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 왕래 22차례...통감직 3년반

    1906년 2월 1일 한국통감부가 문을 열었다. 이토 히로부미는 2월 20일 도쿄를 출발하여 이세(伊勢)신궁을 참배하고, 28일 시모노세키에서 군함[和泉]을 타고 현해탄을 건넜다. 3월 1일 부산에 도착하여 다음날 통감부에 모습을 드러냈고, 9일 고종황제를 알현하고 부임인사를 올렸다. 3년 반의 통감 업무를 시작한 것이다.

    메이지 지도자 가운데 이토 히로부미 만큼 한국과 인연이 깊었던, 그리고 한국에 오래 체류한 사람도 찾아보기 쉽지 않다. 1873년 ‘정한’문제가 중요한 정책 이슈로 등장했을 때 이토는 반(反)정한 편에 섰다. 그리고 기도 다카요시(木戶考允)와 오쿠보 도시미치(大久保利通)를 도와 사이고 다카모리(西鄕隆盛)의 정한론을 무산시키는데 결정적 역할을 한 인물이다. 그러나 러일전쟁 후, 그가 30년 전 반대했던 ‘정한’ 프로젝트를 직접 담당하면서 총지휘하는 위치에 이르렀다.

    이토 히로부미는 그의 생애에 22차례나 현해탄을 넘나들었다. 그가 한국 땅에 첫 발을 밟은 것은 1888년이다. 사이고 츠쿠미치(西鄕從道)와 함께 러시아의 블라디보스토크를 시찰하러 가는 길에 부산, 원산 등 동해안의 항구를 거쳐 갔다. 그러나 당시 서울에 머물렀던 흔적은 없다. 두 번째 한국방문은 1889년 한국과 만주를 유람하는 개인 여행이었다. 처음으로 서울을 보고, 고종황제를 알현했다. 비록 관광객으로서의 여행이었지만 수상과 추밀원 의장을 역임한 이토에 대한 대접은 융숭했다. 세 번째는 러일전쟁 발발 직 후 한국을 통제하기 위하여, 네 번째는 을사강제조약을 총지휘하기 위한 천황의 특별대사로, 그리고 다섯 번째 이후는 통감으로 현해탄을 오갔다. 이토는 1905년 말 이후 약 3년 반 가까이 막강한 권력을 가진 통감으로 한국에 머무르면서 ‘정한’의 길을 닦았다. 그러나 이는 또한 하얼빈 역에서 자신의 삶의 종막을 준비하는 기간이기도 했다.

    성도 없는 빈농의 아들, 혁명운동에 몸을 던지다

    입신
    이토 히로부미는 1841년 10월 22일(음력 9월 2일) 조슈(長州, 오늘의 야마구치(山口)현)의 츠가리무라(束荷村)라는 빈촌(貧村)의 한 농가에서 태어났다. 어렸을 때의 이름은 리스케(利助). 히로부미(博文)라는 이름은 메이지 유신 후 그가 정부의 고위직을 맡으면서 쓰기 시작했다.
    그의 부친의 이름은 쥬조(十藏). 성(性)씨는 오치(越智)라는 설도 있고 하야시(林)라는 이야기도 있으나 어느 것도 확실치 않다. 무사가 아니면 성이 없었던 당시로서는 그리 이상한 것도 아니지만, 성씨가 무엇인지 정확히 알 수 없을 정도로 보잘것없는 가문이었던 것만은 확실하다. 한 정보도 안 되는 농지를 일구면서 살아야 하는 쥬조의 집안은 생계가 어려울 정도로 찢어지게 가난했다.

    리스케가 6살 때 아버지 쥬조가 홀로 출향(出鄕)하여 조슈의 수도라고 할 수 있는 하기(萩)로 흘러들었다. 온갖 궂은일을 하지 않으면 생활을 영위할 수 없는 고달픈 삶이었다. 그러나 그가 번(藩)의 창고 관리인인 이토 나우에몬(伊藤直右衛門)의 눈에 들어 그의 머슴살이를 하면서 최저의 생활이지만 그런대로 안착할 수 있게 됐다. 처와 아들을 하기로 불러와 다시 가정을 꾸렸다. 리스케가 9살 때였다. 후사가 없었던 이토 나우에몬은 충실한 종복인 쥬조 부자를 1854년 양자로 삼았다. 비록 야우에몬이 무사계급의 최하위인 아시가루(足輕-武家에서 평시에는 잡역에 종사하다가 전시에는 병졸이 됨)에 불과했지만, 그의 양자가 되면서 쥬자 부자도 무사의 반열에 오를 수 있었다. 리스케도 이름을 이토 슌스케(伊藤俊輔)로 바꾸었다. 비록 그것이 최하위의 계급이지만 평민 하야시 리스케가 무사 이토 슌스케로 신분상승한 것이다.

