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국경색 여파에 민주당 소극적 태도까지… 국회 단일안 도출 험난
  • 문재인 대통령과 여야 4당 원내대표가 지난 5월 19일 청와대에서 만나 내년 개헌에 합의하고 있다. ⓒ뉴시스 사진DB
    ▲ 문재인 대통령과 여야 4당 원내대표가 지난 5월 19일 청와대에서 만나 내년 개헌에 합의하고 있다. ⓒ뉴시스 사진DB

    시대적 화두인 권력분산 개헌(改憲)에 정치권과 국민의 공감대가 형성되고 있지만, 정작 개헌 논의를 주도해야 할 국회에서는 거듭 반복되는 정쟁으로 진척이 이뤄지지 않고 있다.

    현행 헌법상 국회와 함께 개헌안을 발의할 수 있는 주체로 명시돼 있는 대통령의 개헌안 발의 가능성이 대두되는 가운데, 일각에서는 대통령의 개헌안 발의를 우려하는 시선도 있어 제69주년 제헌절을 맞이하는 정국의 '개헌 나침반'이 제자리를 맴돌고 있다.

    제69주년 제헌절을 맞이한 17일, 정치권은 한목소리로 개헌을 부르짖었다. 특히 정치원로들은 개헌의 핵심 과제로 '제왕적 대통령제 청산'을 구체적으로 적시했다.

    자유한국당 강효상 대변인은 이날 "제왕적 대통령제의 폐단에 대한 처절한 반성의 시간을 지나 맞이한 제헌절이라는 점에서 그 어느 때보다 의미가 특별하다"며 "국회와 정부는 힘을 모아 시대적 과제인 분권형 개헌을 이뤄내는 데에 전력을 다해야 할 것"이라고 논평했다.

    국민의당 김동철 원내대표는 "개헌은 시대정신"이라며 "내년 6월 개헌을 통해 만악의 근원인 제왕적 대통령제를 폐기하자"고 부르짖었다.

    김원기·김형오·박관용·임채정·정의화 등 여야 당적을 넘어선 전직 국회의장들도 이날 국회에 모여 대토론회를 열고 제왕적 대통령제 청산에 무게를 실었다.

    김원기 전 의장은 최근의 정치 혼란의 원인을 "모든 권력이 대통령 한 사람에게 집중된 제왕적 대통령제 때문"이라고 단언했다.

    김형오 전 의장은 대통령제의 원조이며 본산인 미국에서는 법률안 제출권과 예산 편성·심의권 등이 국회에 독점적으로 부여돼 있는데, 우리나라에는 이 모든 권한이 대통령(행정부)에게도 동시에 부여돼 있다는 점을 가리켜 "대통령제인 미국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막강한 권력이 우리나라 대통령에 집중돼 있다"고 규탄했다.

    이홍구 전 국무총리도 대토론회에 참석해 "제왕적 대통령제의 폐단을 막는 삼권분립과 지방분권이 실현돼야 한다"고 가세했다.

    이처럼 개헌을 바라는 목소리는 높아지고 있는데, 정작 이러한 여망을 받아안아 개헌을 견인해야 할 국회 개헌특위는 더딘 발걸음을 보이고 있다.

    1987년 개헌을 이끌어낸 이후 30년 만에 다시 설치된 국회 개헌특위는 올해 1월 자유한국당 이주영 의원을 위원장으로 선출하고 원내 4당 간사를 선임한 이래 반년째 활동을 이어가고 있다.

    2월까지 첫 한 달간 속도를 내는 듯 했던 개헌특위는 3월, 박근혜 전 대통령의 탄핵이 확정되고 본격적으로 대선 레이스가 불붙으면서 눈에 띄게 활동이 줄어들었다.

    상실된 동력은 새 정부 출범 이후로도 회복이 안 되고 있다. 지난 5월 새 정부 출범 이후 전체회의 한 차례, 소위 한 차례 열린 게 고작이다.

    특히 최근 정국이 경색되면서 국회가 공전될 때마다 개헌특위도 함께 공전되고 있다. 지난 11~12일에는 인사청문경과보고서가 채택되지 않은 국무위원들에 대한 임명 강행의 후폭풍으로 '국회 보이콧'이 선언되자, 예정돼 있던 개헌특위 소위 개최가 무산됐다. 외부 자문위원들은 덧없이 발길을 돌려야 했다.

    개헌은 1987년처럼 국회에서 여야 합의로 개헌이 이뤄지는 게 가장 바람직하지만, 원내 1당인 더불어민주당이 개헌 논의에 소극적인 것도 문제다.

