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심코 내뱉은 농담이 '정치 기삿거리'로 둔갑

  • 언론사에는 일명 '초치기 마감'이라는 게 존재한다. 바쁘게 현장을 쏘다니다 보면 어느덧 데스크가 고지한 마감 시한이 코앞으로 다가오기 일쑤다. 마음이 급해지면 잔 실수도 많아지는 법. 가끔 현장에서 급히 타전한 취재기자들의 원고를 온라인으로 받아보면 실소를 머금을 때가 많다. 어이없는 맞춤법 실수서부터 시제가 안맞는 문장까지, 딱 봐도 담당 기자가 얼마나 긴박한 상황에서 기사를 썼는지 대번에 느껴진다.

    연예 행사의 경우는 더더욱 그렇다. 평균적으로 3~4개의 행사를 소화해야하는 기자들에게 '여유'라는 게 있을 턱이 없다. 앉은 자리에서 부라나케 워딩을 치고 다음 행사 현장으로 이동하기 전에, 현 시점에서 가장 핫한 발언을 헤드라인으로 뽑고 기사를 완성한다. 실시간 검색 경쟁에서 이기려면 무엇보다 스피드가 생명이다. 남보다 빨리 기사를 완성해 포털에 내보내는 것은 물론, 네티즌의 눈길을 단박에 사로잡는 섹시한 제목을 뽑아내는 것은 필수다.

    상황이 이렇다보니 현장에서 화자가 던진 말의 함의(含意)를 분석한다는 것은 언감생심(焉敢生心), 꿈도 꾸지 못할 일이다. 워딩 중 가장 잘 팔릴 것 같은 대목을 고르는 데에만 혈안이 돼 있을 뿐, 그 의미를 재삼 곱씹어볼 여유는 없다. 지난 주말 우리나라를 방문한 배우 스칼렛 요한슨의 내한 행사도 마찬가지였다.

    '한순이'라는 별명이 붙을 정도로 한국에 많은 팬들을 보유한 스타답게 스칼렛 요한슨이 참석한 기자회견장은 각지에서 모여든 취재진으로 인해 발디딜 틈조차 없을 정도로 북적였다. 코엑스 인터컨티넨탈 호텔 그랜드 볼룸을 가득 메운 기자들이 일제히 노트북을 꺼내들고 타이핑을 시작했다. 고요한 정적을 깨고 기자들이 하나둘 질문을 던지기 시작했다. 자신이 맡은 배역에 대한 느낌을 묻는 질문부터 기타노 다케시와 함께 연기한 소감을 묻는 질문까지 다채로운 질문들이 쏟아졌다. 그때 한 종편 기자가 손을 들고 질문을 던졌다.

    스칼렛 요한슨씨에게 질문하겠습니다. 미국에서 페미니즘을 강조하는 대표적인 배우이신데요. 지금 미국도 트럼프 대통령 때문에 문제가 많은 걸로 알고 있습니다. 그런 의미로 한국 대통령이 탄핵된 사실을 알고 계신지, 만약 알고 계시다면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궁금합니다.


    일순간 공기가 얼어붙었다. 난처하다는 제스처를 취하던 스칼렛 요한슨은 "지금 자신을 한국 정치에 끌어들이는 것이냐"며 말문을 열었다.

    Are you gonna drag me into Korean politics? I don’t know if I am prepared. I think, in order to save face, I am not gonna drag myself into Korean politics.


    얼굴은 웃고 있었지만 뼈가 담겨 있는 말이었다. 당연히 그런 질문에 대답할 준비가 돼 있지도 않고, 어설프게 말하다 망신을 당하느니 차라리 대답을 하지 않겠다는 뜻이었다.

    뒤이어 누군가 분위기를 바꿔볼 요량으로 가벼운 질문 하나를 던졌다.

    영화처럼 투명 인간이 되는 슈트를 입는다면 가장 하고 싶은 일이 뭔가요?


