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한나 "국가 위해 희생한 분들이 예우 받는 사회 만드는 게 소명"
  • <작전명 2002.0629.PKM357> 

    2002년 6월 29일, 같은 하늘 아래 서로 다른 소리가 울려 퍼졌다. 

    한국과 터키의 월드컵 3·4위전이 열리던 곳에선 응원의 '함성'이, 연평도 근해 북방한계선(NLL)에선 북한의 공격에 맞서 싸우는 우리 해군의 '총성'이 울렸다. 지난 6월 30일, 15년 전 그날의 총성으로 가슴 한 곳에 상흔을 입은 한 여성을 만났다. 김한나(43)씨다. 

    그는 2002년 제2 연평해전에서 전사한 고(故) 한상국 상사의 아내다. 그의 남편 한상국 상사는 영화 연평해전에서 탤런트 진구가 맡은 역할의 모델이 됐다.

  • 제2연평해전 전사자 故 한상국 상사의 아내 김한나씨가 참전 용사자들을 기억하자는 의미로 제작한 스티커를 들고 있다. ⓒ뉴데일리 공준표 기자
    ▲ 제2연평해전 전사자 故 한상국 상사의 아내 김한나씨가 참전 용사자들을 기억하자는 의미로 제작한 스티커를 들고 있다. ⓒ뉴데일리 공준표 기자


    "그날이요? 전 다 잊었어요. 버티면 다 되더라고요. 사람이 망각의 동물이라는 것도 내가 경험했지만, 그래도 그 사람은 잊혀 지면 안 되는 거잖아요…."

    경기도 광주 초월읍 작은 커피숍에서 만난 김 씨는 그날을 떠올리며 이렇게 말했다. 김 씨는 참수리 문양과 '2002 0629 PKM 357'이라는 문구가 새겨진 스티커를 꺼내서 보여줬다. 

    그의 남편 한상국 상사가 탔던 참수리급 고속정(PKM) 357호와 제2연평해전이 있었던 날을 잊지 말자는 뜻에서 그녀가 만든 차량용 스티커다. 

    그녀는 지난 3월 사비를 들여 제2연평해전 기념 스티커 1,000장을 인쇄했다. 

    "서해바다를 지킨 6명의 용사를 기억하자는 의미에서 만들게 됐습니다. 그날 월드컵의 함성 뒤에는 이런 분들도 계셨다는 것을 알리고 싶었어요. 그 사람(故 한상국 상사)을 기억해 주길 바래요."

    김 씨가 연평해전 스티커를 제작하게 된 배경에는 '세월호 노란 리본'도 있었다. 그는 세월호 사고 희생자를 기억하기 위해 제작된 '노란 리본'을 복잡한 심경으로 바라봤다고 한다. 

    그는 "연평해전은 왜 저렇게 기억되지 못할까, 나라를 위해 돌아가신 분들을 잘 기억하지 못하고 있다는 안타까움이 컸다"고 했다.

  • 제2연평해전 전사자 故 한상국 상사의 생전 모습. ⓒ뉴데일리 공준표 기자
    ▲ 제2연평해전 전사자 故 한상국 상사의 생전 모습. ⓒ뉴데일리 공준표 기자


    故한상국 상사는 2002년 6월29일, 결혼 6개월 만에 한나씨를 혼자 남겨두고 세상을 떠났다. 그날 오전 10시쯤 북한 경비정 2척이 서해 북방한계선을 넘어, 한 상사가 타고 있던 참수리 357정을 기습 공격했기 때문이다. 

    고속정 용사들은 서해NLL 수호를 위해 마지막까지 북한과 치열한 해전을 벌였지만, 북한의 계획된 공격 앞에 357호는 침몰했고, 우리 장병 6명이 전사했다. 이들 가운데 한 분이 바로 한상국 상사다. 

    357정의 조타장을 맡은 한 상사는 배가 침몰하는 순간까지 조타실을 떠나지 않았다. 그리고 그의 시신은 침몰 41일 만에 357정의 조타실에서 수습됐다.

    김 씨의 증언에 따르면, 한 상사는 마지막까지 '조타실'의 키를 놓지 않았고, 침몰한 357정의 뱃머리는 '남쪽'을 향해 있었다. 

    그는 "북쪽을 향해 있었다면 북한이 배를 납치했을 가능성도 있다. 그런데 남편이 키를 잡고 있던 배는 공격을 받아 뱅글 뱅글 도는 상황에서도 결국 남쪽을 향했다. 모두 이런 상황은 드물다고 말해줬다"고 했다. 

    그러나 김씨는 6명의 장병들이 전사한 그날, 정작 그들의 희생을 기억하는 사람은 많지 않았다고 회상했다. 

    김 씨에게 돌아온 것은 남편의 싸늘한 시신과, 김대중 정부의 '외면' 뿐이었다.