  • 메이지유신의 정신적 지주이자 이토히로부미를 비롯한 조슈의 많은 인재를 키워낸 松下村塾의 요시다 쇼인(吉田松陰). 
    ▲ 메이지유신의 정신적 지주이자 이토히로부미를 비롯한 조슈의 많은 인재를 키워낸 松下村塾의 요시다 쇼인(吉田松陰). 

    메이지 유신의 스승 요시다 쇼인

    그러나 그가 일본의 중요한 인물로 성장할 수 있었던 것은 막말 최대의 사상가라고 할 수 있는 요시다 쇼인(吉田松陰)과 유신3걸(維新三傑)의 한 사람인 기도 다카요시(木戶考允)와의 만남에서부터 시작된다. 이토는 요시다 쇼인의 쇼카손주쿠(松下村塾)에서 존왕양이(尊王攘夷)의 사상을 배우고, 기도 다카요시의 ‘종자(從者)’로서 막말(幕末)의 ‘지사’활동에 참여하면서 유신운동에 뛰어들었다. 그리고 1863년 남보다 한 걸음 앞서 영국에 유학할 수 있는 기회를 거머쥠으로서 출세의 기반을 닦았다.

    영국체류가 비록 짧은 기간이었지만 서양의 위력은 상상을 초월한 것이었다. 서양의 위압 속에서 일본이 살아남기 위해서는 서양을 배척[攘夷]하는 것이 아니라, 막부를 무너뜨리고[倒幕] 새로운 체제를 세우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을 깨닫게 됐다. 일본의 정국이 존왕(尊王), 양이(攘夷), 좌막(佐幕), 도막(倒幕)의 소용돌이 속에서 급박하게 돌아가고 있을 때, 유학을 중단하고 귀국한다. 그리고 그의 주인인 기도 다카요시를 도와 도쿠가와 막부를 무너뜨리고 메이지 유신을 이룩하는 데 기여한다.

  • 바쿠후(幕府)정부의 허락없이 영국으로 유학(1863)을 떠난 5명. 뒷날 이들을 가리켜 '죠슈Five'라고 불렀다. 왼쪽에서 시계방향으로, 이오우에 가오루(井上馨), 엔도 킨스케(遠藤謹助), 이노우에 마사루(井上勝),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 야마오 요조(山尾庸三).
    ▲ 바쿠후(幕府)정부의 허락없이 영국으로 유학(1863)을 떠난 5명. 뒷날 이들을 가리켜 '죠슈Five'라고 불렀다. 왼쪽에서 시계방향으로, 이오우에 가오루(井上馨), 엔도 킨스케(遠藤謹助), 이노우에 마사루(井上勝),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 야마오 요조(山尾庸三).


    총리 4차례...헌법 만들고 청일-러일전쟁 주도

    유신운동에 참여한 경력과 서양의 경험을 가진 이토는 메이지 정권 수립 후 ‘순풍에 돛단 듯’ 출세의 길을 갈 수 있게 됐다. 특히 유신 3걸이라는 사이고 다카모리, 기도 다카요시, 오쿠보 도시미치가 모두가 죽게 되는 1878년 이후, 이토는 메이지 정권 안에서 확고부동한 지위에 오르게 된다. 그는 정부조직을 제도화하고 법규화 함으로써 행정부와 관료의 기틀을 마련했다. 헌법을 조사·연구하기 위하여 스스로 독일에 유학(1882)하여 장기간 체류하면서 유럽의 헌법을 공부한다. 그리고 메이지 헌법을 기초하고 천황제 국가체제를 확립했다. 그는 1885년 내각제가 실시된 이래 네 차례 총리대신을 역임하며 내각을 이끌었고, 세 차례 추밀원(樞密院) 의장, 귀족원 의장, 원로(元老)의 일원으로 메이지 일본의 중심에 서 있었다. 물론 청일전쟁, 러일전쟁과 이어진 강화조약을 직접 또는 배후에서 주도했다. 뿐만 아니라 1900년 보수정당의 뿌리라고 할 수 있는 세이유카이(政友會)를 창당하여 정당정치의 길을 열기도 했다.

