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일본정부-한국통감부-대륙낭인의 "병탄 합동작전"

    일본의 한국병탄은 야마가타 아리토모-가츠라 다로-데라우치 마사다케-고무라 쥬타로를 중심으로 한 일본정부, 이토 히로부미-하야시 곤스케-하세가와 요시미치가 이끄는 한국의 통감부와 주둔군, 그리고 우치다 료헤이-스기야마 시게마루-다케다 한시를 핵심으로 한 대륙낭인들의 합작품이다.
    그러나 최전선에서 병탄의 길을 열어 간 무리는 우치다 료헤이와 그를 중심으로 한 대륙낭인 세력이었다.

    이토 히로부미가 통감으로 임명된 직후인 1905년 말, 스기야마 시게마루(杉山茂丸, (6)‘병탄의 첨병(C) 주역들’ 참조)는 이토의 초청을 받고 레이난사카(靈南坂)에 자리 잡고 있는 관저로 찾아갔다. 통감으로 해야 할 일을 구상하면서 이토는 스기야마의 식견과 견해를 듣고 싶었다. ‘정보의 집결지’이면서 ‘해결사’의 능력을 지닌 스기야마를 이토는 높이 평가하고 때때로 그를 개인적으로 불러 정국의 동향과 의견을 경청하곤 했다. 1895년 이후 가까운 관계를 유지해 온 스기야마는 이토에게도 여러모로 ‘도움이 되는’ 인물이었다. 특히 세이유카이(政友會)를 창당하는 과정에서 이토는 스기야마의 적극적인 지원을 받았다. 이토가 1900년 제4차 이토내각을 꾸밀 때 스기야마에게 경시총감의 직책을 권유할 정도로 그의 능력을 높이 평가하고 있었다.

    "주인 못 만난 名馬 한 필을 부리시지요"

    저녁과 반주를 겸한 두 사람의 대화는 오랫동안 계속됐다. 대화의 주제는 일본정치에서 동아시아 정세에 이르기까지 광범위했다. 두 사람의 대화가 한반도의 중요성과 통감의 막중한 사명에 이르자, 스기야마는 고쿠류카이(黑龍會)의 회두(會頭) 우치다 료헤이를 통감의 개인보좌관으로 삼아 활용할 것을 다음과 같이 천거했다.

    “지금 일본에는 비길 데 없는 명마가 한 필 있습니다만 불행하게도 그 말을 부릴 수 있는 인물이 없는 것 같습니다. 각하께서 그 말에 재갈을 물리고 한 번 부려 봄이 어떻겠습니까?”
    “그 말이 누군가?” 이토가 물었다.
    “우치다 료헤이입니다.” 스기야마가 답했다.
    “우치다 료헤이라! 불굴의 사나이라고 알고 있는데 한번 시승(試乘)해보도록 할까!” 이토가 화답했다. 스기야마의 천거를 받아들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관직 없이 자유롭게 사명을 수행하련다"

    며칠 후, 후쿠오카(福岡) 출신으로 우치다 료헤이의 선배이면서 외교관인 구리노 신이치로(栗野慎一郞)는 이토 히로부미의 심부름으로 우치다를 찾았다. 그는 우치다에게  이토의 개인 참모로 통감부에 참여할 것을 다음과 같이 권했다. “군(君)이 이토 후작을 수행하여 한국으로 가서 그의 한국 경륜을 도울 뜻은 없는가? 후작은 군이 (통감부의) 관리가 되기를 희망하면 관리로, 그렇지 않으면 자유로운 신분으로 필요한 임무를 담당하기를 바라고 있네. 국가를 위해서 분발하는 것이 어떤가?” 이에 우치다는 ‘자유로운 신분’으로 활동한다는 것을 조건으로 이토의 초청을 받아들였다.

