善意 짓밟혔던 4년 간의 시련, 안철수를 패권에 맞서는 투사로 단련시키다
  • 국민의당 안철수 전 대표가 4일 경선을 통해 대선후보로 확정됐다. ⓒ뉴데일리 정상윤 기자
    ▲ 국민의당 안철수 전 대표가 4일 경선을 통해 대선후보로 확정됐다. ⓒ뉴데일리 정상윤 기자

    5년 전 대선에서 '양보했던 사람'과 '양보받아서 졌던 사람'이 맞서는 운명의 대결이 35일 뒤에 펼쳐진다.

    국민의당 안철수 전 대표가 4일 대전 한밭체육관에서 열린 국민의당 대통령선거후보자 선출대회에서 대선 후보로 확정됐다. 앞서 전날 더불어민주당 대선 후보로 선출된 문재인 전 대표와 본선에서 맞붙게 된 것이다.

    안철수 후보는 1962년 2월 26일 부산진구 범천동에서 2남 1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시장에서 사온 병아리를 모두 닭으로 키워내면서, 어머니로부터 '새들은 알을 품으면 새끼가 태어난다'는 이야기를 듣고 메추리알을 품고 잠이 들기도 하는 등 어릴 때부터 생명에 대한 호기심이 많았다. 

    좀 더 자라서는 라디오와 전축, 시계를 분해하는 등 기계에 대한 높은 관심을 보였다. 기계에 대한 관심과 섬세한 성격으로 조립하는 일에 재주가 뛰어났다. 비행기, 탱크를 만들고 공모전에 응모해 최우수상을 받기도 했다. 

    안철수 후보가 어린 시절 활자중독 증세를 보였다는 것은 유명한 일화다. 초등학교 1학년 때 글을 깨친 안철수 후보는 등하굣길에 걸으면서도 책을 읽었고 6학년 때 쯤에는 학교 도서관에 있는 책을 거의 다 읽을 정도였다. 


  • 국민의당 대선주자인 안철수 후보의 유년시절. ⓒ안철수 후보 측 제공
    ▲ 국민의당 대선주자인 안철수 후보의 유년시절. ⓒ안철수 후보 측 제공

    안철수 후보는 서울의대 재학 시절 진료 봉사활동을 하면서 사회 현실에 대한 고민을 하게 됐다. 

    초등학생 손녀와 단둘이 살며 류마티스 관절염을 앓던 할머니가 아사한 채 발견된 것을 봤던 과거에 대해 "소설보다 잔인한 비극을 경험했고, 함께 살아가는 사회에서 각자 해야 하는 역할이 무엇인가에 대한 고민들이 깊어졌다"고 심경을 밝혔다.

    1988년 초 '브레인 바이러스'가 한국에 상륙하던 당시 의대 박사과정 중이던 안철수 후보는 백신 프로그램을 만들어낸다. 컴퓨터 바이러스에 대한 지식이 희박하던 시절, 바이러스로 고생하는 수많은 사람들을 겪으면서 백신 프로그램 제작에 몰두하기 시작한다.

    이 때 이미 안철수 후보는 제작한 백신 프로그램을 주변 사람들에게 무료로 보급했는데, 향후 안철수연구소에서 만든 백신 프로그램 〈V3〉를 일반 사용자들에게 무료로 보급하는 계기가 됐다는 평가다.

    '첫사랑이자 소울메이트'인 아내 김미경 교수는 안철수 후보의 한 학년 후배였다. 의료봉사를 하며 가까워졌고 주로 도서관에서 데이트를 했다.

  • 안철수연구소 이사회장 시절의 안철수 후보. ⓒ안철수 후보 측 제공
    ▲ 안철수연구소 이사회장 시절의 안철수 후보. ⓒ안철수 후보 측 제공

    군의관 복무를 마친 안철수 후보는 편안한 삶이 보장된 대학병원 의사나 개업의가 아닌, 컴퓨터 보안프로그램 제작에 몰두한다. 1995년 벤처기업 안철수연구소를 설립해 경영하는 동안 어려운 결단의 순간에도 원칙이 무엇인가를 늘 생각했다.

    미국 유력 보안회사로부터의 1000만 달러 인수 제의를 거절하고, 닷컴 기업에 투자하면 누구나 돈을 벌 수 있다고 생각했을 때 핵심역량과 관계되는 분야가 아니면 투자하지 않는다는 원칙을 지켰다. 벤처 열풍이 광풍처럼 불었을 때에도 코스닥에 등록하지 않았다. 

    선택의 기로에서 최종판단의 근거는 '장기적인 관점에서 옳은 결정인가' '누구에게 이익인가'였다. 이러한 고민의 결과가 안철수연구소에서 만든 백신 프로그램을 일반 사용자들에게는 무료로 보급되었고, 기업체와 관공서에 유료로 판매한 것이었다.

    1999년에는 안철수연구소가 제공한 백신에 악성코드가 심어져 잘못 전달된 일이 생기자, 안철수 후보는 즉시 이같은 사건을 알리고 사과하는 동시에 시스템과 구조 개선에 대대적인 투자를 하는 등 재발 방지를 위한 대책을 세웠다. 

    문제가 발생하면 좌절하기보다는 모든 역량을 집중해 문제를 해결하고 극복하는 것이 안철수 후보의 방식이었다.

  • 안철수연구소 이사회장 시절의 안철수 후보. ⓒ안철수 후보 측 제공
    ▲ 안철수연구소 이사회장 시절의 안철수 후보. ⓒ안철수 후보 측 제공

    안철수 후보가 '안철수 신드롬'과 함께 정치권과 사회에 이름을 날리기 시작한 것은 '청춘콘서트'를 열면서부터다.

