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의로 똘똘 뭉친 세력은 '호소'나 '러브콜'로 결코 변하지 않을 것전통적 보수 세력의 기대에 부응해 체임벌린 아닌 처칠처럼 맞서라
  • 반기문 전 유엔사무총장이 18일 오전 특강을 위해 광주광역시 조선대학교를 찾은 자리에서 항의 시위대의 피케팅에 직면해 있다. ⓒ광주=뉴데일리 이종현 기자
    ▲ 반기문 전 유엔사무총장이 18일 오전 특강을 위해 광주광역시 조선대학교를 찾은 자리에서 항의 시위대의 피케팅에 직면해 있다. ⓒ광주=뉴데일리 이종현 기자

    광주에서의 피케팅, 대구에서 인산인해를 이룬 환영인파… 단 하루 만에 오전·오후로 극과 극의 경험을 한 반기문 전 유엔사무총장은 이로부터 무엇을 깨달았을까.

    18일 오후, 대구모노레일 서문시장역 인근 분식점에서 반기문 전 유엔사무총장이 온다고 공지된 '대신119안전센터'의 위치를 물었다. '119안전센터'를 알아듣지 못해 다시 "소방서"라고 물어보자, 그제서야 분식점 앞에 손님으로 있던 어르신이 "큰 길에서 오른쪽으로 가면 된다"고 알려줬다.

    하지만 이 어르신은 곧 "못 갈 거라"라며 "반기문이 온다고 지금 난리가 났다"고 말했다. 그 대답에 기자보다 먼저 놀란 것은 분식점 주인이었다. 부치개를 손에서 떨어뜨리면서 "어머, 반기문이!"라고 놀라워했다.

    이날 대구 서문시장에는 16일의 부산 깡통시장·자갈치시장보다 압도적으로 많은 환영인파가 몰렸다. 반기문 전 총장이 도착하기 훨씬 전부터 태극기가 나부끼고 환영 펼침막이 곳곳에 내걸렸다.

    교통정리에 나선 해병전우회 대원들도 연신 "반기문"을 외치는 군중들의 연호 박자에 맞춰 어깨춤을 '으쌰으쌰' 추는 등 이들에게 반기문 전 총장의 방문은 하나의 축제였다.

    도중에 인파들을 통제하고 있던 경찰들이 무슨 이유에선지 일제히 철수하자, 중절모를 눌러쓰고 나와 있던 어르신은 "사람이 너무 많으니 이리로 안 오나보다"라고 탄식하며 발을 동동 굴렀다.

  • 반기문 전 유엔사무총장이 18일 오후 화재 피해 상인 위로를 위해 대구 서문시장을 찾자 몰려든 환영 인파가 인산인해를 이루고 있다. ⓒ대구=뉴데일리 정상윤 기자
    ▲ 반기문 전 유엔사무총장이 18일 오후 화재 피해 상인 위로를 위해 대구 서문시장을 찾자 몰려든 환영 인파가 인산인해를 이루고 있다. ⓒ대구=뉴데일리 정상윤 기자

    이윽고 반기문 전 총장이 탄 차량이 도착하자 인파가 일제히 '우' 하고 몰려, 차를 둘러싸고 "반기문"을 연호했다. 정작 연호받는 당사자인 반기문 전 총장은 차를 둘러싼 인파에 차문을 열 수가 없어 한동안 내리지를 못할 지경이었다.

    반기문 전 총장이 인파를 헤치고 가까스로 내리자, 아주머니들은 "약간 봤다" "난 얼굴을 봤다"며 서로 마주보고 "하이고"하며 웃었다. 간신히 공간을 마련한 반기문 전 총장이 손을 들어 흔들자, 주변에서는 거대한 "와아" 하는 함성이 진동했다.

    이 기대감, 대체 무엇 때문이었을까.

    반기문 전 총장은 인파에 이리저리 떠밀리며 서문시장 상황실에 들어갔다. 대구 중구청장 등을 상대로 자신의 유엔사무총장 재직 시절의 경험담을 곁들이며 꽤 긴 시간 안에서 이야기를 나눴는데도, 환영 인파는 참을성 있게 반기문 전 총장이 다시 나오길 기다렸다.

    이윽고 반기문 전 총장이 상황실 밖으로 나오자, 다시 "반기문"의 우렁찬 연호가 울려퍼졌다. 반기문 전 총장을 와락 껴안으면서 "대구경제 좀 살려달라"고 울부짖는 사람도 있었다. 어린 자녀를 안고 와서 반기문 전 총장과 눈을 마주치게 하더니 "봤다, 봤어" "이제 됐다"라며 인파 사이를 다시 빠져나가는 아버지도 있었다.