  • 개헌특위 위원장을 맡고 있는 자유한국당 이주영 의원이 지난 1월 국회에서 개헌특위 전체회의의 개회를 선언하고 있다. ⓒ뉴데일리 이종현 기자
    ▲ 개헌특위 위원장을 맡고 있는 자유한국당 이주영 의원이 지난 1월 국회에서 개헌특위 전체회의의 개회를 선언하고 있다. ⓒ뉴데일리 이종현 기자

    민주당 박완주 수석대변인은 이날 "개헌은 '국민이 대한민국 헌법의 주인'이라는 원칙을 토대로 국민의 참여 속에서 진행돼야 한다"고 주장했다. '제왕적 대통령제 청산'이라는 시대정신을 외면한 포퓰리즘적 개헌관이라는 비판을 피할 길 없는 주장이다.

    이러한 '국민참여 개헌' 주장에 나아갈 길이 더디기만 하자, 개헌특위 국민의당 간사를 맡고 있는 김관영 의원은 "정파적 이해관계에 따라 개헌특위 논의가 이뤄지고 있는 것에 우려를 금할 수 없다"며 "정부·여당을 포함해 국회 모든 정당은 개헌 논의가 속도감 있게 진행될 수 있도록 적극적으로 임해야 한다"고 꼬집었다.

    문재인 대통령은 앞서 지난 5월 여야 원내대표와의 회동에서 내년 6·13 지방선거와 동시에 개헌안을 국민투표에 부치겠다고 약속했다.

    한국당 정우택 원내대표는 회동에서 돌아온 직후 "문재인 대통령이 스스로의 말에 강박관념을 갖는 사람이라며 개헌 의지를 피력했다"며 "대통령은 절대로 (개헌에) 발목을 잡거나 딴죽을 걸 생각이 없다고 했다"고 전했다.

    김동철 원내대표도 "문재인 대통령이 지금으로서는 현행 대통령제를 유지하는 게 바람직하지만, 선거구제 개편이 이뤄지면 다른 권력구조도 선택 가능하다"며 "문재인 대통령이 오늘 한 걸음 나아갔다"고 높이 평가했다.

    문제는 이 '다른 권력구조'라는 것이 서구선진제국이 폭넓게 선택하고 있으며, 독일을 통일로 이끌었고, 우리의 시대과제인 '제왕적 대통령제 청산'의 정신을 담고 있는 의원내각제 개헌이냐는 점이다.

    이 점과 관련해 정우택 원내대표는 "문재인 대통령이 '국민 합의를 얻어야 하는 것 아니냐'며 '국민과 국회의 개헌 방향이 반드시 같은 것은 아니다'라고 했다"고 전했다.

    개헌과 관련해서는 국민투표라는 별도의 절차가 있기 때문에 이 과정에서 국민의 합의 여부는 충분히 검증될 수 있다.

    국회는 애초부터 개헌이나 입법 같은 일을 하라고 총선이라는 국민의 수권절차를 거쳐 구성된 기구인데 '국민과 국회의 개헌 방향이 같은 것은 아니다'라고 말한 것은 최고대의기구에 대한 오해에 기인한 발언이라는 지적이다.

    그 스스로 법조인 출신인 문재인 대통령 또한 이런 점을 모를 리 없는데도 무리한 말을 꺼낸 것은, 국회 개헌특위에서 여야 합의의 개헌안 도출이 좌초될 경우 대통령 본인이 개헌안을 발의할 수도 있다는 뜻을 내비친 것으로 보인다.

    현행 헌법 제128조 1항은 "헌법 개정은 국회 재적의원 과반수 또는 대통령의 발의로 제안된다"고 규정해, 개헌안의 발의권을 국회 뿐만 아니라 대통령에게도 부여하고 있다.

    하지만 헌정사에 비춰볼 때, 제헌(制憲) 이래 역대의 개헌들은 절차적 민주주의의 완성이라는 1987년 개헌만을 빼놓고는 모두 실패라는 냉정한 평가를 피하기 어렵다.

    유의할만한 점은 1987년 개헌만 국회에서 발의됐을 뿐, 나머지 개헌안들은 모두 대통령 또는 대통령의 어용 세력이 발의하거나 비상국무회의·국가보위입법회의 따위의 탈헌법적 불법기구에서 발의됐다는 점이다. 역대 개헌 과정을 돌이켜볼 때, 대통령의 개헌안 발의가 바람직해보이지 않는 이유다.

    대통령의 개헌안 발의는 불가피하게 우리 사회의 '최소 합의'만을 담아낼 수밖에 없는데, 이 경우 우리 정치의 최대 병폐인 '제왕적 대통령 권력의 청산'이라는 시대정신을 담아내지 못할 우려도 제기된다.

    이와 관련, 바른정당 주호영 원내대표는 "선거구제와 권력구조 문제가 가장 문제가 될 것으로 보여진다"며 "정말 이번이야말로 개헌을 위한 가장 절호의 기회라는 생각으로 각 정파가 한 발씩 물러나서 큰 타협을 이뤄주길 바란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