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그 고집불통의 합리성

  • ▲ 고아원 어린이들이 미국 만화를 보며 즐거워하고 있다. ⓒ 뉴데일리
    ▲ 고아원 어린이들이 미국 만화를 보며 즐거워하고 있다. ⓒ 뉴데일리

    이제 해방전후사의 재인식을 위한 마지막 주제로서 50년대의 경제에 대해 생각해 보도록 합시다.
    관련해서 소개할 《재인식》의 논문은 우정은 교수의 <비합리성 이면의 합리성을 찾아서ㅡ이승만 시대 수입대체산업화의 정치경제학>입니다. 이 논문은 50년대의 경제를 재평가함에 선구를 달린 연구입니다.
    50년대의 경제와 관련하여 먼저 지적해 두어야 할 것은 한국 경제가 해방, 분단, 전쟁의 과정을 겪으면서 참으로 비참한 지경에 빠지고 말았다는 사실입니다. 1953~1955년 1인당 실질소득은 거의 1910년대 수준으로 후퇴하고 말았습니다. 1인당 실질소득이
    1940년의 수준을 회복하는 것은 1965년이 되어서입니다. 그렇게나 비참한 상황에서 세금을 제대로 거둘 수 없으니까 국가 재정의 거의 7할이 미국의 원조자금으로 채워졌습니다. 1945년부터 1961년까지 미국은 대략 31억 달러의 경제 원조를 제공하였습니다. 솔직히 말해 50년대 한국은 미국의 원조에 빌붙어 사는 거지와 같은 나라였습니다.

    그런데 우정은 교수의 논문을 읽으면 이야기가 조금 달라집니다.
    미국의 원조로 먹고사는 나라가 미국의 요구를 물리치면서 독자의 경제정책을 펼친 것입니다.
    미국은 한국이 독자의 공업화를 이루는 것이 가능하지도 않고, 또 바로 옆에 일본이 있기 때문에 바람직하지도 않다고 생각했습니다. 미국은 한국이 일본의 공산품을 수입해 쓰는 편이 훨씬 효과적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 대신 한국은 농업에 비교우위가 있으니까 거기에 주력하여 농업국가로 발전하는 편이 경제도 안정시키고 경제성장도 빨라지는 효과를 거둘 것으로 보았습니다.
    1960년에 《경제발전의 제단계ㅡ반마르크스주의사관》이란 책을 써서 세계적으로 유명해진 미국의 로스토우(W.W.Rostow)라는 경제학자가 있습니다. 그가 1961년에 한국 경제에 관해 낸 보고서는 한국경제가 수백 년에 걸쳐 내려온 고질적인 동양적 문제로 절망적인 상태에 있는 것으로 결론을 내리고 있습니다. 미국인이 보기에 한국 정치의 분열과 부정부패는 교정될 수 없는 풍토병과 같은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독자노선의 공업화를 추구하다니요, 말이 되지 않는다는 겁니다.
    약 30년 뒤 로스토우는 다시 한국을 방문한 자리에서 자기가 틀렸음을 시인하면서 도대체 이 민족에 내가 알지 못했던 어떠한 문명의 저력이 있었던가를 물었지요.
    그건 그렇고 50년대 한국 경제를 충고하던 미국의 입장은 확실했습니다. 미국의 원조로 경제를 안정시키면서 일본과 협력하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일본을 축으로 한 미국의 동아시아 정책이기도 했습니다.
    그렇지만, 고집불통의 이승만 대통령은 미국의 말을 듣지 않았습니다.
    언제 다시 쳐들어올지 모르는 일본으로부터 필요한 물건을 사서 쓰라니, 그것은 다시 일본에 종속되라는 말도 안 되는 소리였습니다.
    이승만 대통령은 자립경제의 건설을 위한 독자의 공업화 정책을 강행합니다. 미국이 어쩔 것이냐, 그렇다고 미국이 냉전의 전초기지인 한국을 버리기야 하겠느냐 하는 배짱에서였습니다. 사실 미국으로서도 이 완고하기 짝이 없는 노인 때문에 난처한 지경에 처한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습니다.
    제 13장에서 잠시 언급했습니다만, 한때 미국은 한국의 대통령을 장면처럼 미국에 고분고분한 야당 지도자로 갈아치울 것을 심각하게 고민한 적도 있습니다만, 이승만과 같은 강력한 카리스마와 지도력이 한국의 실정에 더 좋다는 실용적인 판단으로 그만 접고 말았습니다.