  • 반기문 전 유엔사무총장이 18일 오후 화재 피해 상인 위로를 위해 대구 서문시장을 찾은 자리에서 상황실로 들어서기에 앞서 자신을 애타게 부른 어머니의 외침에 호응해 아이에게 인파 사이로 손을 내밀어 맞잡으려 하고 있다. ⓒ대구=뉴데일리 정상윤 기자
    ▲ 반기문 전 유엔사무총장이 18일 오후 화재 피해 상인 위로를 위해 대구 서문시장을 찾은 자리에서 상황실로 들어서기에 앞서 자신을 애타게 부른 어머니의 외침에 호응해 아이에게 인파 사이로 손을 내밀어 맞잡으려 하고 있다. ⓒ대구=뉴데일리 정상윤 기자

    반기문 전 총장의 행렬을 기다리다가 경호원에 막혀서 악수를 하지 못하자 필사적으로 몇 번씩이나 "총장님, 총장님"을 부르짖는 사람도 있었다. 애간장을 끊는 듯한 그의 절규에 반기문 전 총장조차 외면하지 못하고, 웃는 모습으로 다시 돌아서서 손을 경호원들 사이로 쭉 내밀어 악수가 이뤄지기도 했다.

    불과 반나절 전에 광주광역시에서 반기문 전 총장이 겪은 경험과는 그야말로 운니지차(雲泥之差)다. 반기문 전 총장은 광주 조선대 특강을 전후해 피케팅하는 시위대의 험상궂은 모습을 마주해야 했다. 그는 규탄과 성토로 가득한 시위대 사이를 간신히 빠져나갔다.

    반기문 전 총장은 귀국하면서 현재 야권의 가장 유력한 대권주자에게 '걸림돌'이 됐다. 그 주자가 대권을 손아귀에 쥐기 위해서는 '제거돼야 할 존재'로 부상한 것이다.

    이 때문에 온라인 공간에서 가장 극성스럽게 조직됐다는 해당 대권주자의 지지자들은 온·오프라인을 넘나들며 반기문 전 총장의 일거수일투족마다 의도적으로 논란거리를 만들어내고 맹공격을 가하고 있다.

    국내를 떠나 있던 10년 동안 반기문 전 총장은 우리나라의 정치와 여론 환경이 이렇게까지 퇴보한 줄은 미처 몰랐을 것이다. 10년이면 강산도 변한다는데, 우리 강산은 지난 10년 동안 친문(親文)패권의 독소에 폐부까지 침식당한 상황이다.

  • 반기문 전 유엔사무총장이 18일 오후 화재 피해 상인 위로를 위해 대구 서문시장을 찾은 자리에서 경호원 사이로 손을 내밀어 자신을 환영하러 나온 시민과 악수하고 있다. ⓒ대구=뉴데일리 정상윤 기자
    ▲ 반기문 전 유엔사무총장이 18일 오후 화재 피해 상인 위로를 위해 대구 서문시장을 찾은 자리에서 경호원 사이로 손을 내밀어 자신을 환영하러 나온 시민과 악수하고 있다. ⓒ대구=뉴데일리 정상윤 기자

    황건적마냥 기세등등하게 온라인 공간을 뒤덮고 체제를 전복하려 달려드는 속칭 '문빠'들 앞에서 반기문 전 총장은 일기당천(一騎當千)의 기세로 관문을 막아선 형국이다. 그가 무너지면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 그동안 우리를 지탱해왔던 모든 체제가 위태롭다.

    '보수의 심장'이라 불리며, 그 어느 곳보다 야권의 특정 유력 대권주자의 집권을 허용하지 않겠다는 결의로 가득찬 곳. 대구에서 대대적인 환영 인파가 결집한 것은 이러한 기대감을 반영한 것은 아닐까.

    반기문 전 총장은 이날 서문시장 방문 이후 한국청년회의소 대구지부 임원들과의 간담회에서 자신을 악의적으로 공격하는 세력을 겨냥한 격정토로를 쏟아냈다.

    그는 "정치가 잘못되고 있으니 국민들이 잘못 유도당한다"며 "정치인들한테 이용당하고 있고, 모두 당하고 있다"고 토로했다.

    이어 "내가 이제 (국내에 돌아)온지 엿새째"라며 "(프랑스) 파리에 가서 전철 (표) 끊을 때 금방할 수 있느냐, 왜 그걸 못하느냐고 비난하면 그게 공정한 것이라고 생각하느냐"고 반문했다.

    아울러 "악의를 갖고 제발 그러지 않았으면 한다"며 "한국 국민들끼리 서로 미워하고 왜 그러는지 나도 답답하다"고 하소연했다.