    우치다의 역할은 이토의 세 번째 통치구상, 즉 한국 내 친일세력을 양성하고 조종하여 합방운동을 한국인이 주도하는 것으로 만드는 것이다. 결과적으로 우치다는 이토의 기대 이상으로 병탄 실현에 중대한 역할을 담당했다.

  • 통감으로 부임하는 길에 대마도 嚴島신사에서 기념 촬영한 사진, 중앙 화살표가 이토 히로부미, 왼쪽에서 세번째 화살표가 우치다 료헤이.
    ▲ 통감으로 부임하는 길에 대마도 嚴島신사에서 기념 촬영한 사진, 중앙 화살표가 이토 히로부미, 왼쪽에서 세번째 화살표가 우치다 료헤이.

    동학운동에 불 지른 땅...우치다의 한국인觀

    이토가 ‘한국시정개선에 관한 협의회’를 통해 통감지배를 한국화하고, 제도를 통해 실질적 지배권을 조금씩 잠식해 나가는 동안, 통감의 막빈(幕賓)으로 이토를 수행하여 서울에 함께 온 우치다 료헤이는 남산 밑 필동에 위치한 관사에 짐을 풀었다. 그리고 자신이 해야 할 역할과 방향을 모색했다. 그의 거처는 ‘정한(征韓)’의 뜻을 펼치려는 대륙낭인의 거점이 됐고, 시간이 갈수록 이곳을 찾아드는 친일 한국인의 수가 늘어갔다. 

    한국 땅은 우치다에게 결코 낯선 곳은 아니었다. 1894년 동학봉기 당시 청일전쟁을 위한 ‘방화의 역할’을 담당했던 덴유쿄(天佑俠) 활동 이후 이미 여러 차례 오갔기 때문에 상당히 친숙한 곳이었다. 그러나 이번 기회는 과거의 경우와 달랐다. 우치다는 ‘정한’이라는 뚜렸한 목적을 실현하기 위하여 통감의 참모라는 신분으로 한국에 온 것이다. 통감부의 공식적인 관리 신분은 아니었지만, 통감 이토 히로부미의 개인 참모라는 지위는 우치다에게 과거와 달리 확실한 신분 보장과 충분한 재정 지원을 받으면서 활동할 수 있게 만들어 주었다. 이로써 그는 병탄의 길을 열어가는 데 결정적 역할을 담당하게 된다.

    한국의 내정 조사 특명...각계 인맥 만들기

    통감부 업무에 구속되지 않는 우치다는 자유롭게 활동했다. 그는 이토 통감으로부터 ‘한국의 내정조사’라는 특명을 받고, 반년동안 여러 정치, 사회, 종교단체의 성격과 구성원들을 살펴보고, 지방의 여러 곳을 여행하고, 각계 각 계층의 사람들을 만났다. 한국정계의 복잡한 세력관계와 인맥에 관한 지식을 축적하면서, 한국 내 친일과 배일단체의 성격과 현상을 조사했다. 또한 다케다 한시(武田範之, (6)‘병탄의 첨병(C) 주역들’ 참조))를 위시하여 뜻을 함께 하는 고쿠류카이 회원과 대륙낭인들을 한국으로 불러들여 앞으로 해 나갈 일들을 의논했다. 여유로운 듯 한 우치다의 이러한 행각은 한국의 정치 현상과 사회 실태를 살펴보면서 ‘정한’을 위한 큰 방향과 전략 수립을 위한 사전 준비였다.

  • <p>현해탄을 넘나들며 한국 병탄의 중심에 섰던 대륙낭인 그룹 흑룡회 주역들, 왼쪽부터 우치다 료헤이, 이노우에 도사부로(井上藤三郞), 다케다 한시, 요시쿠라 오세이(吉倉汪聖), 구주 요시히사(葛生能久).</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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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현해탄을 넘나들며 한국 병탄의 중심에 섰던 대륙낭인 그룹 흑룡회 주역들, 왼쪽부터 우치다 료헤이, 이노우에 도사부로(井上藤三郞), 다케다 한시, 요시쿠라 오세이(吉倉汪聖), 구주 요시히사(葛生能久).

