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경원 "지도부 퇴진 않으면 창당" 공언… 김원수 통해 반기문과 교감 있었나
  • ▲ 박근혜 대통령 탄핵심판에서 소추위원을 맡게 된 새누리당 권성동 법사위원장이 9일 저녁 탄핵소추의결서 정본을 들고 헌법재판소로 들어서고 있다. ⓒ뉴시스 사진DB
    ▲ 박근혜 대통령 탄핵심판에서 소추위원을 맡게 된 새누리당 권성동 법사위원장이 9일 저녁 탄핵소추의결서 정본을 들고 헌법재판소로 들어서고 있다. ⓒ뉴시스 사진DB

    '현재권력'이 직무정지를 당했다. '대선 시계'가 앞당겨질 것이 기정사실이 된 가운데, 범여권(汎與權)의 대표적인 '미래권력'인 반기문 유엔사무총장도 잰걸음을 보일 것으로 관측된다.

    '현재권력' 박근혜 대통령은 9일 오후 7시 3분을 기해 권한 행사를 정지당했다. 이날 오후 국회 본회의에서 가결된 탄핵소추의결서 등본이 청와대에 접수된 것이다.

    권한정지 상태에 빠진 박근혜 대통령은 헌법재판소의 탄핵심판 결과를 기다리는 것 이외에는 할 수 있는 일이 없어졌다. 요행 헌재에서 기각 결정을 내리면 직무에 복귀할 수 있지만, 탄핵소추를 인용해 파면 결정을 내리면 대통령직을 박탈당한다.

    박근혜 대통령이 파면당하면 헌법 제68조 2항의 '대통령 궐위' 상태가 된다. 60일 이내에 후임자를 선거해야 한다.

    문제는 헌법재판소의 탄핵심판은 언제 결정이 날지 모른다는 것이다. '4월 사임~6월 대선'을 내세운 '질서 있는 퇴진'처럼 정치 일정을 미리 내다볼 수 없게 됐다.

    탄핵심판에서 검사 역할인 소추위원을 맡은 새누리당 권성동 법사위원장은 이날 저녁 헌법재판소에 소추의결서를 접수하고 취재진과 만나 "이번 심판 절차는 (67일 만에 결론을 낸) 노무현 전 대통령 때에 비해 좀 더 시간이 걸릴 것"이라고 예측했지만, 더불어민주당 추미애 대표처럼 박한철 헌법재판소장의 임기가 만료되기 전인 1월말까지 결과가 나올 것이라고 보는 견해도 있다.

    대권을 꿈꾸는 사람이라면 가장 빨리 대선이 치러지는 경우를 상정해 준비할 수밖에 없게 됐다. 추미애 대표의 견해대로 1월말에 탄핵심판 결과가 파면으로 나오게 되면, 대선은 당장 내년 3월 22일에 치러질 수도 있다. 반기문 총장으로서는 발등에 불이 떨어진 셈이다.

    이와 관련 일부 매체에 보도된, 기존 정치권과 거리를 둔 완전히 새로운 '반기문 신당'의 창당이라는 '로드맵'이 가능할지 의구심이 커지고 있다.

    최근 일부 매체는 반기문 총장의 측근을 인용해 "반기문 총장은 새누리당이나 기존 정당으로 나오지 않고 신당을 창당한다"며 "새누리당은 곧 쪼개질텐데 중도를 표방하는 당을 만들면 붙으려는 인사들이 많을 것"이라고 보도했다.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면 새누리당·민주당·국민의당 등 기성 정당들이 차지하지 않은 공간에서 새로이 중도를 표방해 '반기문 신당'을 창당한다는 복안이다. 이후 새누리당에서 이탈할 비박계 의원들을 선별적으로 받아들인다는 뜻으로 읽힌다.

  • ▲ 반기문 유엔사무총장이 지난해 7월 미국을 방문한 김무성 전 대표최고위원, 강석호 전 최고위원, 나경원 의원 등 비박계 핵심 인사들과 함께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뉴시스 사진DB
    ▲ 반기문 유엔사무총장이 지난해 7월 미국을 방문한 김무성 전 대표최고위원, 강석호 전 최고위원, 나경원 의원 등 비박계 핵심 인사들과 함께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뉴시스 사진DB

    이러한 '로드맵'은 격랑에 휩싸인 정국 속에서 너무나도 유장(悠長)한 계획이라는 문제가 있다. 1월 중순에 귀국한 뒤에 바로 중도 신당을 창당하더라도 3월말에 선거를 치를 정도로 조직을 완비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게 정치권 관계자들의 지적이다.

    국민의당 안철수 전 대표가 구 새정치민주연합을 탈당한 게 지난해 12월초인데, 직후부터 신당 창당 작업에 나섰는데도 일부 시·도당은 창당하지도 못한 채로 4·13 총선을 치러야만 했다. 하물며 1월에 창당을 시작해 3월에 전국단위 선거를 치른다는 것은 도저히 불가능하다는 지적이다.

    새누리당 관계자는 "안철수 전 대표가 민주당(당시 새정치민주연합)을 탈당한 게 지난해 12월초인데, 당을 만들어서 4월 총선을 치르기까지 시간이 빠듯했다"며 "3월말에 대선이 치러진다고 하면, 지금 당장 당을 만들기 시작해도 시간이 부족할 판"이라고 우려했다.

