. 몰려든 주민들 속에서 대표격인 3명이 막사로 들어왔다.
    1950년 12월12일 낮 12시 반, 사단장 참모들을 만난 북한주민들은
    함흥시 부시장 이우춘, 함흥시 남구청장 모학목, 함남 청년회장 김일성이다.
    탄원서 같은 문서를 내민 그들이 침통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도와주십시오. 이대로 철수하면 우리는 다 죽습니다. 6년이나 공산당 압제를 받아온 주민들은
    모두 탈출하기를 원합니다. 피란을 가지 못하면 공산군이 다시 와서 여자나 아이들까지 모조리
    학살할까봐 공포에 떨고 있습니다. 흥남으로 가게 해주십시오. 다시 유엔군이 북진할 것으로
    믿지만 일단 고향을 떠났다가 유엔군과 국군을 따라 고향에 오렵니다. 부디 우리를 남한땅으로
    데려가 주십시오. 이렇게 엎드려 간절히 요청합니다.”
    난감해진 미군장교는 “공무원들이 이러면 안된다. 주민들을 진정시키고 통제해야 한다”고 
    달래면서 일단 그들의 요구를 10군단 사령부에 전달하겠다며 돌려보냈다.
  • 흥남철수 때 이승만 대통령이 북한주민을 피난시켜달라고 미군에 요청하여 주민대표들과 대화한 내용을 맥아더에 보고한 미10군단장 보고서.(안재철 저 '생명의 항해' 1권 P323)
    ▲ 흥남철수 때 이승만 대통령이 북한주민을 피난시켜달라고 미군에 요청하여 주민대표들과 대화한 내용을 맥아더에 보고한 미10군단장 보고서.(안재철 저 '생명의 항해' 1권 P323)
그때 한국인 통역관이 말했다. “이건 통역하지 말아달라고 했는데...” 라면서 다가선 통역관은
사실을 넣어놓았다. 함흥 부시장 일행이 온 것은 이승만 대통령이 시킨 것이라는 것.,
한국정부 관리로서 유엔군에게 공식적으로 피란민 수송을 요청하라는 지시를 받았다는 것이었다.
이 은밀한 대화 내용은 미국 극동군사령부 수신메시지(1950.12.14.)에 기록되어있다.
 (안재철, 생명의 항해 1권, 2015. 문서번호 X15132, 발신: 10군단장, 수신: 도쿄 극동군사령관)
지난 연재기사에서 전술했듯이 이미 이승만 대통령은 북한5도 지사를 임명, 수복지역에 통일대비 행정조직을 마련해두었었는데. 뜻밖에 대규모 중공군에 패배를 거듭하는 미군이 철수하자
북한동포 피란대책을 맥아더 측에 요청했던 것이다. 맥아더는 바로 전날 일본에서 날아와 철수작전 회의를 마치고 돌아간 참이었다.
이승만은 “북한 동포들은 공산당을 싫어하는 대한민국 국민이다. 그동안 국군을 도와주고 대한민국에 협력한 애국남녀들을 공산군이 보복 살해할 것이 분명한데, 가능한대로 해로(海路)로 피란할 수 있도록 선박편을 최대한 주선해주기를 간청한다.”고 당부했다는 이야기이다.
주민 대표들은 당장 꼭 월남해야 할 사람들은 3만명 정도라고 덧붙였다. 
맥아더의 명령을 받은 10군단장 에드워드 앨몬드 소장의 답신을 보면,
북한 피란민 구출과 관련하여 “대한민국 정부의 요청을 감안하여 인도주의적인 조치를 취했음”을 보고하고 “도저히 방치할 수 없는 사람들을 대한민국으로 철수 시켰고 더 많이 철수시킬 계획”이라고 다짐까지 하고 있다. 
당시 흥남서 크리스마스 이브까지 철수한 미군이 10여만, 피난민은 더 많은 11만여명이다.
뒷날 가요처럼 ‘눈보라가 몰아치는 바람 찬 흥남부두’ 거대한 엑소더스의 감동적 인간드라마가
이렇게 진행 되었던 속사정을 사실을 아는 사람이 별로 없는 것 같다.
미군의 용역계약 화물선 ‘메러디스 빅토리’호가 “한명도 남기지 말자”며
작은 배에 1만4천명 피란민을 싣고 마지막으로 흥남항을 떠난 그 사진은 수많은 상도 받았다..
휴전후 1955년 이승만대통령은 그때 선장 레너드 라루에게 금성 을지무공훈장을 수여한다.

  • 미군 10군단이 주도한 흥남철수작전 성공 기사.(조선일보 DB, 1951.12.27)
    ▲ 미군 10군단이 주도한 흥남철수작전 성공 기사.(조선일보 DB, 1951.12.27)
  • 서울 중앙청 청사를 점거하고 환호하는 중공군들(자료사진)
    ▲ 서울 중앙청 청사를 점거하고 환호하는 중공군들(자료사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