    원조와 수입대체공업화

    이승만 대통령이 펼친 자립경제를 위한 공업화 노선을 가리켜 흔히 수입대체공업화(輸入代替工業化) 전략이라 합니다. 외국에서 수입하여 쓰는 공산품을 국내 공업을 일으켜 국산품으로 대체하자는 뜻입니다.
    이 공업화 전략의 핵심적 정책 수단은 저환율 정책입니다. 예컨대 1달러에 300환이 시장에서 성립한 균형 환율임에도 1달러에 100환으로 1/3 수준으로 환율을 낮추는 것을 말합니다. 그렇게 되면 어떤 효과가 발생합니까. 미국에서 1달러어치 물건을 사올 때 300환이 아니라 100환만 지불해도 되지요. 수입대체를 위한 국내 공업을 일으키려면 미국에서 기계와 부품을 수입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 비용을 줄이고자 저렇게 저환율 정책을 취했던 것이죠.
    이승만 정부가 저환율을 고집한 또 하나의 이유는 유엔군 대여금의 상환 달러를 극대화하기 위해서였습니다. 당시 한국정부가 달러를 손에 쥘 수 있는 거의 유일한 경로는 한국에 주둔하는 유엔군이 필요로 하는 한국화폐를 대여한 다음, 그것을 달러로 상환 받는 길이었습니다. 그때 될 수 있는 한 많은 달러를 상환 받으려고 저환율로 한국화폐의 가치를 실세 이상으로 높여 둔 것이지요. 이를 두고 미국정부와 적지 않은 마찰이 있었습니다. 미국은 부당하게 낮은 환율을 높이라고 요구하면서 대여금 상환 달러의 지급을 미루었습니다.

  • ▲ 1961년 4월 준공된 충주비료공장. ⓒ 뉴데일리
    ▲ 1961년 4월 준공된 충주비료공장. ⓒ 뉴데일리

    이제 미국에서 원조가 주어지고 한국에서 집행되는 경로에 대해 좀 더 구체적으로 설명하겠습니다.
    예컨대 어느 해에 미국의 원조가 3억 달러로 책정되었다고 칩시다. 3억 달러의 돈이 오는 것이 아니라 3억 달러만큼의 미국이나 다른 나라 제품을 구입할 수 있는 권리를 주는 것입니다. 정부는 장부상으로 들어온 3억 달러를 민간의 수입업자에게 배당합니다. 가령 어느 업자가 100만 달러를 배당받았다 칩시다. 업자는 그에 상당하는 1억 환의 한국 화폐를 한국은행에 예치한 다음 수입허가증을 얻습니다. 그리고선 그 증서를 미국의 원조당국과 금융기관에 제출하여 필요한 물건을 구입해 오는 것입니다. 한국은행에 예치된 수입대금은 미국 정부의 감독하에 한국정부의 재정자금으로 지출되었습니다. 이를 가리켜 대충자금(對充資金)이라 했습니다.
    달러를 배당받은 수입업자는 횡재한 셈이나 다름없습니다. 왜냐하면, 수입한 물건을 그대로 국내 시장에 내다 팔면 실세 환율에 따라 몇 배나 큰 이익이 생기니까요. 그럼에도, 정부가 그런 특혜를 부여한 것은 수입업자가 외국에서 원료와 부품과 기계를 사와서 팔아먹지 않고 공장을 지을 것이라고 기대했기 때문입니다. 그런 식으로 공업화를 서둘러 일본으로부터 공산품을 수입하지 않아도 좋을 자립경제를 만들겠다는 것이 이승만 대통령의 꿈이었습니다.

    이승만의 꿈 '자립경제'...50년대 중반 고도성장 기록

    실제 기업가들이 정부의 기대대로 공장을 짓고 돌렸던가요. 그랬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주로 밀가루·설탕·면방직과 같은 소비재공업의 공장이 건설되었습니다. 모두 원료가 희다고 해서 이들을 가리켜 삼백(三白)공업이라고 했습니다. 그 외에 유리, 제련, 시멘트 공장도 건설되었습니다. 충주에서 비료공장의 건설도 착수되었습니다만, 완공을 보는 것은 1961년의 일입니다.
    이러한 공업화 정책의 결과 1954~1955년은 연간 6%, 1956년에 일시 정체한 후 1957년은 8.8%의 고도성장을 보였습니다. 1958년 이후에는 2~4%로 정체하여 조금 뒤에 쓰겠습니다만 경제 위기였습니다. 1954~1960년을 평균하면 연간 4.9%로서 당시 후진국의 평균 성장률 이상이었습니다. 산업별로는 2차산업의 성장률이 가장 높아서 연간 10% 이상이었습니다. 그로 인해 2차산업의 국민경제 비중이 1954년의 13.5%에서 1960년의 19.4%로 높아졌습니다. 저는 50년대가 이 정도라도 거둔 공업화의 성과를 전제하지 않는다면 60년대에 들어 박정희 정부가 수출주도공업화로 경제발전의 전략을 바꾸는 것이 그리 쉽지만은 않았다고 생각합니다. 식료나 의류와 같은 기초적 생필품의 수급에서 어느 정도 수출의 여력이 있었으니까 그런 식의 대전환이 가능했던 것이죠. 최소한의 비빌 언덕은 있었던 셈입니다.