    이토는 통감으로 부임하는 1906년 이전, 네 번의 총리대신을 위시하여 일본에서 중요하다는 모든 직책을 두루 거친 인물이다. 그가 메이지 국가건설의 일등 공신이라는 데 그 누구도 이의를 달지 않았다. 이토는 당시 국내에서 가장 유능한 정치인이면서 외교가로 인정받았을 뿐만 아니라, 서양에서도 “동양에서 가장 위대한 경륜가(statesman)"라고 평가받고 있었다. 천황으로부터 절대적 신임을 받고 있고, 동양에서 가장 능력 있는 정치가로 평가 받는, 그리고 일본 최대의 실력자인 이토를 한국의 통감으로 임명한 까닭이 무엇일까? 한국병탄은 일본 최대의 국가목표임을 뜻하고 있고, 또한 병탄 프로젝트가 본격적으로 가동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항상 대안을 가지고 있는 사람

    성품
    격동의 시기에 이토가 이처럼 중요한 위치에 오를 수 있었던 것은 우연이나 시대의 산물만은 아니었다. 그의 스승인 요시다 쇼인이 “대단한 주선가”가 될 자질을 가지고 있다고 평가했던 것처럼, 이토는 사람들에게 호감을 주는 성품을 가지고 태어난 것 같다. 그는 어려서부터 남의 미움을 사는 일이 별로 없었고, 또한 항상 윗사람 눈에 들게 행동했다. 이토는 “선배로부터 사랑받고 그들이 쓰기에 편리한”인물이었다. 요시다 쇼인의 보살핌, 기도 다카요시의 보호, 오쿠보 도시미치의 후원, 이와쿠라 도모미의 지지를 얻을 수 없었다면, 같은 시대를 살았던 도쿠토미 소호가 평가하고 있는 것과 같이, “메이지시대의 태산교악(泰山喬嶽)”과 같은 존재로 성장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이토가 스스로 노력하지 않았다는 것이 아니다. 그는 동시대 인물 가운데  누구보다도 지위 상승을 위한 노력가였다. 출신이 미천했기 때문에 더욱 그랬는지도 모른다. 그가 더 오를 수 없는 지위까지 오른 것은 끊임없는 노력의 결과이기도 했다. 이토는 스스로 출세의 비결 이렇게 말하고 있다.  출세를 하려면 “지위 높은 선배가 의존하지 않을 수 없는 존재가 되어야한다....(그러기 위해서는) 끊임없는 노력과 철저한 준비가 있어야 한다. 내 자신의 경험에 비추어 볼 때 오쿠보 도시미치 내각의 참의경보로 임명됐을 때 내가 내각에서 제일 어렸다. 이미 고인이 됐으나 그 때 산조 (사내토미)나 이와쿠라 (도모미), 또는 기도 (다카요시)나 오쿠보 등이 필요로 하는 문제의 해답을 사전에 치밀하게 조사하여 준비해두었다가 그들이 필요로 할 때 적시에 제시하고는 했다. 이런 일이 두 번 세 번 반복되다 보니 드디어 크고 작은 정치의 중요한 정무에 참여하게 됐다. 비결이라면 이런 것이다.” 즉 항상 대안을 만들어 가지고 있었다는 것이다.

    훈장 차고 칼 차기를 좋아한 명예욕

    동시대 인물들의 이토에 대한 평가는 다양하다. 그러나 그가 공명심과 명예욕이 강했고, 대단히 관료적이었다는데 모두가 일치하고 있다. 능력은 평가받았지만, 존경의 대상은 아니었다. 출신이 미천했기 때문에 자신의 외양을 더욱 권위적으로 치장했는지 모른다. 이토와 동시대의 한 정치평론가에 의하면 “훈장을 만든 것도 이토 공(公)이고 귀족을 만든 것도 이토 공이다. 이토 공은 명예를 표창하는 기구(器具)를 많이 만들었다. 그리고 자신이 가장 많이 취했다”라고 할 정도로 권위를 갖추는 외양을 좋아했다. 그는 사람들의 존경을 기대하고 늘 훈장을 많이 단 제복입기를 즐겨했고, 무관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공식석상에는 항상 대검(帶劍)을 즐겨했다.

