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헌 4년만에 대통령 직선제 헌법 탄생...이승만 "민중이 이룩한 무혈혁명"
  • [연재] 이승만史(1) 부산정치파동 계엄40일만에 직선제 개헌전쟁 승리

    고독한 대통령의 1인 투쟁...마침내 야당이 무릎꿇다 ‘개헌 성공’

    인 보길 /뉴데일리 대표, 건국이념보급회 회장
  • 국회의원 출석 권유 금족회의 보도. 52.7.4일자 동아일보ⓒ동아DB
    ▲ 국회의원 출석 권유 금족회의 보도. 52.7.4일자 동아일보ⓒ동아DB
    드디어 마지막 무대의 막이 올랐다.
    대통령 이승만이 총연출 하는 ‘직선제 드라마’의 무대 부산 임시국회는
    이틀 동안 유회(流會)를 거듭하다가 3일 점심때서야 성원을 채울 수 있었다.

    비상계엄 직전에 이승만이 캐스팅한 개헌내각 국무총리 장책상이
     뒷날 ‘발췌개헌의 1등공신’으로 불린 평가에 걸맞게
    다재다능한 정치수완을 유감없이 발휘한 덕분이었다. 
    꼭 한달전 이승만에게 제출했던 ‘절충안’을 손질하여 원내 조직 신라회와 삼우장파등을 통하여
    직선제 지지세력을 확장한 결과, 이제 재적의원 3분의 2를 넘는 숫자를 확보하게 되었다.

    문제는 지지서명을 하고서도 안나오는 의원들을 출석시키는 일인데
    등원한 의원들이 이 문제를 앞장서 해결해주었다.
     “결석자 명단을 공개하라” “경찰을 동원해서라도 끌어내라”는등
    국회의원들이 ‘중앙방송’을 통하여 국회출석을 독려하였고
    신문들도 호외까지 발행하여 거리에 뿌렸다.
    호외내용-[2일 국회 비밀회의에서는 중대시국을 타개코자 오늘부터 철야로 속개중인데
    출석하지 않는 의원에 대하여는 국립경찰관으로 하여금 국회의사당까지 안내토록 했으니
    이를 양찰하고 의원은 빠짐없이 출석하기 바란다]

    이리하여 국회에 등원한 의원들은 비공식회의를 계속하면서 성원이 될 때까지 모두 기다리기로 하였던 것이다. 직선제 찬성파는 하루 빨리 ‘절충안’을 확정짓고 싶었기 때문이다.
    이범석 내무장관은 국회의 요구에 따라 경찰을 동원하여 숨어 지내거나 계엄지역 밖으로
    돌아다니는 의원들을 찾아내어 부산 국회로 안내하는 일을 독려하였고,
    공보처에서는 밤 새우는 의원들을 위하여 식사와 간식, 담요등을 제공하였다.
    바둑을 두고 술도 마시는 의원들은 손바닥에 도장을 찍고 출입시켜 의원들이 도망가지 않도록
    단속까지 하였다고 한다. 이 단속을 맡은 이가 삼우장파 남송학(南松鶴)의원,
    체구가 건장한 그는 그때부터 ‘국회 수문장’이란 별명으로 불리기도 했다.
  • 구금의원들 석방 국회로, 밤의 의사당 스케치 보도. 52.7.5일자 조선일보ⓒ조선DB
    ▲ 구금의원들 석방 국회로, 밤의 의사당 스케치 보도. 52.7.5일자 조선일보ⓒ조선DB
     
    ▶구속의원들 석방, 본회의에 합류...“미군정 보다야 이승만 통치가 낫지”