    도덕해이를 피하다

    그런데 달러를 배당받은 업자가 수입한 물자를 엉뚱한 데 쓰거나 되팔아 먹었더라면 어떻게 됐겠습니까. 칼자루를 쥔 정치가와 관료가 그 짓을 눈감아 주고 뇌물이나 받았다면 그 결과가 어땠겠습니까. 당시 많은 후진국이 그러했습니다. 아프리카 일부 국가들은 오늘날도 그렇다고 합니다.
    하지만, 50년대의 한국정부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부정부패가 심했던 것은 사실이지만, 원조로 들어온 자금과 물자가 공장의 건설과 가동으로 들어가는 흐름 자체를 막거나 다른 방향으로 바꿀 정도로 부패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금융시장이 제대로 발달하지 못한 당시의 경제수준에서, 부패라고는 하나 그 기능을 세밀히 분석해 보면 그것이 없었을 경우보다 시장거래를 활성화했던 측면도 있었으리라 짐작됩니다. 아직 그런 연구는 없지만 도전해 볼 만한 가설이라고 생각합니다. 이와 관련하여 우정은 교수의 논문은 부정부패가 정치의 역동성에 의해 상쇄되었다고 달리 표현하고 있습니다. 쉽게 말해 경제개발에 대한 집권자의 의지가 시퍼렇게 살아 있어서 시장을 대신하여 관료기구가 금융자원을 배분했지만 나름의 원칙과 효율성을 실현했다는 뜻으로 이해해도 좋다고 생각합니다.

    이승만, 몇백달러 일본출장 식사에 펄펄 뛰다

    관련하여서 한 가지만 말씀드리면 원조자금을 배당하는 데 아무에게나 아무렇게나 배정하지 않고 공장을 지을 만한 실수요자들에게 우선으로 배당하였습니다. 또한, 국민경제의 입장에서 수입 물자의 우선순위를 정한 다음, 물자마다 적용되는 환율을 달리하였습니다. 아주 요긴한 물자에 관해선 가장 낮은 환율을, 덜 긴요한 물자에는 좀 더 높은 환율을, 별로 중요하지 않은 물자에 대해선 아주 높은 환율을 적용하는 것입니다. 최근 김낙년 교수의 추계에 의하면 당시 공정환율과 시장환율의 차이에 따라 원조 달러의 배당에 따른 초과이윤은 총 국민소득의 10% 수준이었다고 합니다. 이 거대한 초과이윤이 국민경제의 건설을 위해 공장을 짓고 돌릴 의지와 능력이 있는 사람에게 우선으로 배정되도록 고안되었던 것이 위와 같은 복수환율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요컨대 당시 정부가 원조나 유엔군 대여금으로 확보한 달러를 외환시장을 통하지 않고ㅡ당시에는 그런 시장이 있지도 않았습니다ㅡ재량으로 민간에 배당함에 나름의 일관성과 도덕성의 규범은 확보하고 있었습니다. 여기에는 식민지기에 일본에서 대학을 나오고 은행 등에서 실무 경험을 쌓고 해방 후 미국 연수를 다녀온 유능하고 청렴한 실무 관료들의 공덕이 컸습니다.
    그 점에 대한 정당한 평가를 놓쳐서는 곤란합니다. 어느 사회와 국가가 내장하고 있는 그러한 실무적 정책능력과 도덕적 규율능력을 과소평가해서는 곤란합니다. 그런 능력은 아무 나라에서 아무렇게나 찾아지는 역사의 미덕이 아니지요. 많은 후진국이 그러한 정책능력과 도덕능력에서 실패했습니다.
    그러나 대한민국은 달랐습니다. 이승만 대통령이 단돈 1달러를 아끼려고 어떻게 했습니까. 어느 외교관이 일본에 출장을 갔다가 고급 요리점에 들러 몇 백 달러짜리 식사를 했습니다. 대노한 이 대통령의 꾸지람이 얼마나 혹독했는지가 그를 흠모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일화로 전해 오고 있습니다.

