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엔헌장에 따라 차별 반대한 것인데, 비판 있다고 해서 깜짝 놀라"
  • 반기문 전 유엔사무총장과 자승 조계종 총무원장이 20일 서울 조계사에서 만나 환담을 나누고 있다. ⓒ뉴데일리 이종현 기자
    ▲ 반기문 전 유엔사무총장과 자승 조계종 총무원장이 20일 서울 조계사에서 만나 환담을 나누고 있다. ⓒ뉴데일리 이종현 기자

    반기문 전 유엔사무총장이 국내 기독교계 일각에서 의구심을 갖고 있는 자신의 성소수자(동성애) 관련 입장에 대해 해명하겠다는 의지를 내비쳤다.

    반기문 전 총장은 20일 서울 조계사를 찾아 자승 조계종 총무원장을 만난 자리에서 "성소수자 차별이 금지돼야 한다는 것은 유엔의 기본 원칙"이라며 "국내에서 그런 면에 있어서 비판이 있다고 들어 깜짝 놀랐다"고 밝혔다.

    반기문 전 총장의 이같은 언급은 자승 총무원장과 차별금지법을 주제로 환담을 나누던 중에 나온 것이다.

    자승 총무원장은 지난 2010년 반기문 전 총장이 미국 뉴욕에서 소집한 세계종교지도자회의에 참석했던 일화를 떠올리며 "그 때 미국의 종교지도자들과 자리를 같이 하며, 종교 간의 갈등이 적은 비결을 물었더니 증오범죄법(Hate Crime Prevention Act)에 대해 이야기하더라"고 말문을 열었다.

    아울러 "우리나라도 다종교·다문화 사회로 가고 있어서 인권 보호를 위해 차별금지법이 제정돼야겠다는 생각을 갖게 됐다"며 "우리 (반기문) 총장께서는 종교 간의 갈등을 누구보다 체험을 많이 했기 때문에 차별금지법으로 보완이 꼭 됐으면 한다는 말씀을 드린다"고 말했다.

    이에 대해 반기문 전 총장은 "차별을 금지하는 것은 유엔헌장의 아주 기본적인 원칙"이라며 "인종·종교·성별·연령·믿음·신체의 특성 이를테면 장애인이라든지 모든 것을 망라해서 어떤 경우에도 인간은 차별받아서는 안 된다는 게 대원칙"이라고 답했다.

    그러면서 "성소수자에 대한 차별이 금지돼야 한다는 것도 유엔의 기본원칙이라 강조를 했는데 오해가 있는 것 같다"며 "마치 내가… 내가… 마치… 저기… 하여튼 내 입장을 상당히 오해를 한다"고 한참 동안 단어를 고르다가 말문을 닫았다.

    맥락상 반기문 전 총장이 해명하려 한 '오해'는 성소수자, 즉 동성애와 관련한 자신의 입장인 것으로 보인다.

    반기문 전 총장은 유엔사무총장 시절, 동성애를 범죄로 규정하는 회원국의 법제에 반대하는 입장을 보였다. 일례로 지난 2012년 3월 7일, 반기문 전 총장은 '때는 왔다(The Time Has Come)'라는 서한을 유엔인권이사회에 전달하면서,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위원회 설치를 촉구했다.

    이어 같은해 12월 10일, 반기문 전 총장은 '인권의 날'을 맞이해 미국 뉴욕 유엔본부에서 특별 연설을 하면서 동성애 그 자체를 범죄로 규정해 처벌하는 76개 국의 명단을 일일이 열거하며 비판했다.

    반기문 전 총장은 이날 "이른바 LGBT라 불리는 사람들도 다른 모든 사람과 마찬가지로 인권을 가지고 있다"고 말해 기립박수를 받았다. 또, 동성애에 대해서 공개된 토론 장소 등에서 언급하는 것만으로도 범죄가 성립하는 우크라이나의 상황에 대해 "용납되지 않는 일"이라고 규탄했다.