출입문도 닫아걸고 비공개로 전원위원회(국회의원전원 참석회의)를 열고 있던 의사당에
갑자기 10명의 의원들이 나타났다. 5월26일 계엄령과 함께 버스로 끌려갔던 의원들이다.
‘국제공산당의 비밀자금을 받아 장면을 대통령으로 선출하기 위해' 정부혁신위원회를 조직했다는 혐의로 구속 수사 받던 이들이 나오자 회의하던 의원들은 박수를 치고 환영하였다.
한 의원은 “경찰이 여기까지 데려와서 석방이라 하니 석방된 줄 알았다”고 말하며
“그동안 조사도 받지 않았고 기소도 않고 잡아두니 무슨 영문인지 몰랐다”고 투덜거렸다.
또 다른 의원들은 “국사의 토론에 참여시키기 위해 가석방해 준 것”이란 설명을 들었다고 했다.
결국 이승만은 ‘미국의 장면 대통령 만들기’ 음모를 깨부수고 나자
이들을 개헌과정에 동참시킴으로써 직선제헌법의 정통성 강화와 함께
사후 반헌법 소동을 사전에 예방하는 조치를 취한 것이었다.
개헌후 이들 구속의원들이 몇 차례 공개재판을 거쳐 모두 공소취하로 방면된 것을 보아도
이승만의 숨은 뜻은 짐작하고도 남는다. 

모처럼 국회는 127명의 성원으로 전원위원회란 이름에 걸맞는 본회의를 진행하였다.
안건은 세 가지, 야당의 내각제 개헌안과 정부의 직선제 개헌안, 그리고 절충안이다.
이들을 각각 심의하는 것은 번거롭고 불필요한 것으로 합의한 회의는
신라회가 내놓은 절충안을 놓고 어떻게 수정할 것인가 논의를 거듭하였다.

등원한 국회의원들은 절충안의 ‘대통령 직선제’ 조항에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이 없었다.
지난 한달 넘게 겪고 듣고 느낀 정치파동의 결과는 뻔한 것, 어느 새 그들의 속마음엔
“미 군정보다야 이승만 대통령의 계속집권이 백번 낫지 않느냐”는 인식이 자리잡았다.
시비꺼리는 국회의 국무위원 불신임권과 정부의 국회 해산권 문제였다.
소위원회의 논란을 거친 후 각파 대표들의 협상이 지루하게 이어졌다.
창밖엔 오늘도 비가 내리는 장마철, 국회는 오랜만에 진지한 열기에 휩싸여갔다.
  • 무초 미국대사와 장면 총리. 미국은 장면을 대통령으로 간접선거하려던 계획을 막판에 포기하였다.(자료사진)
    ▲ 무초 미국대사와 장면 총리. 미국은 장면을 대통령으로 간접선거하려던 계획을 막판에 포기하였다.(자료사진)

  • ▶미국 대사의 최후통첩 “미국은 한국국회를 더 이상 지지 못하오” 

    7월4일 오후, 국회부의장 김동성의 방은 또 다른 긴장감에 무겁게 갈아앉았다.
    민국당과 원내 자유당등 내각제개헌파가 막다른 골목에 몰려 마지막 결단을 내리는 순간.
    내각제를 끝내 포기해야 하느냐, 발췌개헌안 표결에 응해야 하느냐 등등
    저마다 일장연설로 선명경쟁을 하는 듯, 그러나 이들의 속내도 대세는 이미 결판나서
    결론도 뻔한 것을 알면서도 누가 먼저 결말을 낼까 미루는 묘한 심리전을 벌이는 회의였다.
    처음 서명자는 123명이건만 지금 남은 의원은 65명으로 반토막, 58명이나 돌아서 않았는가.
    그들은 조병옥을 기다리는 듯 연신 출입문을 쳐다본다.
    민국당 사무총장 조병옥은 미국대사 무초를 만나러 갔다.
    소문만 무성한 ‘유엔군 계엄령’도 감감, 미국의 속내를 마지막으로 확인하려는 것이다.

    오늘은 미국 독립기념일, 해마다 대사관에서 초저녁 축하파티가 열리는 날이다.
    조병옥은 무초에게 연락하여 축하연을 하는 지, 그리고 참석해도 좋은지를 물었다고 한다.
    미국이 금명 비상조치를 내린다던데 과연 그런지 어떤지 기대감에서 찔러 본 것이었다.

    “축하연은 열린다. 정세는 이미 기울었지만 축하연에 참석하는 건 무방하지 않겠느냐”
    정세가 기울었다고? 무초의 주저없는 대답에 조병옥의 충격은 컸다.