    줄어드는 미국원조...국제환경은 변하는데

    그렇지만, 1958년부터 모든 사정이 달라지기 시작했습니다. 경제가 매우 나빠지기 시작했습니다.
    미국으로부터 원조가 줄어들었기 때문입니다. 1957년에 3.8억 달러이던 원조가 1960년까지 2.4억 달러로까지 점점 줄었습니다. 재정자금과 투자자금의 대부분을 원조에 기대는 나라의 경제가 원조가 줄어드니 나빠지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원조가 줄어든 것은 미국의 대외정책의 기조가 바뀌었기 때문입니다. 제2차 세계대전 후 세계의 여러 나라는 미국이 원조의 형태로 세계에 뿌린 달러에 기대어 전후 부흥을 추구하였습니다. 1950년대 후반이면 미국은 국제수지가 악화하여 더는 달러를 뿌릴 여유를 갖지 못합니다. 그 대신 1950년대 중반을 넘기면서 서유럽과 일본 등 주요 자본주의 국가들이 자력으로 국제수지를 방위할 능력을 갖추게 됩니다. 미국으로서는 세계 자유무역을 위한 IMF-GATT체제를 본격적으로 가동할 여건이 갖추어진 셈이지요. 그와 더불어 군사적 논리에 따른 원조가 후진국의 경제발전에 본질적인 도움이 되지 못한다는 지적도 있었습니다. 후진국은 원조보다 차관을 도입하여 자기 책임으로 장기적인 개발개획을 세워 경제발전을 추구할 일이라는 겁니다. 대외정책의 기조가 이렇게 바뀌면서 미국은 한국정부에 원조의 감축을 통보하고 그에 대한 대책을 세울 것을 종용하였습니다.

    그렇지만, 이승만 정부는 그 같은 미국의 변화와 요구에 효율적으로 대응하지 못했습니다. 오히려 미국과의 마찰과 긴장을 증폭시켜 가지요. 그러한 50년대 후반의 위기 상황을 세밀히 추적하고 있는 것이 《재인식》에 실린 이철순 교수의 논문, <1950년대 후반 미국의 대한정책>입니다.
    여기서 이철순은 미국의 대한정책이 1957년을 경계로 군사적 안보정책에서 대내적 안보정책으로 바뀌었다고 주장합니다. 미국이 보기에 북한이 군사적으로 다시 공격해 올 가능성은 거의 사라졌습니다. 오히려 남한의 내부가 문제였습니다. 일정한 경제적 성과에도 한국은 여전히 세계 최빈국의 하나였습니다. 이승만의 권위주의적 통치를 제어할 국내의 정치세력은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미국이 보기에 한국은 국민의 환멸과 저항으로 표류하는 나라였습니다. 그러한 나라가 내부에서 무너져 내린다면 반미국적인 정권이 들어설 위험성이 크지요.
    미국이 그렇게 걱정하게 된 것은 1956년의 정부통령 선거가 중요한 계기였습니다. 부통령에 야당의 장면이 당선되고, 진보당의 조봉암이 대통령 선거에서 30%라는 큰 지지율을 획득했습니다. 그러자 이미 나이 80을 넘긴 대통령의 후계자가 불투명해지면서 정국이 큰 혼란으로 빠져들었습니다. 그 혼란을 수습하고 반미국적 정권이 들어서는 것을 막으려면 정치적으로 민주주의를 강화하고 경제적으로 성장을 촉진할 필요가 있었습니다. 미국의 그러한 대한정책을 이철순은 대내적 안보정책이라 부르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승만 정부는 미국의 요구에 그리 적극적인 반응을 보이지 않습니다. 부흥부를 중심으로 경제개발계획이 만들어집니다만, 집권자와 정부의 총력 의지를 담지는 못했습니다. 정치적으로는 야당에 대한 불신이 지나쳐 강경일변도로 야당과 언론을 탄압했습니다. 1959년 미국의 강력한 저지에도 끝내 진보당의 조봉암을 간첩으로 몰아 처형하지요.
    이 무렵 미국은 이승만 정부를 포기합니다. 그리고선 때를 기다립니다. 곧이어 1960년 3·15부정선거에 대한 국민적 저항으로 4·19의거가 일어나자 미국은 신속히 개입합니다. 이승만을 하야시켜 4·19의 성과를 선점한 것이지요. 이상이 이철순 교수의 논문입니다.