  • 반기문 전 유엔사무총장이 18일 오후 화재 피해 상인 위로를 위해 대구 서문시장을 찾은 자리에서 경호원 사이로 손을 내밀어 자신을 환영하러 나온 시민과 악수하고 있다. ⓒ대구=뉴데일리 정상윤 기자
    ▲ 반기문 전 유엔사무총장이 18일 오후 화재 피해 상인 위로를 위해 대구 서문시장을 찾은 자리에서 경호원 사이로 손을 내밀어 자신을 환영하러 나온 시민과 악수하고 있다. ⓒ대구=뉴데일리 정상윤 기자

    정치인들에게 이용당하고 있다는 것은 '문빠'들의 배후에 특정 유력 대권주자가 있다는 것을 궤뚫어본 것이다. 10년 만에 귀국했는데 불과 엿새의 국내 활동 끝에 흑막의 너머를 파악했다는 것은 스마트하다는 평을 하지 않을 수 없다.

    하지만 국민 일부에 대한 믿음이 지나치다. 선(善)한 본성으로 이름난대로, 부처 눈에는 부처만 보이는 듯 하다. '문빠'들 앞에서 악의를 갖지 말라고 아무리 호소해도 소용은 없다. 친문패권은 머리와 손발이 따로 없이 악의로 뭉쳐진 집단이기 때문이다. 이미 수많은 정치인들이 그들의 악의 앞에서 희생양이 돼서 스러져간 것이 그 증거다.

    이날 광주와 대구에서의 상반된 경험을 통해 반기문 전 총장도 깨달아야 한다. 그의 귀국을 자랑스런 한국인 최초의 유엔사무총장의 10년 만의 귀국으로 순수하게 평가하려는 생각은 추호도 없는, 악의로 똘똘 뭉친 집단이 있다.

    그들은 앞으로도 끊임없이 논란을 확대재생산하고 부풀릴 것이다. 이들의 악의 앞에서 반기문 전 총장이 이날 "잘못도 아니고 약간의 실수도 아닌 것을 대단한 논란이 되는 것처럼 그러는데, 내가 신도 아니고 완벽한 사람도 아니다"라며 "여러분, 남을 배려하는 마음을 좀 갖자"고 호소한 것은 무력할 수밖에 없다.

    나치 독일의 히틀러를 상대로 '우리 시대의 평화'를 외친 체임벌린은 실패했고, 무력으로 단호히 맞선 처칠은 성공했다. 반기문 전 총장이 이 사례를 모르지는 않을 것이다.

  • 반기문 전 유엔사무총장이 18일 오후 대구 서문시장을 찾아 화재 피해 상인 위로와 격려를 마치고 떠나려 하자, 환영 나온 시민들이 그가 탄 차량을 향해 손을 흔들고 있다. ⓒ대구=뉴데일리 정상윤 기자
    ▲ 반기문 전 유엔사무총장이 18일 오후 대구 서문시장을 찾아 화재 피해 상인 위로와 격려를 마치고 떠나려 하자, 환영 나온 시민들이 그가 탄 차량을 향해 손을 흔들고 있다. ⓒ대구=뉴데일리 정상윤 기자

    이날 대구 서문시장에서 인산인해를 이루며 환영에 나섰던 그 사람들의 기대감에 부응해 악의로 똘똘 뭉쳐진 패권집단과 단호히 맞서야 한다. 그래서 '정치를 교체'한 뒤에야 비로소 일부 국민들이 악의적 정치인에게 이용당하고 유도됐던 적폐를 해소할 수 있다. 순서가 거꾸로 되면, 자칫 나라 전체가 악의로 뭉친 세력의 구렁텅이로 빠질 판이다.

    "진보적 보수주의자"란 말이야 아름답다. 그러나 10년 만에 돌아온 국내의 엄혹한 현실을 이제는 깨닫고 미몽에서 깨어나야 한다. 조기 대선이 예상되는 가운데, 더 이상 시간이 없다. 태극기를 흔들고 울부짖으며 자신을 환영하러 나왔던 인파를 실망시켜서는 안 된다.

    정욱(程昱)은 조조(曹操)에게 "연주를 지킬 수 없게 된 마당에 만약 서주마저 평정하지 못한다면 장군은 장차 어디로 돌아가시려느냐"는 말을 남겼다. 그는 "고조는 관중(關中)을 온전히 지키고 광무제는 하내의 근거지를 굳건히 해서 천하를 제압한 것"이라며 "근본을 공고하게 했기에 곤경을 겪기도 하고, 패배하기도 했지만 결국엔 대업을 이룰 수 있었다"고도 했다.

    지금 반기문 전 총장이 공고히 해야 할 근본은, 이날 서문시장에 대대적인 환영 인파로 몰린 전통적인 보수 성향의 국민들이다. 괜한 곁눈질로 피케팅 시위의 곤욕을 자초할 일이 아니다.

    순간의 격정토로로 끝날 것이 아니라, 먼저 근본을 공고히 한 뒤에 중도를 아우르는 대계(大計)를 세우라. 그래서 이날의 격정토로가 훗날 대선 과정을 반추해 볼 때, 하나의 전환점이 될 수 있게 되기를 기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