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北에 우회적으로라도 퍼주자'는 것은 성찰 없는 퇴행일 뿐
  • 영국 기사작 로저 무어 경의 타계 소식이 알려진 23일(현지시각) 미국 할리우드 명예의 거리에 마련된 경의 석판 위에 추도의 꽃송이가 올려져 있다. ⓒ뉴시스 사진DB
    ▲ 영국 기사작 로저 무어 경의 타계 소식이 알려진 23일(현지시각) 미국 할리우드 명예의 거리에 마련된 경의 석판 위에 추도의 꽃송이가 올려져 있다. ⓒ뉴시스 사진DB

    영국 기사작 로저 무어 경이 향년 89세를 일기로 스위스에서 타계했다.

    경은 미국과 소련이 적대적 공생을 모색하던 데탕트(Détente) 시대를 상징하는 최고의 스타였다.

    1973년작 '죽느냐 사느냐'부터 007 제임스 본드를 맡은 경은 이후 △황금총을 가진 사나이(1974) △나를 사랑한 스파이(1977) △문레이커(1979) △유어 아이스 온리(1981) △옥토퍼시(1983) △뷰투어킬(1985) 7편의 007 시리즈에 연속 출연하며 '가장 인기 있는 제임스 본드'로 자리매김했다. 007 시리즈도 이 '로저 무어 시대'에 최고의 인기와 흥행을 누렸다.

    '유어 아이스 온리'의 마지막 장면에서 경이 미사일 좌표유도장치를 절벽 아래로 던져버리며, 소련의 고골 장군(발터 고텔 분)을 향해 "당신네들도 가지지 못하고, 우리들도 가지지 못한다"며 "이것이 데탕트 아니냐"라고 되묻는 것은 시대상황을 절묘하게 표현한 명대사로 알려져 있다.

    경의 타계는 곧 한 시대의 종언(終焉)으로 볼 수 있다. 경이 제임스 본드 역할을 내려놓은 뒤, 소련의 붕괴로 냉전이 종식되면서 007 시리즈는 방향을 잃었다. 제임스 본드는 여럿 바뀌었지만, 시리즈는 아직까지도 명확한 갈피를 잡지 못하면서 예전의 존재감을 되찾지 못하고 있다.

    이렇듯 한 시대의 종언을 바라보면서, 냉전 종식으로부터 어언 30년이 다 돼가는 지금까지 일관성을 잃은 채 표류하고 있는 우리의 대북(對北) 정책을 되돌아보게 된다.

    경이 본드 역할을 내려놓은 격동의 80년대 후반, 냉전 종식과 5년 단임의 대통령 직선제 개헌이 국내외적으로 맞물리면서 이후 대북 정책은 5년 단위의 갈짓자 행보를 거듭했다.

    문재인 대통령은 23일 경남 김해 봉하마을에서 열린 노무현 8주기 추도식에서 "이명박·박근혜정부 뿐만 아니라 김대중·노무현정부까지 지난 20년 전체를 성찰하며 성공의 길로 나아갈 것"이라고 다짐했다.

    하지만 최근 언론을 통해 흘러나오는 대북정책의 기조를 보면, 과연 이명박·박근혜정부 지난 10년의 잘못 뿐 아니라, 그 이전 김대중·노무현정부 10년의 잘못까지도 성찰하겠다는 의지가 있는지 의심스럽다는 지적이다.

  • 문재인 대통령과 문정인 청와대 외교안보특보. 지난 2012년 10월 4일 10·4 남북정상선언 5주년을 기념해 대담을 하고 있는 모습이다. ⓒ뉴시스 사진DB
    ▲ 문재인 대통령과 문정인 청와대 외교안보특보. 지난 2012년 10월 4일 10·4 남북정상선언 5주년을 기념해 대담을 하고 있는 모습이다. ⓒ뉴시스 사진DB

    새 정부의 청와대 외교안보특보로 임명된 문정인 연세대 명예교수는 요즘 연일 계속되는 언론 인터뷰에서 어떠한 우회로를 통해서라도 개성공단과 금강산 관광을 재개하자고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23일자 〈조선일보〉에 보도된 인터뷰에서 "노동자 임금의 직접·개별 지불과 같은 지급 방식 개선 을 북한 당국과 논의할 수 있다"며 "금강산에 입장할 때 관광객들에게 개별로 입장료를 받으면 안보리 금지 조항에 해당하지 않는다"고 북한 당국에 돈을 지급할 '해결책'을 나열한 문정인 특보는 24일자 〈세계일보〉 인터뷰에서도 다르지 않은 태도를 보였다.

    문정인 특보는 이날 세계일보 인터뷰에서 "북한에만 (비핵화를 하라고) 요구하지 말고, 우리도 뭘 해줄 것인가를 생각해야 한다"며 "한미 연합군사훈련 잠정중단도 생각할 수 있어야 한다"고 한 발 더 나아갔다.

    이러한 입장을 가진 문정인 특보가 청와대에 입성한 것은, 결국 김대중·노무현정부 시절 때의 굴종적 대북 정책으로 되돌아가는 것일 뿐 무슨 '성찰'이 담겨 있는 것인지 알 수 없다는 비판이 나온다.

    '햇볕정책'으로의 퇴행을 비판하면 놀랍게도 '냉전적 사고방식'이라는 비판이 돌아오곤 하는데, 과연 진정 '냉전시대'의 사고방식에 머물러 있는 게 누구인지도 생각해볼 문제다.

    로저 무어 경이 열연한 007 시리즈로 상징됐던 냉전 시대는 이미 종언을 고했고, 세계는 개별 국가의 독재 체제 보장보다 해당국 국민의 인권 등 보편적 가치를 중시하는 새로운 질서로 돌입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3대 세습·전제 독재라는 시대착오적 전체주의 체제인 북한의 '체제 보장'을 해주지 못해 안달하며, 주민의 인권 보장과 비핵화를 명분으로 제재해오는 국제사회를 '제국주의' 보듯이 하는 일부 586들의 사고방식이야말로 '냉전 시대'에나 있을 법한 세계관에 아직도 사로잡혀 있는 것은 아닌지 의심스럽다.

    "안보도, 경제도, 국정 전반에서 훨씬 유능함을 보여주자"며 "다시는 실패하지 않을 것"이라고 천명했던 문재인 대통령의 '도전'이 성과를 거두기 위해서는 임기 중(지난 2006년) 북한의 첫 핵실험을 허용하며 처절한 파탄으로 귀결됐던 노무현정권 안보정책에 관한 진지한 성찰이 선행돼야 한다.

    고모부를 고사총으로 쏴죽이고, 이복형을 독살하는 정신질환자의 손에 소형화한 핵탄두를 장착한 대륙간 탄도미사일을 쥐어주지 않겠다는 국제사회의 결연한 의지에 맞서, 우회로와 편법을 찾아 어떻게든 현금을 전달하고야 말겠다는 외교안보특보와 "새 정부의 통일·외교·안보정책의 기조를 함께 논의하고 챙겨나가게 될 것"이라는 자세로는 다짐을 지켜내기가 아마도 쉽지 않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