    "모두 그날의 전쟁을 패전이라고 불렀어요.

    북한은 우리를 공격하기 위해 전차의 포를 수동으로 달아놓고 기다렸던 반면 당시 357정은 경비 업무를 서고 있었기 때문에 무방비 상태였어요. 우리 배는 할 수 있는 걸 모두 다 했죠. 북한의 배를 무력화 시켰지만, (정부는) 배가 가라앉았다는 이유만으로 패전으로 치부했어요."

    6용사는 전사(戰死)가 아니라 순직(殉職)으로 처리됐다.
    적의 무력도발에 맞서 조국과 국민의 안위를 위해 싸우다 숨진 전사가 아니라, 공무(公務) 수행 중 사망한 순직자로 처리된 것이다.

    당시 6용사의 묘비석에는 순직을 뜻하는, '연평도 근해에서 사망'이라는 글귀가 한 줄 적혀 있을 뿐이었다. . 

    2004년 전사자와 순직자를 구분할 수 있도록 관련법이 개정됐지만, 소급 적용이 어렵다는 이유로 6용사는 지금도 전사자가 아닌 순직자로 남았다.

    김 씨는 2005년, '나라를 위해 목숨 잃은 분들을 돌보지 않는 나라에서 살 수 없다'는 생각에, 가족과 친구가 있는 고국을 뒤로한 채 미국으로 떠났다.

    "당시는 북한과 화해 모드가 조성되고 있었고, 북한에 대해 나쁜 이미지를 만들 수 있는 이야기를 하면 안 되는 시기였어요. 노무현 정부는 나를 사찰하기도 했어요. 이런 곳에서는 살수가 없었죠."

    그녀는 한상국 상사가 전사한 이후의 상황을 자세히 설명했다. 6용사의 영결식은 아주 조촐하게 진행됐다. 

    그는 "어떤 예우도 없었다. 해군장은 5일인데 3일 만에 장례를 끝냈다. 군 통수권자라고 하는 김대중 대통령은 해전 다음날 축구를 보러갔고, 이후에도 조문을 온 적이 없다. 뒤늦게 국방부장관 한 사람이 찾아왔을 뿐이다. 정부는 연평해전 이야기가 알려지길 원하지 않았고, 일반인들의 조문도 막았다"고 했다. 

    김 씨의 기억에 따르면, 한상국 상사에 대한 조문 서신이라고는 주한미군 사령관이 보내준 것이 전부였다. 그는 그때 "정말 이게 나라인가라는 생각을 했다"고 말했다. 

    그들의 죽음을 외면한건 정부뿐만이 아니었다. 2002 월드컵의 열기가 가시지 않은 상황이었고, 정부가 '패전'이라고 치부한 전쟁에서 숨진 남편에게 쏟아지는 것은, 사람들의 조롱 섞인 비난이었다.

    "정말 개떡 같았다. 이런 나라가 어떻게 유지가 될까 싶었다. 군인이 국가를 지키기 위해 희생하는 것이 당연하다는 사고가 만연해 있었거든요. 사람들은 '직업군인이 돈 벌러 갔다 죽었으니 당연하다. 돈까지 받았으면 어떻게든 알아서 살아남았어야 한다'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었어요."

  • 제2연평해전 전사자 故 한상국 상사의 아내 김한나씨. ⓒ뉴데일리 공준표 기자
    ▲ 제2연평해전 전사자 故 한상국 상사의 아내 김한나씨. ⓒ뉴데일리 공준표 기자


    김 씨는 3년의 미국 생활을 끝내고 고국에 돌아왔다. 그녀는 "조국에 대한 의리, 그녀의 남편 한상국 상사에 대한 의리를 지키기 위해서였다"고 그 이유를 설명했다.

    김씨는 미국에서 한국과는 조금 다른 문화를 체험했다. '군인을 존중하는 문화'였다. 

    그는 미국을 찾은 전사자의 아내를 대하는 미국인들의 배려와 예우에 충격을 받았고, 이 문화를 한국에 이양해야 한다는 작은 소망을 갖게 됐다고 말했다.

    "내 남편이 군인이라는 걸 어떻게 아셨는지 저를 반겨주셨어요. 제가 살던 곳에서 남편의 이름이 적힌 벽돌을 선물로 주셨는데, 나중에는 연평해전 전사자의 이름을 모두 새긴 기념벽돌을 만들어 주셨어요. 감동을 많이 받았죠."

    "미국에는 국가를 위해 희생한 분들을 기리고 존경하는 문화가 생활 속에 스며들어 있어요. 정부가 직접 군인에 대한 예우가 생길 수 있는 문화를 조성해요."