    결국 당장 이르면 3월말에 '조기 대선'이 치러질지도 모르는 판국인데, 기성 정치인들과 모두 거리를 둔 중도 표방 신당을 창당한다는 것은 정치현실과는 동떨어진 '로드맵'이라는 결론이다. 반기문 총장이 귀국할 경우 정치적 접점을 형성할 가능성이 가장 높은 세력으로 손꼽히는 새누리당 비박계를 대표하는 정병국 의원이 이를 "전혀 근거가 없는 이야기"라고 일축한 것도 당연하다.

    정병국 의원은 8일 YTN라디오 〈출발 새아침〉에 출연해 "주변에 있는 사람들이 한, 전혀 근거가 없는 이야기라더라"며 "반기문 총장과 직접 대화하는 게 아니라, 자가발전을 하고 있는 단체들의 움직임"이라고 일축했다.

    그러면서 "그쪽(반기문 총장)의 아주 핵심적인 분과 이야기를 했는데, 반기문 총장은 국내의 여러 가지 지지단체와 전혀 접촉한 적이 없다고 한다"며 "정치권과도 구체적으로 이 부분(신당 창당)에 대해서 논의한 적도 없다"고 부연했다.

    반기문 총장이 이례적으로 국내 정치 및 이와 관련한 자신의 신상에 대해서 유엔 대변인을 통한 성명 자료를 낸 것도 이러한 맥락으로 해석된다.

    반기문 총장은 스테판 두자릭 유엔 대변인을 통한 성명에서 "최근 국내에서 일부 단체나 개인들이 마치 나를 대신해 정치에 대해 발언하거나 행동한다는 주장들이 보도된다"며 "이들 누구와도 전혀 관계가 없다"고 선을 그었다.

    '중도 표방 신당 창당설' 등 자신이 고려하고 있지도 않은 옵션으로 인해 국내 정치권이 혼란에 빠지고, 귀국해서 본격적으로 정치권에 뛰어들기도 전에 신뢰를 잃고 있는 것에 대한 불편한 심경이 읽힌다.

  • ▲ 반기문 유엔사무총장이 지난 5월 제주를 방문한 자리에서 새누리당 나경원 의원과 환담하고 있다. ⓒ뉴시스 사진DB
    ▲ 반기문 유엔사무총장이 지난 5월 제주를 방문한 자리에서 새누리당 나경원 의원과 환담하고 있다. ⓒ뉴시스 사진DB

    그렇다면 반기문 총장이 진지하게 검토하고 있는 방안은 무엇일까.

    지난달 중순 김원수 유엔사무차장이 국내를 방문했다. 김원수 차장은 반기문 총장을 10년째 보좌하고 있는 핵심 최측근으로, 반기문 총장이 자신과 전혀 관계가 없다고 선을 그은 '국내 일부 단체나 개인'의 범주에 들어가지 않는 사람이다.

    김원수 차장은 국내 방문 기간 동안 새누리당 정진석 원내대표를 비롯 비박계 핵심 중진의원과 차기 대권주자들을 두루 접촉한 것으로 전해졌다.

    정진석 원내대표를 만난 자리에서 김원수 차장은 반기문 총장의 귀국 이후 계획의 일면을 드러내기도 했다. 김원수 차장은 "반기문 총장은 귀국하면 전직 대통령과 대통령 부인들을 예방해 지난 10년 동안 유엔사무총장으로서 업무에 대해 말씀드릴 것"이라며 "국립묘지의 전직 대통령 묘역도 참배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이른바 '국민통합' 행보다. 최근 민주당 문재인 전 대표를 비롯한 국내 대권주자들은 국민을 통합하기는 커녕 국론분열과 '상호 불신과 증오의 정치'만 확대재생산하고 있다는 점에서 일견 고개를 주억거리게 하는 계획이다.

    하지만 이르면 3월 대선이 치러질 수 있다는 점을 감안하면, 전직 대통령 예방과 묘역 참배는 너무 느긋한 행보가 아닌가 하는 의문이 제기된다. 반기문 총장 역시 이것을 모를 리 없는데도 이러한 행보를 계획했다는 것은, 다른 복안이 있다고밖에는 볼 수 없다.

    스스로 주도해서 신당을 창당한다기보다는, 이미 역량이 충분히 갖춰져 있는 기성 정치인들이 먼저 창당을 하고 있다보면 자신은 귀국해서 국민통합 행보를 하고 있다가 대권주자로서 '영입'된다는 시나리오가 더 현실성이 있어보인다.

    혹은 그 대상은 굳이 신당이 아니더라도, 이미 기존에 존재하는 정당이 신당(新黨)으로 거듭나는 수준까지 쇄신해서 완전히 탈바꿈하는 경우도 이러한 범주에 넣을 수 있을 것으로 분석된다.

    이와 관련, 국내에서 반기문 총장과 실제로 교감하고 있는 몇 안 되는 핵심 측근으로 알려져 있는 임덕규 〈월간 디플로머시〉 회장의 말은 의미심장하다.

    임덕규 회장은 "정치는 어느 나라든지 프로들이 있다"며 "프로들이 나서면 1년 걸릴 것을 몇 개월 내에 끝낼 수 있는 법"이라고 자신했다.

    김원수 차장이 내한했을 때 만난 인사 중 한 명으로 알려진 새누리당 나경원 의원의 말도 이러한 맥락에서 바라보면 예사롭지 않다.

    나경원 의원은 8일 MBC라디오 〈시선집중〉에 출연해 "(새누리당의) 지도부가 끝까지 퇴진하지 않는다면 생각을 같이 하는 동료 의원들과 비상한 결단을 내릴 수밖에 없다"며 "창당을 말씀드릴 수 있을 것"이라고 천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