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25전쟁 영웅, 심일 소령을 더 이상 욕되게 하지 말라!

    남정옥(전사연구가, 역사학 박사)

  •   심일(沈鎰, 1923-1951) 소령은 대한민국 최고 무공훈장인 태극무공훈장을 받은
    6·25전쟁영웅이다. 태극무공훈장은 전투에서 결정적인 전공을 세우지 않고는
    받을 수 없는 훈장으로, 전쟁의 흐름이나 양상을 크게 바꾼 결정적인 전투에서
    혁혁한 전공을 세운 장병들에게 수여됐다.
    그 중에서도 위관급 장교나 병사들은 감히 살아서는 받을 수 없는 그런 훈장이다.
    구국(救國)을 위한 애국적 전투행위나 극한 상황에서 부하나 동료 그리고 전우를 살리기 위한
    살신성인적(殺身成仁的) 귀감(龜鑑) 행위를 하지 않고는 도저히 받을 수 없는 명예스러운
    훈장이었다. 그래서 그 심사도 엄격했다.
    그런 탓인지 1129일간의 6·25전쟁 중 태극무공훈장을 받은 군인 및 경찰은 191명에 불과하다. 191명의 태극무공훈장 수훈자의 면면을 살펴보면 국군이 73명, 경찰관이 1명, 그리고 미군을
    비롯한 유엔군이 117명이다. 낙동강전선을 지휘했던 워커 장군과 흥남철수작전의 영웅 미10군단장 알먼드 장군도 태극무공훈장 다음인 을지무공훈장을 받았다.
    100만명이 넘는 참전자 중에서 불과 73명만이 태극무공훈장을 받았다는 것은,
    곧 그 훈장이 얼마나 받기 어려운 훈장인가를 말해주고 있다.


      대한민국 제1호 태극무공훈장은 국군이 아니고 유엔군사령관 맥아더 원수이다.
    이승만 대통령은 인천상륙작전을 성공시키고 수도서울을 탈환한 다음, 1950년 9월 29일
    중앙청에서 수도 서울을 반환한 맥아더 사령관에게 대한민국 최초의 태극무공훈장을 수여하며
    그 전공을 치하했다. 제2호는 1951년 2월 중공군 2월 공세 때 횡성전투에서 2사단 31연대장으로 진두지휘하던 중 전사한 박노규 대령(육군준장 추서)이다. 제3호는 전쟁초기 1년 간 대한민국이 가장 어려울 때 육해공군총사령관 겸 육군총참모장(현재 육군참모총장)으로 국난을 타개했던
    정일권 중장이고, 제4호는 낙동강 전선에서 1군단장을 역임하고 이승만 대통령 명령으로 38선
    돌파를 명령했던 김백일 소장이다. 제5호는 낙동강 전선시 2군단장으로 영천전투를 승리로
    이끌었던 유재흥 소장이다. 제6호는 전쟁초기 시흥지구전사령관을 역임하고 지연작전시 1군단장으로서 미 지상군이 참전할 시간적 여유를 제공했던 김홍일 소장이다. 제7호는 낙동강의 다부동전투를 승리로 이끌었던 1사단장 백선엽 준장이고, 제8호는 개전 초기 7사단 1연대장으로 수도 서울의 관문인 동두천-의정부 축선을 담당하다가 창동지역에서 전사한 함준호 대령(육군준장 추서)이다. 제1호부터 제8호까지 태극무공수훈자는 대부분이 장군급 지휘관이고, 연대장으로
    전사한 두 분도 장군으로 추서됐다는 점에서 위관급 장교나 병사들이 받기는 어려운 훈장이라는 것을 쉽게 알 수 있다.  

  •   그런데 제9호 태극무공훈장 수훈자는 소대장이 받았다.
    그 주인공은 바로 춘천전투의 영웅이자 당시 6사단 7연대의 57밀리 대전차포중대 2소대장이던 심일 중위였다. 위관급으로 처음이다.
    미국도 우리의 태극무공훈장에 해당되는 명예훈장(Medal of Honour)이 있다. 6·25때 미국도 136명에게 명예훈장을 수여했는데 장군은 단 한 사람뿐이다. 미24사단장으로 대전 전투이후 철수도중 길을 잃고 방황하다가 포로가 됐던 딘(William F. Dean) 소장뿐이다.
    대부분이 병사들이고, 몇몇 안 되는 장교들도 소대장이 대부분이다. 미국 대통령은 명예훈장
    만큼은 백악관에서 당사자나 가족들에게 직접 수여한다. 이승만 대통령도 6·25때 태극무공훈장 수여자에 대해서는 경무대에서 직접 수여했다. 그만큼 그 훈장은 그 국가의 품격 및 위상과 직결되기 때문이다.     


