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인권은 조사대상 아니라며…"

  • 초기 국가인권위원회의 북한인권문제에 대한 입장은 정체성을 심히 의심케 하는 것이었다.

    2001년 김대중 정부 시기에 국가인권위원회를 설치하자 탈북자들과 북한인권시민단체들이 매우 고무되어, 북한의 인권문제에 대하여도 적극적인 역할을 해줄 것을 기대하고 진정을 계속하였다.
    그러한 압박에 밀려 국가인권위원회는 2006년 12월 11일에야 자신의 입장을 공식 발표하였다.
    11명의 인권위원들이 10번에 걸친 전원위원회의 논의결과를 정리한 것이다.

    위원회는 인권의 보편성과 남북관계의 특수성을 병렬한 다음 북한인권의 특수성에 방점을 두었다.
    자유권적 기본권보다는 사회권적 기본권에 비중을 두었다.
    사회권적 기본권을 앞세우는 입장은 북한의 식량문제를 앞세워 인권침해를 방관하는 방향으로 해석될 수 있다.

    결론적으로 국가인권위원회 법 제4조와 제30조의 해석상 대한민국 정부가 실효적 관할권을 행사하기 어려운 북한 지역에서의 인권침해행위나 차별행위는 국가인권위원회의 조사대상에 포함될 수 없다고 발을 빼었다.
    유엔의 인권보호체제의 원칙에 따라 북한인권문제에 대해 적극 대응해야 한다는 의견은 묵살되었다.
    그 토의기록은 공개하지 않기로 했다.
    부끄러움 때문일 게다.
    탈북자와 북한인권NGO들은 크게 좌절하였다.

    바로 그 국가인권위원회가 3년 앞서서 2003년 3월 26일 인권의 보편성을 들어 미국의 이라크전쟁에 반대한다는 의견을 발표한 것과는 앞뒤가 맞지 않는다.
    이라크 문제에는 신속하게 전쟁반대 의견을 발표하고 한국정부와 국회에게 이라크 전쟁으로 희생된 사람들의 인권을 위해 노력할 것을 촉구하면서 정작 북한동포의 인권을 외면하려는 입장은 설득력이 전혀 없다.
    위원회의 자기부정이고, 북한문제에 대한 정치적 편향성을 여실히 보여준 것이다. 



  • 하여튼 유엔의 북한인권결의안에 반대하던 햇볕정부의 입장을 뒷받침하려는 노력으로 볼 수 있다.
    햇볕정책 당시 정부는 남북한 정부 간의 화해 협력을 발전시킨다는 명분으로 탈북자 문제나 북한주민들의 기본적 인권에 대해 냉소적이었다.
    폭압정권과의 화해협력같이 ‘해도 그만, 안 해도 그만인 사안’을 인간의 기본권과 같은 중요한 사안과 치환해버리는 발상은 인권의 보편성이라는 세계적 흐름을 부정함에 다름이 아니다.

    같은 맥락에서 국가인권위원회는 구성 자체가 매우 편향적이라는 비판을 받았다.
    직원들도 한국사회전체의 성향분포에 비추어 한편으로 치우친 인력을 대거 계약직으로 충원하였다.
    2008년 정권교체 직전 그들을 신분 보장받는 일반직으로 전환조치를 취하였다.
    소위 그람시(Antonio Gramsci)가 제시한 좌파 세력의 문화진지라는 비판을 받게 된 연유이다.




  • 2004년 처음 북한인권특별보고관으로 임명된 비팃 문타폰 교수가 북한당국으로부터 입국을 거절당하고, 한국을 방문하였을 때, 그의 일정을 주선했던 국가인권위원회는 북한의 특수사정을 많이 설득시키려 한 것 같다.
    문타폰 교수는 귀국 후 보낸 서한에서 한국 국가인권위원회가 강조하는 북한의 ‘특수한 사정’이란 무엇인가 하고 반문하였다.
    북한에 대한 인도적 지원을 해야한다는 인사들과의 면담으로 대부분 일정을 채우고, 정작 북한 인권침해실상을 설명하려는 10여개 시민단체 대표들을 간단히 한꺼번에 면담하게 하여 피상적인 대화에 그치게 하였다. 

