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바른사회시민회의와 여의도연구소 주관으로 지식인들이 정기적으로 모여 앉아 
    보수 가치를 어떻게 재정립하고 보수 정치세력을 어떻게 재건할 것인가를 놓고
    진지하게 논의 중인 것으로 알고 있다.
    논의가 끝나면 아마 일정한 테제가 발표될 모양이다.
    건설적이고 유익한 작업이 되길 희망한다.
    필자 역시 오래 전부터 보수 정치세력이 이념과 가치를 중심으로 결집한
    전사(戰士) 집단이 아니라 마치 대기업 사원들 같다... 매사에 보수 정체성과는 무관한
    기회주의 집단 같다... 는 의견을 피력해 왔다.

     논의 과정을 미디어 상으로 간간이 지켜 본 바에 의하면
    역시 쟁점은 보수가 보수 정체성을 더 확고히 다져야 하느냐, 아니면
    중도 쪽으로 더 좌(左)클릭을 해야 하느냐로 모아졌다.
    필자는 그 동안 보수 정체성을 더 분명히 해야 한다는 입장에 서왔다.
    이유는, 이명박-박근혜 시대를 통해 적잖은 보수 원내(院內) 구성원들이
    좌파 전업(專業) 투사들의 투철한 정신무장-세계관-역사관, 그리고 희생정신에 비해
    너무나 형편없는 오합지졸들이거나 맹물-날탕-엉터리-날날이 출세주의자들임을 확인하였기에, 그런 가짜 보수들로서는 가열한 이념 싸움에서 도저히 이길 수 없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필자는 결코 중도 우파, 심지어는 중도좌파와 관련해서도 의회민주주의 정치지형에서
    그들의 자리와 역할을 배척하지 않는다. 대한민국을 식민지 종속국 취급하는 극단적 변혁론만
    아니면 중도-중도우파-중도좌파는 다 그 나름의 몫을 인정받을 수 있다.
  • 다만 필자 자신은 자유주의에 몸담고 있고자 할 따름이다.
    그런데 중도나 중도우파, 중도좌파는 소시 적부터 그쪽에 가서 해야 할 일이지,
    몸은 줄곧 보수 프리미엄 석(席)에 두어왔으면서도
    입만 중도요, 중도우파요, 중도좌파요 하는 건 얌체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필자가 배척하는 건 그런 얌체족이 보수정당에 들어와 보수 국회의원 노릇을 하면서
    실제로는 보수 탈색(脫色), 보수 해체, 보수 약화, 보수 몽롱 화(化) 짓을 한
    그 사기성과 파괴성이다.

 보수도 폭은 매우 넓다.
전통적 보수도 있는가 하면, 중도 우파적 보수, 리버럴 우파도 있을 수 있다.
이런 다양성이 보수 전체의 풍요로움을 더해줄 수도 있다.
그러나 문제는 그 명분 하에 보수를 싸우지 않는 보수,
기회주의-투항주의-대중영합주의-좌파 콤플렉스-비겁한 보수로 타락 시키는 퇴행성 질환이
마치 신식 보수인 양 행세 하는 오류와 일탈이다. 이건 아니다.

이명박 정부 때 이른바 ‘중도실용주의’라는 허울 좋은 이름으로 보수의 철학적-가치론적 정체성과 전투력을 해체시켰던 얍삽한 속류(俗流) 경제주의 포퓰리즘이 그 대표적인 사례였다.
누가 중도와 실용의 사전적 의미를 나무라겠는가?
문제는 그걸 내세운 ‘광우병 난동에 대한 두 손 두 발 다 들기‘다.

 이런 유(類)의 ‘중도를 내세운 보수 해체주의’는 지금도 있다.
이들이 보수를 먹으면 보수는 없어진다.
우선 보수라는 영토와 스펙트럼을 확고히 잡아놓고 그 터전에서 보수라는 집을
시대적 요구와 취향에 맞게 리모델링 하고 리셋 하는 건 얼마든지 좋다.
이런 쇄신과 혁신에는 그 누가 반대할 것인가?

 ‘반공주의’만 해도 그렇다.
김정은에 반대하는 건 반공주의인가 아닌가?
지난 시절 ‘막걸리 반공법’ 같은 것으로 인권을 침해한 전례가 있어서
‘반공주의’를 배척 하는지는 모르겠다. 그러나 김정은 전체주의 폭정에 대한 반대를
관행상 ‘반공’으로 이름 붙여 배척하는 것도 안 되나?
자유한국당 홍준표 대표가 ‘종북몰이’를 한다고 비난하는 소리가 들렸다.
그렇다면 일부 세력의 ‘수구꼴통 몰이’는 어떤가?
이 둘을 같은 평면에 대등하게 놓고 똑같이 적대시하는 게 과연
대한민국적 긴박성의 기준에서 ‘합리적’ 보수일까?

 국가주의를 보수에서 빼야 한다는 주장도 나왔다.
국가폭력, 국가가 매사 간섭하는 것, 관료 독주 같은 걸 말하는 것이라면 수긍 못할 말도 아니다. 자유 사회는 시민사회가 큰 역할을 하는 사회다. 그러나 국가 공권력이 너무 무시당하고
위혁(威嚇)적인 시위대에 벌벌 기는 것도 문제다. 시민사회만 강조하다가 무정부상태를 초래하는 역효과는 바람작하지 않다는 점도 아울러 강조해야 할 일이다.
전경이 폭력 시위대에게 포로(?)가 돼 옷을 벗기고 지갑까지 빼앗긴 사례를 돌아봐야 한다.
그게 나라인가?

 엘리트 독주를 배척하는 말도 나왔다.
물론 플라톤 이래의 선민(選民)의식과 철인정치론의 타락한 형태인
엘리트 독재, 엘리트 권위주의, 자칭 1류의 독과점은 경계돼야 한다.
이게 데모크라시 본연의 취지이기도 하다.
그러나 대중의 타락과 횡포는 없는가?
중우(衆愚)정치와 폭민(暴民)정치의 위험성은 없는가?
그리고 니체가 그토록 혐오한 하향평준화의 유형무형의 압력은 없는가?
모든 걸 떼거지의 행패와 ‘막무가내’로 따내려는 대중적 집단이기주의 횡행은 어쩔 것인가?

대의제, 관료제, 제도에 의한 통치, 법치주의를 무시하는
광장의 무정부적 콤뮨(commune) 주의는 또 어떤가?
그리고 이에 영합하고, 그 눈치를 보고, 그 위세에 아첨하고, 그 서슬을 두려워하는
지식인의 비겁한 도피와 침묵은 없는지도 똑같이 따져봐야 한다.
 
 아직 논의 중이기 때문에 지식인들의 토론에 대해 단정적인 평가를 내리기엔 이르다.
추이를 더 지켜보면서 추후 다시 논평을 이어가기로 하겠다.

류근일 / 전 조선일보 주필 / 2017/7/19
류근일의 탐미주의 클럽(cafe.daum.net/aestheticismclub)