  • 반기문 전 유엔사무총장과 자승 조계종 총무원장이 20일 서울 조계사에서 만나 환담을 나누고 있다. 반기문 전 총장의 오른편에 배석한 인물은 박진 전 의원이다. ⓒ뉴데일리 이종현 기자
    ▲ 반기문 전 유엔사무총장과 자승 조계종 총무원장이 20일 서울 조계사에서 만나 환담을 나누고 있다. 반기문 전 총장의 오른편에 배석한 인물은 박진 전 의원이다. ⓒ뉴데일리 이종현 기자

    이러한 반기문 전 총장의 입장은 성소수자에 대해 그 사실만으로 △투석형(공개 장소에서 돌을 던져 사형시키는 것)에 처하는 사우디아라비아·이란·나이지리아 △10~25년의 금고형에 처하는 인도·자메이카·도미니카에 대해 인권 보호 측면에서 법제 개선을 요구한 것으로 해석된다.

    또, 우간다·우크라이나 등의 나라에서는 출판물이나 방송물에 성소수자가 등장하거나 공개 장소에서 언급하는 것만으로도 금고형이나 벌금형으로 처벌하고 있는데, 이는 동성애의 문제를 떠나 언론·출판의 자유를 침해하는 문제이므로 이러한 부분의 개선을 촉구한 것이라는 설명이다.

    결국 유엔헌장과 세계 인권 선언의 취지에 따라, 성소수자라고 해서 그 사실만으로 국가 공권력을 동원해 죽여버리거나 감옥에 가두는 것은 인권 보호라는 측면에서 문제가 있으므로, 회원국의 법제를 개선하라는 촉구를 한 셈이다.

    그런데도 국내 기독교계 일각에서는 마치 반기문 전 총장이 동성애를 조장하거나 두둔하는 것처럼 입장이 잘못 알려지고 있고, 이에 대한 비판이 거세게 제기되고 있다. 이날 반기문 전 총장은 이같은 오해를 표현할 적당한 단어를 고르다가, 마땅치가 않자 "하여튼 내 입장을 오해하고 있다"고 설명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면서 반기문 전 총장은 "기독교 대표들과 지도자들을 만나면 말씀드릴 것"이라고 밝혀, 이러한 '오해'를 교계 지도자들과 만난 자리에서 해명하고 풀겠다는 의지를 드러냈다.

    이날 반기문 전 총장과 자승 총무원장은 차별금지법 뿐만 아니라 세계의 종교 갈등 등 다양한 주제로 환담을 나눈 뒤, 사찰음식명장 선재스님이 마련한 오찬을 함께 했다.

    오찬에는 능이버섯밥과 냉면이 나왔는데, 배석한 박진 전 의원은 "능이버섯 밥은 힘을 내라는 의미이며, 냉면은 먹고 열을 식히라는 의미"라며 "(반기문 전 총장이) 냉면을 드시고 열을 식혔으니 평정심으로 돌아갈 것 같다"고 전했다.

    이 자리에서 자승 총무원장은 "흠집을 내는 기자들은 악수를 한 번 더해주고, 반대 피켓을 든 사람은 한 번 더 껴안아주라"며 '도무방소 명대승심(道無方所 名大乘心)'이라는 법어를 내렸다.

    박진 전 의원은 이에 대해 "가고자 하는 길에는 정답이 없으니, 큰 마음으로 중용을 보면서 가라는 뜻"이라며 "큰 길을 가는데 어떤 정답을 찾으려고 번뇌하면 방도가 나오지 않으니, 국민만 바라보고 큰 마음으로 가라는 말씀"이라고 설명했다.

    이에 반기문 전 총장은 "잘 알겠다"며 "열린 마음으로 국민을 보고 끝까지 최선을 다하겠다"고 사의를 표한 것으로 전해졌다. 한결 밝아진 표정으로 오찬을 마치고 나선 반기문 전 총장은 취재진과 만나 "아주 유익했고 좋은 말씀을 많이 들었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