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윤동주 탄생 100주년, 독립운동가 윤동주를 만나다

    민족의 절정의 수난기에 희생당한 청년, 윤동주.

    그가 남긴 아름답고 정결한 시의 언어에는 일제 강점기를 살았던 윤동주의 치열한 노력과 그가 이루고 싶었던 일에 대한 의지가 녹아 있었다.

    KBS는 '윤동주의 탄생 100주년'을 맞이해 하늘과 바람과 별의 시인 윤동주의 다른 이름 저항시인 독립운동가 윤동주를 만나는 여행을 준비했다.

    바른 가치관으로 살아가는 것이 그 시대에는 용기 있는 일, 윤동주는 바른 저항을 해 왔던 사람입니다.

       - 야나기하라 야스코 <시인 윤동주를 기념하는 릿쿄의 모임>



  • ■ 바른 저항의 길, 한글로 시를 쓴다는 것

    당시 일본이 내선일체(內鮮一體)라는 구호 아래 실시한 민족말살정책으로 인해 우리 문학계는 암흑기를 맞는다. 그러나 훗날, 어둠의 시절에 한글로 쓰인 저항시인들의 시들이 세상의 빛을 보게 되면서 시인들의 독립운동이 새롭게 조명되기 시작했다.   

    오직 한글로만 시를 썼고, 죽는 날까지 한글을 버리지 못했던 문학청년 윤동주의 시. 그가 고수해 온 한글을 향한 의지, 글을 쓰겠다는 의지는 정신과 문화를 잃지 않으려 했던 저항이었다. 

    1940년대 혼란의 시기에 글로써 나라와 민족을 향해 이루고자 했던 바가 굳건했던 윤동주는 일본 유학을 결정하면서 불가피하게 창씨개명을 하게 된다.

    그의 시 '참회록' 속에 이러한 상황이 담담하게 녹아 있다. 참회록을 비롯한 십자가, 슬픈 족속은 물론 생전에 활자화됐던 그의 동시 속에서도 발견할 수 있는 시대의 저항정신을 집중 조명한다. 

    죽을 때까지 한글을 버리지 않고 한글 씨를 썼다는 것, 차원 높은 저항을 보여 준 윤동주야말로 진정한 애국자입니다.

       - 우에노 준 <시인, 교수>



  • ■ 6첩 방은 남의 나라, 혼란의 땅에서 보여준 저항의 행동 

    윤동주가 유학했던 1940년대의 일본은 혼란의 땅이었다. 미국과 영국을 상대로 벌이고 있던 전쟁의 패운이 짙어지자 일본은 그야말로 최후의 발악을 하고 있었다.

    이러한 시대 배경 아래 일본의 심장부에서 행해진 윤동주의 저항은 어떤 모습이었을까? 일본에서 만난 여러 사람의 증언과 기록을 통해 윤동주가 교련 수업을 거부했고 일본 경찰에 장시간 감시를 받아 왔음을 알 수 있었다.

    '제 경도 조선인 유학생 민족주의 그룹 사건' 판결문의 정밀한 분석을 통해 당시 윤동주가 일본에서 행한 독립운동의 세세한 기록을 전한다.

    일본의 심장부에서 징병제 반대를 외쳤다는 점, 독립운동을 했던 분들과 연대해서 활동 했다는 점, 이런 것들은 일본 입장에서 가장 섬뜩한 활동이었을 것입니다.

       - 서동일 박사 <국가보훈처 연구원>



  • ■ 우리 역사의 자랑, 시인들의 독립운동

    윤동주의 감성과 지성을 바탕으로 한 예언자적 저항시와 신심을 쏟은 온몸의 이행을 통해 투쟁의 의지를 보여준 이육사의 저항시, 저항의 방식은 달랐지만 두 시인 모두 문화를 통한 민족적인 자긍심을 지키려 노력했던 독립 운동가였다.

    두 시인을 통해서 한글 말살 정책 아래 고통 받던 많은 문인들이 변절했던 시절, 끝까지 우리말로 저항한 시인들의 절의에 대한 가치를 재조명한다. 

    는 언어의 결정체의 문학 형태입니다. 시에 우리 민족의 정신과 의식을 승화시킨 결정체야 말로 독립운동의 맥을 이어갈 수 있는 소중한 문화 의식 주체입니다.

       - 윤동철 <성결대학교 총장>



  • ■ 시인의 고향에서 윤동주, 이육사의 유족이 직접 전하는 이야기

    윤동주의 외할아버지 김약연 선생이 식솔들을 이끌고 정착해 일궈낸 조선인의 마을 북간도 명동에서 태어났다. 당시 마을 곳곳에 세워진 교회를 통해서 신앙심을 길렀고 선교사들과 독립 운동가들의 수업으로 구성된 학교를 다니면서 선진화 된 교육 환경 속에서 자연스럽게 애국심을 배양 받았다.

    지금도 명동촌의 옛 건물에 남아있는 태극기와 무궁화가 새겨진 기와 막새와 풍경, '별 헤는 밤' 속 윤동주가 그리워한 고향 북간도의 모습을 윤동주의 유족 윤형주가 동행 취재했다.

    당시 어른들이 가르친 독립심과 애국심을 윤동주가 성장해가면서 깨닫게 되었을 것입니다. 일제 치하의 고통 받는 우리 역사를 보면서 젊은 윤동주의 안타까움과 내면의 느낌들이 시로써 표출되기 시작한 것 아닌가 생각합니다.

       - 윤형주 <가수, 윤동주 6촌 동생>


    또한 윤동주와 함께 대표되는 저항시인 이육사. 그는 의열단 독립운동으로 인해 많은 옥고를 치룬 후 쇠약해진 몸으로 더는 행동으로 독립운동이 어렵게 되자 서른 살이 넘어 총, 칼 대신 펜을 들었다.

    이육사가 자라고 저항했던 안동의 생가에서 만난 이육사의 유족, 딸이 전하는 이육사의 저항과 생의 마지막 모습에 관한 이야기를 전한다. 

    바른 말을 안 하는 아버지는 고문으로 일주일에 두 벌의 한복을 다 피로 물들였습니다. 북경 감옥으로 옮겨 가시기 전 서대문 청량리역에서 압송되는 아버지를 뵜는데 포승줄에 꽁꽁 묶여 계셨고요, 용수를 쓰고 계셨어요. 당시 3살이었던 제게는 굉장히 충격적인 모습이었지요.

       - 이옥비 <이육사 딸, 이육사 문학관 상임이사>



  • ■ 저항시인 독립운동가 윤동주를 추모하다

    혼란의 시대에 윤동주가 보여준 독립운동의 기록들은 시간이 흐른 지금까지 민족의 등불이 되어 우리들이 혼란을 겪을 때마다 나아갈 방향을 제시해주는 이정표가 되어주고 있다.   

    탄생 100주년 그 후, 명동 촌 언덕에 잠든 윤동주를 초모하는 열기는 식지 않고 이어지고 있다.

    윤동주가 머물다 떠난 한국, 일본, 중국의 문화계 곳곳에서 열린 추모 행사에서 ‘시’와 ‘노래’로 전해지는 마음들. 세대와 시간을 뛰어넘어 과거와 현재가 만나고 역사와 문학으로 소통되는 윤동주를 향한 다양한 추모의 모습들을 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