  • 많은 훈장과 칼을 찬 이토. 공식석상에는 늘 이처럼 훈장과 칼을 꼭 찼다.
    ▲ 많은 훈장과 칼을 찬 이토. 공식석상에는 늘 이처럼 훈장과 칼을 꼭 찼다.

     그는 또한 호사스러운 생활을 즐겼다. 그의 주인이기도 했던 기도 다카요시가 옛날을 회상하면서, 이토는 “에도 번의 저택에서 나의 수발을 들 때 나를 찾아오는 무사들을 위해 내놓은 술안주용 두부 값이 한 달에 한량 세 푼이나 된다고 말하곤 했는데, 그런데 지금은 어떤가? 한 갑에 여덟 량이나 하는 담배를 닷새 만에 다 피워버리고, 열다섯 량이나 하는 모자를 쓸 정도로 사치한 생활을 하고 있다.”라고 이토의 사치스러움을 은근히 탓했다.

    그러나 이토는 국내정치를 지배하기 위하여 파벌을 키운다거나, 또는 권력을 이용한 축재와는 거리가 멀었다. 이토는 그의 생애의 최대의 동지면서 정적이었던 야마가타 아리토모와 자주 비교된다. 조슈의 미천한 집안에서 태어나 함께 유신운동에 뛰어 들었던 두 사람 모두 요시다 쇼인 밑에서 동문수학했다. 유신 후 이토가 관료제를 다듬으며 정치인으로 성장해 나갈 때, 야마가타는 육군을 건설했다. 야마가타는 군을 배경으로 거대한 파벌 망(網)을 궁중, 정계, 관료의 세계로 넓혀나가면서 국내정치의 향방을 좌우했다. 그러나 이토는 파벌에 초연했다. 그리고 국내정치보다 대외정책에 더 많은 관심을 가졌다.
    메이지 초기 야마가타를 위시하여 많은 정치인들은 너나할 것 없이 권력형 부정축재에 관여됐고, 또한 권력자의 이러한 행태가 어느 정도 사회적으로 인정되기도 했다. 그러나 이토는 이상할 정도로 부에 집착하지 않았다. 뿐만 아니라 동시대의 대부분의 권력자들처럼 골동품, 분재, 다도, 별장 등에도 관심이 없었다. 야마가타의 별장[無隣庵]에 비하면 이토의 별장[滄浪閣]은 초라하기 이를 데 없었다. 이토가 노년에 검(劍)에 흥미를 가지고 수집하기는 했으나 별다른 취미가 없었다. 독서 이외의 취미가 있었다면 ‘여색(女色) 즐기기’였다. 메이지 천황도 인정했던 그의 ‘여성편력’은 비밀도 아니었고 숨기려하지도 않았다.

  • ▲ "明治好色一代男, 食道樂, 大勳位伊藤侯爵." 이토를 식도락가에 비유하여 '여자 식도락가'로 풍자한 만화. 그중에는 여승(女僧)도 보인다.(滑稽新聞, 1903.9.5)

    강자에 굽히고 약자를 제압하는 호색한 "나의 취미는 여자뿐"

     그는 스스로가 “나는 본래부터 욕심이 많지 않다. 저축 같은 것에는 털끝만큼도 관심이 없다....나는 크고 좋은 집에서 산다는 것도 별로 생각해 본 일이 없고 축재를 바라지 않는다. 다만 국사를 돌보며 틈틈이 시간이 있을 때마다 여자[藝妓]를 상대하는 것이 제일 좋다”라고 자신의 ‘여색취미’를 거리낌 없이 밝히기도 했다. 이토는 겨우 160cm(5.3尺)에 이르는 단구(短軀)의 체격을 가졌다. 그러나 그는 “강장자(强壯者)의 표본”이라고 할 정도로 정력이 강한 건강을 지니고 있었다. 같은 시대의 정치인이었던 오자기 유키오(尾崎行雄)에 의하면 이토의 “최대의 결점은 그의 호색성”이었다. 이토는 “늙은 기생, 어린 기생 가리지 않는다. 그러나 일단 싫증나면 곧 잊어버리고, 자신이 관계했던 여자들을 사람들에게 기탄없이 이야기”하는 괴팍한 ‘여색습관’을 지닌 호색한이었다.