    그의 시대는 저물고

  • ▲ 4.19 의거의 시위대. ⓒ 뉴데일리
    ▲ 4.19 의거의 시위대. ⓒ 뉴데일리

    모든 절대 권력은 부패한다고 했습니다. 1950년대 후반 너무 늙긴 했지만 한국의 보나파르트가 된 이승만은 자신이 성취한 것에 도취하여선지 더할 나위 없이 완고해져 있었습니다. 최근에 공개된 1958년의 국무회의록을 보면 이승만은 나이 83세의 노인치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로 강인한 체력을 과시하면서 3~4일마다 있는 국무회의를 꼬박꼬박 챙기고 있습니다.
    각료들은 이승만의 앞에서는 자식과 다를 바 없는 사람들입니다. 국무회의라고 하나 옛날 왕조 시대의 조정에서 임금이 하문하고 분부하는 장면과 다를 바 없습니다. 그러한 군주형 집권자가 헤게모니 국가인 미국에 대해 지나치게 완강합니다.
    1958년 8월 2일의 회의록입니다. 송인상 부흥부 장관이 워싱턴의 지시에 따라 미국대사가 요청하여 양국의 관계자들이 한국의 경제정책 방향을 둘러싸고 회의를 가졌음을 보고합니다. 그러면서 미국이 한국의 정계나 행정이 부패하여 경제 원조를 계속할 수 없는 형편이므로 여러 가지 개혁을 추진하도록 요구했다고 보고합니다. 그러자 이승만 대통령이 대노합니다. “그들의 부패상은 말하기조차 거북할 정도인데 우리 보고 부패 운운하고 있다. 한국경제를 이 같이 만든 원인은 그들이 차용한 환화(圜貨)를 장기간 반제하지 않았던 까닭이다. 이러한 사실을 조사하여 신문에 발표하고 그들 보고 다 가버리라고 하라”라고 말입니다. 기세는 참으로 대단합니다만, 후진국의 지도자로서 책임 있는 대응이었다고는 생각되지 않습니다.
    싫거나 좋거나 협력의 상대인 이웃 일본과의 관계도 문제였습니다. 50년대 양국의 외교관계에 대해선 잘 알지 못하고, 또 당시 일본이 어느 정도나 성의가 있었는지도 회의적이어서 함부로 이야기하기가 두렵습니다. 그 점을 전제하고서 하는 말입니다만, 국무회의록에 나타난 이승만 대통령의 대일본 입장도 지나치게 비현실적이군요. 그에게 일본은 두고 간 재산을 찾으려 언제 다시 쳐들어올지 모를 적국이었습니다.
    그러나 제가 보기에 이미 일본은 그 옛날의 일본이 아니었습니다. 그 점만은 어느 정도 확실하게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1956년 일본의 경제백서는 일본이 이미 이전과 상이한 발전단계에 들어섰음을 선포하고 있습니다. 이제 전후(戰後)는 아니다. 회복은 끝났다. 지금부터의 성장은 근대화이다. 메이지유신이 있었지만 구조적인 변혁이 없었다. 대외적 조건을 무리하게 우리에게 맞추려고 군사적 팽창을 시도한 잘못을 범하였다. 세계는 지금 평화적인 경존(競存)의 시대이다. 경제성장률의 투쟁이다. 대강 이러한 내용으로 알고 있습니다.
    확실히 세계는 바뀌고 있었습니다. 미국도 일본도 바뀌고 있었습니다. 커다란 국제시장이 열리는 새로운 60년대가 다가오고 있었습니다. 그에 기민하게 대응하면서 국내에 잠재한 근대화의 지체에 따른 국민의 불만을 개발과 성장을 위한 동력으로 승화시킬 정치적 리더십이 필요한 단계가 되었습니다. 헤게모니 국가인 미국과, 또 세계의 공업국가로 무섭게 튀어 오르는 일본과, 개방적인 협력관계를 재정립할 필요도 있었습니다. 그 역시 그에 걸맞는 새로운 정치적 리더십을 요구하였습니다.
    이승만의 시대는 서서히 끝이 나고 있었습니다. 그의 역사적 역할은 ‘나라세우기’의 기틀을 잡는 것으로 충분하였습니다. 자유민주주의와 자유시장경제로 나라의 기틀을 잡았던 것만으로도 그의 공적은 태산과 같습니다. 그 기틀 위에서 나라를 부유하게 하는 일은 그 일에 적합한 의지와 능력을 갖춘 새로운 지도자를 요구하였습니다. 그 다음은 4·19와 5·16을 경과한 개발시대의 역사가 되겠지요.
    언젠가 기회가 닿으면 마음 맞은 친구들과 함께 《개발시대의 재인식》이란 책도 편집해 보고 싶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