     


    준비기간을 거친 우치다는 한국을 병탄하는 것은 그리 어려운 과제가 아니라는 확고한 결론을 내리게 되었다. 반년 후 그가 얻은 결론은 가능한 한 빠른 시일 안에 “보호정치를 폐기하고, 한국 황제를 폐위시키고, 일한연방(日韓聯邦)을 성취”함으로써 일본의 완전한 지배권을 확립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는 지금과 같은 점진주의를 바탕으로 한 보호 통치는 결국 정치적으로나 경제적으로 더 많은 자원을 낭비하게 되고, 오히려 한국 내 반일 세력을 양성하는 결과를 가져온다고 판단했다.

    "점진책은 낭비, 즉각 장악을"

    우치다가 이토 통감에게 제출한 보고서[滿韓開務鄙見]에 의하면 필요한 것은 일본 정부와 통감부가 한국을 일본의 일부로 귀속시킨다는 확고한 의지와 뚜렷한 방향 설정이고, 이를 한국인의 자발적 운동으로 만들어가는 전략이었다. 그는 중국의 혼란과 포츠머스 조약의 여세를 몰아 “먼저 한국을 발본(拔本)하여 미리 기초를 다지고”, “정권을 장악하여 위압(威壓)”할 것을 건의했다. ‘보호’통치가 아니라 직접통치에 의한 강력한 지배, 즉 ‘급진적 병탄’을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면서 그는 ‘병탄’을 한국인의 운동으로 만들어 나가기 위하여 ‘한국인의 특성’을 활용해야 한다는 점을 강조했다.
    우치다가 활용한다는 ‘한국인의 특성’은 다음과 같은 것이었다.

    "달면 삼키고 쓰면 뱉는 한국인 습성 활용하자"

    "달면 삼키고 쓰면 뱉는 것이 일반적인 한국인의 습성이며, 그들은 이리의 잔인하고 혹독한 본성을 아첨과 가식의 양가죽 속에다 감추고 있다. 불쌍해서 친절을 베풀면 버릇이 없이 굴고, 안아 주면 업어 달라고 매달리고, 실질적인 독립심은 없으면서도 겉으로의 독립만 추구하는 것이 한국인들이다. 김춘추의 외교 정책(동족인 고구려를 멸망시키기 위하여 외국인 당나라 군대를 불러 들인 것을 뜻함--필자주)은 세월이 흐르는 동안 한국인의 성격, 습성으로 변하여 그들 속에 깊이 뿌리박고 있다. 이제부터 이러한 특성을 가진 한국인들을 조종하여 일본에 유리하게 해야 할 것이다."<日韓合邦秘史>

    한국인의 자발적 합방운동 유도...일진회 선택

    우치다가 ‘일본에 유리하게’한다는 것은 한국인들을 조종하여 병탄을 ‘순수한 한국인의 애국운동’으로 이끈다는 것을 뜻하고 있었다. 일본의 한국 병탄은 일본이 주도한 것이 아니라, 한국인의 간절한 희망과 전적으로 자발적 의지에 의하여 성립된 역사적 사실로 객관화 시켜야 한다는 것이다. 그동안 한국의 정세와 정치·사회단체의 현황을 면밀히 검토한 우치다는 이 역할을 담당할 ‘주구(走狗)’로 일진회(一進會)를 선택했다. 

    우치다는 도쿄의 스기야마에게도 같은 내용의 서신을 보내면서, 일진회의 친일적 성향, 어려움에 처해 있는 현재의 상태, 활용할 가치가 있다는 것 등을 자세히 전달했다. 그리고 도쿄 정부의 실권자인 야마가타 아리토모, 가츠라 다로, 데라우치 마사타케 등에게도 한국의 현실을 설명하고, 일진회를 도울 수 있는 방안을 검토해 달라고 당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