    이토가 정부의 중책을 맡고 권력의 상층부로 올라가면서 매사에 신중한 태도를 취했다. 그러나 젊은 시절에는 목적을 위해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과격한 성품의 소유자였다. 양이운동이 한참일 때 외국영사관을 앞장서서 방화하거나, 필요하다면 살인도 서슴지 않았다. 총리의 지위에 오른 인물로서 전전과 전후를 통틀어 전쟁터에서 적군을 죽인 것이 아닌 ‘암살’을 자행한 인물은 이토가 유일한 존재이다.

    그는 늘 실리적 점진주의를 바탕으로 국가정책을 다루었으나, 적절한 시기에 이르렀다고 판단하면 자신의 결정을 과감하게 밀어붙이는 결단력과 과단성을 지니고 있었다. 그가 을사강제조약 당시 고종을 위협하기를 주저하지 않거나, 또는 헤이그 사건 이후 고종을 황제의 자리에서 몰아낼 때 보여 준 태도가 그의 이러한 성품의 한 면을 잘 설명해주고 있다. 그는 포용력이나 남을 배려하는 따뜻한 인간미는 부족했고, 약자에게 강하고, 강자에게 약한 성격을 지녔던 인물이다.

    일본 근현대사의 대가로 알려진 오카 요시다케(岡義武)는 이토의 한국병탄정책과 하얼빈에서의 그의 죽음을 일본 외교의 특성과 이토의 성품과 연결하여 설명하고 있다. 오카에 의하면 메이지 대외정책의 특성은 “[구미의] 여러 나라에 대한 관계는 대단히 신중하여 일반적으로 종속적 색채”가 짙었으나, 한국이나 중국에 대해서는 “대단히 공세적 태세”였다. 그리고 이와 같은 일본 외교의 특성을 한 개인에 비유해서 본다면 “강자에게 약하고 약자에게 강한 이토라는 사람을 닮았다. 통감 취임전후 이토가 한국에서 연출한 역할을 되돌아본다면 그는 우리나라의 ‘대한국책’을 집행하는 데 썩 잘 어울리는 대표자였다”라고 평가했다. 그러면서 오카는 “이토는 이 ‘국책’을 전적으로 자신의 성격대로 수행했다. 한국에 있어서 그는 정말로...‘전투적 인사’ 였고, 바로 그렇기 때문에 흉변(兇變)을 자초했다”고 결론짓고 있다. 즉 강한데 약하고, 약한데 강한 이토의 성품과 일본의 외교노선이 결국 그로 하여금 하얼빈에서 죽음을 맞이하게 했다는 것이다.

    하얼빈 10.26...안중근 의사 손에 쓰러진지 100년

    이토 히로부미가 하얼빈 역에 쓰러진 것이 1909년 10월 26일이니 꼭 100년을 맞이하고 있다. 지난 100년 동안 국제정세, 동아시아의 형세, 한국과 일본의 관계 모두가 엄청난 변화를 맞이하고 있다. 세계사는 제국주의와 냉전의 시대를 마감하고 세계화와 지역화가 국제적 흐름의 주류를 이루고 있다. 아시아에는 동아시아 공동체 논의가 다시 등장하고 있는 가운데, 굴욕의 19세기와 20세기를 보낸 중국이 G-2로 부상하면서 일본의 위협적 존재로 다가오고 있다. 메이지의 영광에서 주권상실로 전락했던 일본은 패전의 잿더미를 딛고 다시 세계 제2의 경제대국으로 성장했으나 21세기를 향한 국가진로 모색에 혼미를 거듭하고 있다. 식민지 시대를 마감했으나 한국은 그 시대의 후유증으로 남과 북으로 분단됐고, 북쪽의 절반은 아직 일본과 식민지 시대의 연속선상에 위치하고 있다. 이러한 변화 속에서, 이토가 그의 인생의 마감 길에 남긴 아래의 시구는 한일관계에 어떤 의미를 시사하고 있는 것일까?

    乾坤不變(천지는 변하지 않고)
    古今相通(어제와 오늘이 서로 통하고 있다)
    魚躍淵水(물고기는 깊은 물에서 뛰어 오르고)
    鳶飛太空(솔개는 큰 하늘을 나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