      심일 소대장은 전쟁 당일인 6월 25일 대전차포를 이끌고 전방으로 나아가 남하하는 북한군 SU-76자주포를 향해 포탄을 쏘아 명중시켰으나 끄떡하지 않자, 5명의 특공대를 편성하여
    수류탄과 사이다병에 휘발유를 넣은 휘발유병을 들고 전진해오는 적 자주포의 궤도를 육탄으로 공격하여 2대를 파괴했다. 그러자 뒤따라오던 적 자주포 8대는 더 이상 남진을 하지 못하고
    황급히 북쪽을 달아났다. 이를 지켜보던 7연대의 보병진지에서는 그 쾌거에 환호성을 질러댔다. 연대지휘소가 있는 우두산에서 7연대장 임부택 중령은 포병대대장 김성(金聖) 소령에게
    “심 중위가 육박(肉迫) 공격으로 전차(당시 자주포를 전차로 오인)를 파괴한 사실은 6·25가 난지 몇 시간이 안 되지만 이것이 처음일 것이며, 우리 장병들은 그때부터 전차를 파괴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갖게 되고 뒷날에도 많은 전차를 고철로 만들었다”고 증언했다.
    6월 27일 심일 중위는 춘천시내로 들어온 적 자주포 1대를 단독으로 파괴했다.
    이로써 그는 적 자주포를 3대를 파괴하는 전공을 세웠다. 결과적으로 춘천전투는 수원 이남으로 진출하여 한강이북의 국군주력의 퇴로를 차단하여 섬멸하려는 북한의 남침공격계획을 좌절시켰다. 심일 중위는 그런 춘천전투에 결정적으로 기여했다.

      이후 심일 중위는 지연작전 중 대위로 진급하여 낙동강 혈전과 인천상륙작전 이후 북진 대열에 참가하여 중대장으로서 맹활약하다가 1951년 1월 26일 강원도 영월지역 전투에서 7사단 수색중대장으로 정찰작전 중 전사했다.
    정부에서는 1951년에 들어서 6·25전공자들에 대한 무공훈장 심의 및 포상에 들어갔다.
    심일 소령도 춘천전투의 전공을 인정받아 1951년 7월 26일 태극무공훈장을 수여받게 됐다.
    그렇지만 그 당시 심일 대위는 이미 전사한 뒤였기 때문에 훈장은 부친 심기연이 부산 임시경무대로 가서 이승만 대통령으로부터 받았다. 심기연은 훈장을 받은 날짜를 정확히 기억하지 못하고 다만 “1951년 부산에서 피난생활을 할 때 장교와 사병이 찾아왔기에 따라가서 이승만 대통령으로부터 태극무공훈장을 받게 됐는데, 그때 비로소 자식이 적 전차를 파괴했다는 사실을 알았다”고 술회했다. 정부에서는 심일 대위에게 태극무공훈장을 수여한 후인 1951년 11월 11일
    소령으로 추서했다. 미국 정부도 심일 소령의 전공을 인정하고 1954년 6월 12일 은성무공훈장을 수여했다.

      심일 중위의 전공은 국방부의 전사에 기록됐다.
    정부에서는 대한민국 입장이 담긴 6·25전쟁 공간사(公刊史)를 쓰기 위해 1964년 국방부전사편찬위원회를 설치하여 이에 대한 연구 및 편찬 작업에 들어가도록 했다. 전사편찬위원회는 6·25전쟁사 작성에 앞서 자료수집과 함께 당시 생존해 있던 참전자들에 대한 증언을 청취하여 이들 자료를 토대로 『한국전쟁사』(총11권)을 편찬했다. 국내외의 다양한 자료와 증언을 분석하여 역사왜곡이나 과장 또는 누락이 없도록 만전을 기했다. 그래도 혹여 잘못이 있을까 염려되어 국방부장관 또는 각군 총장을 역임한 참전원로 및 사계 전문가들로 구성된 자문단을 운용하여 내용의 객관성을 높였다. 이로써 6·25전쟁에 대한민국 정부의 공간사가 탄생했다.
    이 책이 나오자 군은 물론이고 학계로부터 환영을 받았다. 6·25전쟁에 관한 한 가장 권위 있는
    공간사로서 평가를 받았음을 의미한다. 내용에 대해서는 이의가 없었다.
    심일 소령에 대한 전공도 이 공간사에 수록됐음은 물론이다.