    그녀는 미국에 살면서, 동네의 작은 공원에도 그 마을 출신 참전 용사들의 이름이 새겨진 현판이 곳곳에 세워져 있는 것을 봤다. 미국 국민들은 자연스럽게 군인과 예비역에 대한 예우를 표했다. 

    "공공기관이나 은행에 가면 제일 먼저 군인이나 예비역들의 사무를 처리해줘요. 그러나 누구 한 사람 항의하는 사람이 없어요. 지나가다가도 군인을 보면 '내 나라를 위해 싸워줘서 고맙다'라는 인사를 건네는 사람들을 종종 봤어요."

    미국에서 김 씨가 발견한 문화는, 그를 다시 한국에 돌아오도록 하는 계기로 작용했다. 그는 2008년 한국으로 돌아왔다.

    노무현 정부에서 이명박 정부로 바뀌며 패전으로 기록됐던 연평도 교전이, 제2연평해전이라는 용어로 재평가 됐다. 이명박 정부는 6용사를 기리는 행사를 국가행사로 진행하겠다고 약속했다. 

    6용사들의 묘비석에 적힌 문구가 '연평도근해 사망'이 아닌 '제2연평해전 전사'로 바뀐 것도 이때였다.

    김 씨는 그 때 작은 '사명감'이 하나 생겼다고 했다. 그는 '내 나라 대한민국을 위해 희생하시는 분들이 존중받는 문화를 만들겠다'고 다짐했다. 

    그녀는 남편과 같이 찍은 사진 한장 남기지 못했다는 슬픔을 뒤로하고, 매년 제2연평해전 기념일에 그녀를 찾아오는 언론사의 인터뷰요청에 일일이 응했다. 제2연평해전을 알리기 위해서였다.

    그녀가 올해 제2연평해전 15주기를 맞아, '연평해전 추모 스티커'를 제작한 것도 이 때문이다.

  • 제2연평해전 전사자 故 한상국 상사의 아내 김한나씨가 참전 용사들을 기억하자는 의미에서 제작한 스티커. 제2연평해전 당일인 2002년 6월 29일 날짜와 당시 장병들이 타고 있던 고속정 참수리호의 이름 'PKM357'이 인쇄돼 있다. ⓒ뉴데일리 공준표 기자
    ▲ 제2연평해전 전사자 故 한상국 상사의 아내 김한나씨가 참전 용사들을 기억하자는 의미에서 제작한 스티커. 제2연평해전 당일인 2002년 6월 29일 날짜와 당시 장병들이 타고 있던 고속정 참수리호의 이름 'PKM357'이 인쇄돼 있다. ⓒ뉴데일리 공준표 기자


    김 씨가 페이스북에 스티커 제작 소식을 알리자, 전국 각지에서 연락이 왔다. 차량에 스티커를 붙였다며 '인증샷'을 보내는 사람들도 많아졌다. 직접 제작해 붙이겠다고 하는 사람들도 생겼다. 

    그는 "너무 많은 분들이 기다리고 계신데 손이 부족하다"고 했다. 그는 스티커를 희망하는 사람들의 주소를 취합해 일일이 우편으로 스티커를 보내고 있다. 

    김 씨는 사람들의 관심이 고맙지만, 한편으로는 걱정이 된다고 속내를 털어놨다. 언론에서 연평해전 이야기를 다룰 때, 연평해전 영화가 제작 됐을 때 반짝하던 관심이 시간이 지나며 사그라지는 상황을 자주 목격했기 때문이다.

    그는 "스티커가 너무 흔해져 버리면 사람들이 무슨 상징인지 제대로 모르고, 또는 재미나 흥미로 받으면 어떻게 하나 걱정된다"고 밝혔다.

    그는 "생활 속에 묻히는 게 싫지만, 그래도 이 스티커를 붙인 분들이 '이런 사람들이 있었지. 연평해전에서 희생한 군인들이 있었지'하며 6용사의 희생을 알아주셨으면 좋겠다"고 했다. 

    김 씨는 현재 첫판 인쇄 스티커를 모두 배포하고, 두 번째 인쇄 스티커를 기다리는 중이다. 그는 모든 것을 사비로 충당해야하기 때문에 이번에도 1,000장만 인쇄했다.

    "이제 시작이에요. 스텝 바이 스텝이잖아요. 국가를 위해 일하시는 모든 분들, 군인, 소방관, 경찰 다른 사람을 위해 희생을 선택한 분들의 가치를 알아주고 존중하는 공동체가 되길 바랍니다."

    인터뷰가 끝나고, 그는 마지막으로 하고 싶은 말이 있다고 했다. 우리 사회에 군인을 예우하는 문화가 자리 잡는 게 꿈이라고 밝힌 그와 잘 어울리는 말이었다.

    "군 가산점 제도가 하루 빨리 부활됐으면 좋겠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