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웜비어가 가는 날 아버지는 의연했다
아버지는 의연했다. 슬픔으로 얼굴이 일그러진 어머니의 손을 꼭 쥔 채
그는 미국 애국주의(American patriotism) 넥타이를 매고 카메라 앞에 서있었다.
그는 자신의 사랑하는 아들이 비참하게 죽었다고 말하지 않고
“그는 평화를 찾았다”고 말했다.
22살의 꽃 같은 미국 청년 웜비어의 죽음은 전(全) 미국을 격분시켰고
그 동안 알게 모르게 진행 중이던 미-북 접촉을 무산시켰다.
그의 희생은 그래서 우리 한국을 위해서도 중요한 의미를 띠었다.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겉으로는 강경한 목소리를 내는 것 같지만
속으로는 철저한 장사 속을 챙기는 사업가다.
그는 북한을 향해 미국 최고의 전략적 자산을 총동원하면서 미국장병들로 하여금
“우리는 오늘밤이라도 싸울 준비가 돼 있다”고 말하게 하는 등,
수틀리면 당장 선제타격이라도 할 것 같은 몸짓을 취하고 있다.
그러나 그건 김정은을 겁주면서 “이래도 흥정 안할래?”라고 청하는 이면을 가지고 있다. 인도 주재 북한 대사는 “미국이 한-미 연합 군사훈련을 축소하면 우리는 핵 동결
협상을 할 수 있다”고 말했다. 이건 한국의 청와대 특보의 말과도 일맥상통한다.
틸러슨 미국 국무부장관도 “우리는 북한의 정권타도나 군사적 공격을 고려하지 않는다”고
말함으로써 가능한 한 협상에 의한 해결을 바란다는 신호를 보낸 바 있다.미국 안에는 이미 “북한의 핵보유를 묵시적으로 인정해 주고
핵 폐기 아닌 핵 동결에 목표를 두자, 그래서 북한이 그것만 들어주면
미국은 ‘미-북 평화협정’ 체결을 논의해주어야 한다”는 주장이 있어 왔다.
트럼프 행정부는 그와 관련해 북한 측과 접촉한 흔적이 이번에 드러났다.
그런 접촉이 웜비어 청년의 죽음 때문에 수포로 돌아갔다는 뉴스가 그 점을 말해준다.트럼프 대통령과 미국 백인사회의 여론 또한 우리가 왜 해외에서 다른 나라를 위해
비싼 돈 써가며 경찰관 노릇을 해주어야 하느냐는 고립주의적-일국주의적 경향으로 흐르고 있다. 게다가 한국 정부가 사드 배치에 토를 단다는 소식을 접한 트럼프 대통령은
격앙된 반응을 보였다고도 한다. 트럼프의 성격과 행태, 그리고
미국 국민의 반(反)개입주의 여론으로 보아 한-미 정상회담에서
만약 무엇이 잘 안 맞는다 싶으면(그렇게 되진 않으리라 믿지만)
이미 박근혜 정부 때 한국을 중국 포위망에서 제외시켰던 이왕의 추세를
더 심화시킬지도 모를 일이다. 곧 있을 한-미 정상회담이 그래서 중요하다.
만약 한국의 ‘자주파’와 미국의 ‘신고립주의’가 ‘역설적으로’ 맞아떨어지면
트럼프의 미국은 한국에 대한 동맹의식을 식힐 수도 있다.이 와중에서 미국 청년 웜비어가 무참하게 희생당했다.
그의 희생은 미국 국민들의 자존심에 큰 상처를 주었다.
일본이 진주만 기습으로 미국 국민의 자존심을 건드렸을 때도
미국 국민들은 그 때까지의 고립주의적 무관심에서 깨어나
반(反) 파시스트 연합전선에 기꺼이 뛰어들었다.
웜비어 청년의 희생도 미국 국민들에게 “김정은이 설마 저런 악당일 줄이야”라는
놀라움과 충격을 안겨주었을 것이다.여기다 더해서 김정은은 지금 미국 로스앤젤레스와 뉴욕도 때릴 수 있는
대륙간탄도탄 개발에 착수하고 있다. 이런 동향들로 인해 미국 일각에는
“미치광이 같은 김정은을 협상으로 다독거릴 수 있다고?”라고 회의하는 견해가
새삼 다시 대두할 수도 있다. 이 점에서 웜비어 청년의 사례는
한국의 ‘체제 유지 파(派)’를 위해서도 고귀한 희생이었다.
물론 이 애도와 분노 분위기가 길이 지속되는 건 아니겠지만.류근일 / 전 조선일보 주필 / 2017/6/24
류근일의 탐미주의 클럽(cafe.daum.net/aestheticismclub)