    무초는 이 날의 상황을 20년뒤 어느 기자와 회고 인터뷰에서 다음과 같이 전한다.
    “그날 오후 4시 반쯤 조병옥이 다른 두 사람과 함께 우리에게 와서
    ”정부관계자들이 오기전에 축하인사 하러 왔소“라고 말했다.
    나는 음료수를 들면서 그 일행과 잠시 환담하였다. 조병옥은 나를 옆으로 끌고 가더니
    “오늘 아침 클라크 장군이 발표한 성명은 이승만에게 더 이상 기대를 않겠다는 뜻이냐?”고
    물었다. 나는 “미국은 할 말이 있으면 분명하게 하니까 그런 추측은 필요없을 거요”라고
    말해 주었다. 조병옥은 “잘 알았소” 인사하고 자리를 떴다.
    이승만에 대한 기대란 클라크의 압력으로 계엄을 해제하는 것임은 물론이다.

    그날 아침 클라크가 무슨 성명을 발표하였는지는 언론에 보도되지 않아 알 수가 없다.
    다만 무초는 회고담에서 클라크에 대애 묵은 불만을 다시 한번 쏟아내고 있다.
    “클라크는 이승만이 일선의 군인들을 방해하지 않는 한, 무슨 짓을 하든지 상관하지 않는 것
    같았다. 달리 말하면 우리(미국무성)의 행동은 정말 비생산적이었다.
    이승만이 개헌을 단념하도록 하지 못한 우리의 실패나 이승만의 성공적인 저항 때문에....
    조병옥과 그의 그룹은 이승만을 교체시키려는 운동을 미국이 돕거나 적어도 너그럽게
    돌봐주리라고 믿었던 것이다.”
    대리대사였던 강경파 라이트너도 그날 ‘미국의 후퇴를 전했다’는 회고담을 남겼다.
    “나는 7월4일 축하연에 나온 육군참모총장과 국회의장에게
     ‘미국은 더 이상 한국 국회를 지지할 준비가 돼 있지 않다고 말했다.
    그것으로 국회는 이승만에 대한 싸움을 포기하였다.”
    그때까지 육군참모총장이던 이종찬과 신익희 국회의장은 또 어떤 충격을 받았을까.
  • 조병옥 의원 (자료사진)
    ▲ 조병옥 의원 (자료사진)
    민국당이 기다리는 회의장에 조병옥이 무슨 말을 전했는지는 알려진게 없다.
    무초의 최후통첩, 건국 이래 4년간 미국을 믿고 이승만을 밀어내려 싸워 왔건만
    미국으로부터 청천벽력 같은 소리를 듣는 순간 민국당은 맥없이 무릎을 꿇고 말았다.
    한바탕 울분을 터뜨린 이들이 회의장을 나서자 기자들이 몰려들었다. 
    “책임정치를 위해 버텨왔으나 별다른 도리가 없다는 결론에 도달하였다.
    우리는 통곡 속에서 이런 결정을 내렸다. 기왕 발췌개헌안에 찬성하기로 한 이상
    조건없이 표결에 참여한다.” 짧막한 즉석 발표를 한 이들은 의석으로 향하였다.

    이것으로 표결하나마나, 내각제 개헌파가 ‘항복’을 결정하였으니 사태는 끝났다.
    1952년 7월4일 부산의 미국독립기념일 축하파티는 이렇게 해서
    부산정치파동의 폐막을 고하는 행사가 되었다.
    무초와 라이트너의 ‘통첩’에 민국당이나 육군참모총장은 ‘외세의 힘’을 잃고 주저앉았다.
    내각제 개헌도 쿠데타 음모도 미국의 한마디에 이슬처럼 증발하고 말았으니,
    미국은 ‘공모자’가 아니라 한국 야당의 상전이었단 말인가. 
    미국 독립기념일은 한국의 정치적 독립에 큰 힘을 보태주는 결과가 되었다.

    건국때 미뤄졌던 직선제 헌법 탄생...‘발췌조항’ 기립표결로 통과
  • 부산 피난국회에서 기립표결로 발췌개헌 조항에 찬성하는 국회의원들.(자료사진)
    ▲ 부산 피난국회에서 기립표결로 발췌개헌 조항에 찬성하는 국회의원들.(자료사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