    이명박 정부가 들어서고 나서야 현병철 위원장은 국가인권위원회 조직을 정비하여 북한인권 개선을 주요업무 중에 포함시켰다.
    대표적인 조치가 2010년 12월 6일자 국가인권위원회 전원위원회의 새로운 결정이다.
    김태훈 북한인권특별위원장이 중심이 되어 마련한 결과였다.

    2006년 12월 국가인권위원회 기본입장을 시정하는 내용으로서 북한정권에 의하여 조직적이고 광범위하게 자행되고 있는 심각한 인권침해는 세계인권선언을 비롯한 국제 인권규범에 반한다고 명확하게 지적하였다. 
    핵심은 북한주민에 대한 정보접근권을 부여하라는 권고에 있다. 정부관계부처와 방송통신위원회에 대한 권고 사항으로서 북한주민들이 표현의 자유와 정보접근권을 확보하도록 해야 하고, 이를 위해 민간 대북방송에게 단파와 중파 주파수를 제공하는 등 지원을 하라고 권고하였다.

    현병철 위원장은 2010년 4월 12일 국회의 북한인권법 제정을 촉구하였다.
    2011년 1월 10일에는 새로이 북한인권특별위원회를 구성하였고, 2011년 3월 15일 북한인권침해신고센터(개소식 사진)와 북한인권기록관을 개설하여 북한정권의 만행을 기록하기 시작하였다.
    5년 단위의 국가인권정책기본계획에 누락되었던 북한인권항목을 제2기 계획에 포함시켰다.
    이를 못마땅하게 보는 야당 국회의원들은 북한인권사업 예산을 계속 삭감하려고 애쓴다.

    햇볕정책 당시 국가인권위원회에 참여했던 좌편향 인사들은 국가인권위원회의 새로운 결정에서 북한에 대한 표현의 자유와 알권리를 보장하라는 권고결정에 불만을 가지고 이를 희석시키려는 시도를 한 것으로 보인다.
    한국사회의 표현의 자유에 문제가 많다는 인식을 심기 위한 노력을 하였다.
    한국의 좌파 인사들이 광우병 사태 당시의 익명성 댓글 문제나 국가보안법 제7조의 찬양고무죄가 표현의 자유 침해라는 청원을 유엔 인권이사회에 보내게 하였다.
    그러한 청원에 응하는 형식으로 표현의 자유에 관한 유엔특별보고관 라뤼(Frank La Rue)가 2011년 6월 11일-17일 한국에 와서 실태 조사를 하도록 하였다.

    NK지식인연대 김흥광 대표가 동 특별보고관에게 이메일로 공식 면담신청을 하였다.
    유엔 특별보고관 ‘라뤼’의 임무는 전 세계의 표현의 자유에 관하여 관장하는 것이므로, 북한사회의 표현의 자유에 관하여 탈북자들이 설명할 기회를 얻고 싶다는 취지였다.
    라뤼 특별보고관은 탈북자들의 면담요청에 응하지 않고, 좌파 시민단체들과의 면담에 많은 시간을 보낸 다음 출국하였다.
    출국 바로직전 한국사회의 표현의 자유에 문제가 있다고 간단하게 기자회견을 하였다.




  • 한국의 좌파인사들은 이 기자회견을 국내외 언론에 순환시켜 마치 한국에는 표현의 자유에 심각한 문제가 있는 것처럼 낙인찍는 행위를 하였다.
    아프리카의 나이지리아 정도로 열악하다는 소문을 순환시켰다.

    한국사회의 표현의 자유가 완벽하다고 할 수는 없다.
    표현의 자유가 과잉이라고 할 정도인 한국사회를 문제가 심각하다고 낙인찍는 것은 소위 운동권의 선동공작의 전형적인 예로 볼 수 있다.
    그 밑바닥에는 북한에 대한 표현의 자유나 정보접근권 지원노력에 찬물을 끼얹으려는 의도가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

    한국사회가 자신의 인권에도 문제가 많은데 북한인권문제를 추궁할 자격이 있느냐는 양비론으로 북한의 인권침해에 대한 비판을 희석시키려는 의도이다. 

    김 석 우 21세기국가발전연구원 원장 (북한인권시민연합 고문, 前통일원 차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