    대학교수 재직 시절, 안철수 후보는 학생들에게 '지금 자신에게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묻고는 했다. 돌아오는 답변은 언제나 취업·성적·스펙이었다. 청년들의 좌절과 방황이 심해지는 모습에 고민이 깊어진 그는 청춘콘서트를 열기 시작했다. 청년들을 직접 만나고, 자신의 경험과 배움을 나누며 그들의 멘토로 활약했다. 

    '안철수 바람'이 거세게 불어닥친 2011년, 안철수 후보는 서울특별시장 선거에서 유력 후보로 거론되며 국민들로부터 50%를 넘는 지지율을 확보했다. 또, 이듬해 치러진 대선에서도 당시 각종 여론조사에서 박근혜 후보와의 가상 양자대결에서 앞서는 등 가장 유력한 대선 후보였다.

    하지만 안철수 후보는 각각 이 자리를 박원순 현 서울특별시장과 더불어민주당 문재인 전 대표에게 양보했다. 어떠한 정치적 거래도, 아무 조건도 없는 양보였다.

    그 결과는 지금까지 대학과 기업에서 일궈온 선의(善意)를 무색케 하는 일이었다. 서울시정에 박원순 시장을 끌어들인 것은 두고두고 시민들로부터 비판과 원성을 받았다. 민주당 문재인 전 대표 측으로부터는 '아름다운 양보'를 하고서도 "도와주지 않아서 졌다"는 해괴한 말로 조롱당해야 했다.


  • 19대 재보궐선거에서 당선 후 국회에 등원중인 안철수 후보. ⓒ안철수 후보 측 제공
    ▲ 19대 재보궐선거에서 당선 후 국회에 등원중인 안철수 후보. ⓒ안철수 후보 측 제공

    정치적 선의가 철저히 패권에 의해 짓밟히는 시련 속에서 그를 다시 일으켜세운 것은 국민이었다.

    2013년 4월 실시된 서울 노원병 국회의원 재보궐선거에서 무소속으로 출마, 60.5%의 득표율을 얻어 당선된다. 같은해 11월 '국민과 함께하는 새정치추진위원회'를 출범시켰고 이듬해 2월에는 새정치연합 창당준비위원회가 결성됐다.

    새정추가 돌풍을 불러일으키며 친문패권에 멍든 기존의 제1야당 민주당이 고사 위기에 내몰리자, 당시 민주당 대표였던 김한길 전 대표는 그에게 먼저 손을 내밀었다. 결국 2014년 '김한길 민주당'과 전격 통합이 이뤄졌으나, 일단 손아귀에 들어온 그를 친문패권세력은 가만히 놔두지 않았다.

    이 해 6·4 지방선거 공천 과정에서부터 안철수 전 대표를 집요하게 흔들고 흠집내던 친문패권세력은 7·30 재보궐선거에서 불과 1석을 잃은 결과를 기화 삼아, 결국 안철수 전 대표 체제를 무너뜨리고 당권을 탈취했다.

    이렇게 해서 들어선 문재인 대표 체제는 2015년 4·29 재보선에서 4곳의 국회의원 선거구 전체를 패배하는 등 참패를 거듭했다. 그러나 문재인 대표는 선거 패배 책임을 지는 것을 거부하고, '낡은 진보 청산' 등 안철수 후보가 내건 혁신 요구도 일축했다. 그는 분연히 탈당해 '시베리아'로 나섰다.

    2016년 2월 2일 대전에서 '미래를 향한 담대한 변화'를 선언하며 국민의당이 창당된다. 지금의 박지원 대표·주승용 원내대표·김동철 전 비상대책위원장·문병호 황주홍 최고위원·유성엽 교문위원장 등이 힘을 모아줬다.

    창당 초기 총선을 앞두고 민주당 김종인 전 대표의 '야권연대' 공세로 휘청이기도 했으나 '야권통합은 없다'는 담대한 결기로 위기를 돌파하며 정당 지지도 26.7%로 2위를 기록, 민주당보다 앞서며 야권 1위를 달성했다. 공고한 것으로 보이던 패권양당의 적대적 공존 관계에 균열을 내며 3당 체제를 구축한 것이다.

    아울러 야권의 상징이라 불리는 호남에서 민주당에 참패를 안김으로써 문재인 전 대표에게 '참여정부 당시 호남 홀대 의혹' '지난 대선에서 양보받고서도 패배'라는 깊은 흉터에 이어, '정계은퇴 약속 번복'이라는 또 하나의 아킬레스건을 안겼다.

    이러한 안철수 전 대표에게 지난해 6월 측근들이 연루된 총선 홍보비 리베이트 의혹은 시련이었다. 그는 아무 말 없이 공동대표직에서 물러난 뒤, 인고의 세월을 보냈다. 총선 때 20%가 넘었던 지지도는 하락세를 이어가 한 자리까지 주저앉기도 했다. 뒤늦게 '총선 홍보비 리베이트 의혹'은 법원에서 기소된 전원이 무죄 판결을 받았지만, 떠나간 지지율은 돌아올 줄 몰랐다.

    하지만 안철수 후보는 묵묵히 자신의 길을 걸었다. 지난달 25일부터 시작된 완전국민경선을 거치며 '컨벤션효과'를 톡톡히 본 안철수 후보는 국민의당 텃밭인 호남을 넘어 중도·보수층을 흡수하며 지지도가 크게 오르고 있다. 가상 양자대결에서 문재인 전 대표를 이기는 여론조사 결과가 발표되기도 했다.

    안철수 후보가 오랫동안 외쳤던 '안철수의 시간'이 다가오고 있는 셈이다. '문재인 대항마'로 입지를 굳혀가는 안철수 후보가 본선에서 자신의 말처럼 '대신할 수 없는 미래, 미래를 여는' 첫 번째 대통령이 될지 기대되는 대목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