      그런데 심일 소령은 어찌된 영문인지 국립현충원에 안장되지 못한 채 위패만 모셔졌다.
    이를 안타깝게 여긴 심일 소령이 육군사관학교 8기 생도시절 중대장이었던 손희선 장군(육군소장 예편, 육사2기)이 뒤늦게 알고 그가 전사했던 영월에 군의 도움을 받아 위령비를 세웠고, 8기 동기생들은 위관장교로 최초로 태극무공훈장을 받은 심일 소령을 기리기 위해 육군사관학교 내에 전공비를 세워 후배들의 귀감이 되도록 했다. 모교인 육군사관학교에서도 2003년도부터 뒤늦게 심일상을 제정하여 매년 우수중대장 14명에게 심일상을 수여하게 됐다.
    이는 베트남전쟁에 강재구상을 제정하여 수여한 것처럼, 6·25전쟁에 심일상을 제정하여 그 정신을 기린다는 의미에서 뜻 깊은 사업이 아닐 수 없다.

      Ⅲ
      그런데 어찌된 일인지 위관급 장교로 최초로 태극무공훈장을 받은 심일 소령의 그동안 공적을 전면 뒤엎은 기사가 《조선일보》를 통해 나왔다. 2016년 6월 17일, 마치 ‘호국보훈의 달’을 비웃기라도 하듯, 〈北 탱크를 부순 ‘호국영웅’의 불편한 진실〉이라는 제하의 ‘최보식 칼럼’이 세인을 놀라게 했다. 인터뷰 기자로 명성을 떨치고 있던 최기자는 6·25참전 원로의 한 분인 이대용 장군이 “우리 군은 과거에 저지른 허위 날조의 오류를 과감하게 바로잡아 정도(正道)를 당당히 걸어가야 한다”는 말과 함께 “춘천전투에서 심일 소대장은 육탄돌격이 아니라 도망을 갔고, 대전차포
    1문을 적에게 넘겨줘 문제가 되자 중대장은 격노해 총살감이라고 상부에 보고했고, 훈장은 심일 부모가 찾아와 연대장에게 하소연하여 받게 해 줬고, 7사단 중대장 보직도 심일을 영웅으로 만들기 위해 조작된 것”처럼 보도했다.
    뒤이어 최기자는 6개월 뒤인 12월 2일 〈北 탱크를 부순 ‘호국영웅’의 불편한 진실, 그 뒤〉라는 제하의 칼럼에서 자신의 6월 기사를 육군군사연구소의 자료를 통해 다시 입증하는 형식의 기사를 썼다. 그 과정에서 최기자는 육군군사연구소의 ‘올바른 일’에 국방부와 군사편찬연구소가 마치 상급기관으로서의 위세를 빌어 ‘제동’을 거는 듯한 인상의 글을 썼다.

      하지만 최기자의 주장은 전반적으로 심일 소령의 전공을 부정하는 6월의 기사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하긴 최기자는 “심일의 공적내용이 사실이 아니다”라는 것에서 출발하고 있다고
    전제했다. 최기자는 국방부의 과거 기록을 믿지 않겠다는 의도다. 그리고 이대용 장군의 말은
    무조건 믿겠다는 심산이다. 이 무슨 황당한 일인가.
    국가의 기록은 믿지 않고 증언자로서 갖추어야 할 3요소, 즉 역사의 현장에 있었는가, 역사의
    인물과 직접 관계가 있는가, 직접 보았는가?에 해당되지 않는 이대용 장군의 말만 믿겠다니.
    또한 그것을 입증할 자료도 증언자도 명확치 않는 것을 것을 가지고 어떻게 그리 당당하게
    나온 것인지 그 저의가 자못 의심스럽다.  

      심일 소령에 관한 국방부의 6·25전쟁 기록은 최초 연구 편찬단계에서 이대용 장군이 제기했던 그런 문제점을 검토한 결과물이라는 것을 먼저 지적한다. 이대용 장군이 최기자에게 제보한 ‘증언’ 내용은 과거의 내용을 전면 부정한다는 점에서 쇼킹할 내용일지는 모르나, 혼자만의 주장이라는 점에서 역사자료로 채택하기에는 처음부터 객관성이 결여됐다고 할 수 있다. 이대용 장군은 전쟁 당일 심일 소령과 전투현장에도 없었고, 같은 부대도 아니고 직속 상관도 부하관계도 아니었다. 그는 다만 2km가떨어진 곳에서 심일의 전투장면을 봤을 뿐인데 어떻게 그렇게 옆에서 본 것처럼 말할 수 있는지. 그것도 이제까지 가만있다가 관련자가 모두 사망한 다음에 그런 문제를 제기하는지 의아스럽기만 하다.
    최소한 역사에서 증언을 채택할 때는 같은 현장에 있는 세 사람의 말이 동일했을 때 채택하는 것이 상론(常論)이다. 심일 소령을 증명할 수 있는 증인들은 거의 없다고 봐야 한다. 왜냐하면 당시 증언할 수 있는 사람들은 낙동강전선과 북진시 중공군 공격으로 대부분 전사했다. 더군다나 70년이 다 되어 간 그때의 일을 그렇게 소상하게 기억하고 있다는 것이 신기할 뿐이다. 그런 점에서 소속도 다르고 전투현장에도 없었고, 전해들은 말들을 가지고 기사를 쓴 조선일보의 기사는 더욱 신뢰가 가지 않는다.