    그야말로 농담처럼 건넨 질문이었지만, 바로 직전 답변을 거부했던 게 마음에 걸렸던지 스칼렛 요한슨은 전혀 예상치도 못한 대답을 내놨다.

    I would slip into The Blue House and more aptly answer your question about the last impeachment.


    '투명 슈트'를 입고 잠입하지 않는 이상, 여러분의 황당한 질문에 대답할 방도가 없다는, 사실상 기자들에게 날리는 블랙 조크였다.

    하지만 필자를 비롯한 기자들의 뇌리 속엔 조금 다른 뉘앙스의 말로 들렸다.

    만약 투명 슈트를 입게 된다면, 청와대에 몰래 들어가서 탄핵에 대한 정보를 가져와 여러분에게 알려드리겠다.


    '당신들의 한심한 질문에 답을 하기 위해선 투명 슈트라도 입어야 할 판'이라는 농담이었지만, 다수의 취재진은 "스칼렛 요한슨이 투명 슈트를 입게 된다면 청와대에 잠입해 숨겨진 정보를 캐내고 싶다고 말했다"며 그녀의 '의지'와 '소망'에 방점을 둔 문장으로 승화(?)시켰다.

    물론 약간의 의역을 덧붙인 이같은 해석이 완전히 틀린 것은 아니었다. 스칼렛 요한슨의 발언 '앞뒤 정황'을 덧붙인 언론 기사에선 전혀 오해의 소지가 없었다. 문제는 다수의 기자들이 단발성으로 쏘아 올린, 소위 '낚시성 기사'들이 문제였다.

    시간에 쫓겨 급히 작성된 상당수의 기사들은 스칼렛 요한슨의 말이 앞선 탄핵에 대한 의견을 묻는 질문에 대한 답변이었음을 간과했다.

    고의성은 없었지만, 그렇다고 성의도 없었던 이들 기사에서, 국내 취재진에 대한 스칼렛 요한슨의 '원망' 같은 건 느낄 겨를도 없었다.

    스칼렛 요한슨 "투명슈트 있다면 청와대서 '탄핵' 정보 알아낼 것"

    스칼렛 요한슨 "투명수트 얻는다면 청와대 들어가서..."

    스칼렛 요한슨 "투명인간 된다면 청와대서 탄핵정보 알아낼 것"


    제목만 보면 "스칼렛 요한슨이 비밀에 휩싸인 청와대에 들어가 (기자 여러분이)그토록 알기 원하는 탄핵에 대한 고급 정보를 캐내고 싶다"는 말로 들린다. 이는 안타깝게도 청와대가 검찰의 압수수색을 거부했던 '정치적인 사건'까지 떠올리게 만든다.

    스칼렛 요한슨이 실제로 청와대가 압수수색을 거부한 사실까지 알고 있는지는 알 길이 없지만, 기사만 놓고 보면 어떤 진실을 은폐하고 있는 청와대의 처신을 '외지인'인 스칼렛 요한슨이 통렬하게 풍자하고 있는 것처럼 비쳐진다.

    자신이 무심코 던진 농담이 정치적인 기삿거리로 회자된 사실을 스칼렛 요한슨은 알고나 있을까?

    미세한 뉘앙스를 간과한 '한 문장'으로 인해 가벼운 마음으로 내한한 스칼렛 요한슨은 졸지에 한국에서도 폴리테이너(politainer)의 기질을 잃지 않는 투사로 묘사되고 말았다.

    다행히 같은날 오후 롯데시네마 월드타워에서 열린 네이버 'V라이브' 인터뷰는 대단히 매끄럽게 진행됐다. 기자들이 아닌 관객들이 만나는 GV행사였던 탓이다. 스칼렛 요한슨의 표정도 오전보다는 훨씬 밝아보였다. 어쩔 땐 일반 팬들이 더 '기자같다'는 생각이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