    역사의 현장에 없었던 ‘누군가의 증언’은 증언으로서 전혀 가치가 없다.
    더구나 전해들은 말, 누군가에게 들은 말은 더욱 신뢰할 수 없다.   
    6·25전쟁에서 특공대는 목숨을 걸고 위험을 임무를 수행했다.
    주로 일반장병들이 하기 어려운 적 전차나 토치카 등을 육탄공격을 할 때 편성했다.
    그렇게 해서 수없이 많은 국군장병들이 조국을 위해, 때로는 부대와 전우를 위해 산화했다.
    심일 소령도 적 자주포를 육탄으로 공격할 때는 마찬가지였다. 적진 가까이 가서 2대를 파괴하고는 신속히 후퇴하는 것이 상례다. 이때 임부택 연대장은 “심일 중위가 끌고 갔던 대전차포 1문이 진흙 속에 빠져 포기하고 그대로 철수했다”고 증언한데 반해, 이대용 장군은 포 1문을 유기한 채 도망갔다“고 전언하고 있다. 여기서 우리는 누구의 말을 믿어야 할까.

    당시 임부택 중령이 있는 연대지휘소는 이대용 장군이 있는 고지보다 더 가까이 위치해 있었다. 그리고 태극무공훈장은 1951년부터 수여했다. 그런데 전투지역에 어떻게 부모님이 연대장에게 찾아갈 수 있으며, 또 읍소한다고 해서 태극무공훈장을 연대장 수준에서 줄 수 있는 훈장인가?
    태극무공훈장은 1950년 12월 23일 순직한 미8군사령관이나 흥남철수작전시 피난민 10만명을
    구한 미10군단장 알먼드 장군도 못 받은 대한민국 최고의 훈장이다.

      최기자는 이제라도 당시의 정황과 증언 및 자료의 신뢰성에 대해 검토해야 한다.
    6·25전쟁사를 연구, 편찬하기 위해 설치된 국방부전사편찬위원회의 『한국전쟁사』는 왜 신뢰하지 않은가. 육군군사연구소가 70년대 중반에 심일 전공을 나타내는 자료가 없다고 하는데 1951년에 작성된 1차 사료인 국가기록원에 있는 《태극무공훈장부》(심일 편)은 왜 보지 않고, 언급하지도 않을 북한자료까지 봤다고 하는가? 증언이 될 수 없는 자, 참고가 되지 않는 자료들, 얼토당토 않는 북한자료로 이 문제를 해결하려고 하는지 이해가 가지 않는다.
    특히 현장에 있지도 않았던 이대용 장군의 말은 철석같이 믿으면서, 왜 대한민국 정부의 공식문서인 태극무공훈장부나 국방부의 공간사는 믿으려고 하지 않은지? 그런 모습이 안타깝기만 하다.
      역사에 ‘불편한 진실’ 같은 것은 없다. ‘사실(fact)’과 ‘사실 아닌 것’만 존재할 뿐이다.
    그리고 그 사실 속에는 산자와 죽은 자, 희생한 영웅들의 모습만이 결과와 함께 존재할 뿐이다. 더 이상 전쟁영웅인 심일 소령을 ‘욕’되게 해서는 안 된다.
    조선일보는 의도적이든 아니든 간에 6월 호국의 보훈의 달에 심일 소령의 전공을 부인하는 내용에 대해 검증과정을 거치지 않고 단 한 사람의 신뢰할 수 없는 ‘증언’만 듣고 욕되게 했고, 이어 12월에 다시 그 상처에 소금을 뿌리는 ‘역사적 가해행위’를 범했다.
    더 이상 검증되지 않은 한 사람의 말만 듣고 심일 소령의 전공을 폄하하거나 욕되게 해서는 안 될 것이다. 자유민주주의 체제의 대한민국 정체성을 위해 산화한 심일 소령을 비롯한 호국영령들을 더 이상 욕되게 하지 말자. 〈끝〉
     
     

    심일 소령(육군사관생도시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