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실기업 사들여 구조조정·정리해고한 뒤 되파는 ‘턴어라운드’ 전문가
  • 美45대 대통령 당선자 도널드 트럼프가 윌버 로스 상무장관 후보와 이야기를 마친 뒤 언론 앞에 섰다. ⓒ뉴시스-AP.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 美45대 대통령 당선자 도널드 트럼프가 윌버 로스 상무장관 후보와 이야기를 마친 뒤 언론 앞에 섰다. ⓒ뉴시스-AP.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美‘워싱턴포스트(WP)’는 지난 24일(현지시간) 도널드 트럼프 美45대 대통령 당선자가 상무장관으로 ‘윌버 로스’를 지명할 것이라고 트럼프의 측근들을 인용해 보도했다.

    美‘워싱턴포스트’는 “트럼프는 지난 20일(현지시간) 뉴저지 베드민스터에 있는 트럼프 내셔널 골프클럽에서 마이크 펜스 부통령 당선자와 함께 윌버 로스를 만났다”면서 “윌버 로스는 트럼프 당선자의 경제자문 역할을 맡아 수백만 달러의 선거자금을 모았고, ‘오바마 케어’ 폐지와 ‘북미자유무역협정(NAFTA)’ 등의 FTA를 비판하는 목소리를 냈다”고 전했다.

    ‘윌버 로스’의 美상무장관 내정 소식에 국내 언론들은 그의 경력에 대해 다양한 소식을 전했다.

    국내 언론들은 “윌버 로스는 로스차일드 회장 출신으로, 자신의 이름을 딴 사모펀드 ‘WL 로스&컴퍼니’를 운영하는 월스트리트 투자자로, 기업사냥꾼, 파산의 왕 등의 별명으로 불리고 있다”면서 “1997년 말 한국의 외환위기 당시 국제 채권단과의 협상 자문 및 중재역을 맡았고, 외환위기 극복 이후 한국 정부로부터 표창까지 받았다”는 내용을 주로 전했다.

    하지만 국내 언론들 대부분은 ‘윌버 로스’가 자신의 ‘사모펀드’를 만들 수 있었던 계기가 ‘한국 외환위기’였다는 이야기는 하지 않고 있다.

    1937년 11월생으로 올해 78살인 ‘윌버 로스’는 뉴저지에 살던 변호사인 부친과 교사인 모친 사이에서 태어났다. 가톨릭계 고교를 졸업한 뒤 예일대, 하버드 MBA에서 공부했다. 24살 때 로스차일드 뉴욕 지점에 취직했다. 이후 능력을 인정받아 사실상 본점인 영국 로스차일드로 자리를 옮겼다.

    ‘윌버 로스’는 1997년 11월 한국 정부가 국제통화기금(IMF)에 구제금융을 요청한 뒤 ‘골드먼 삭스’와 같은 투자은행과 함께 한국에 들어 왔다. 이때 ‘윌버 로스’는 로스차일드 영국 본사인 ‘NM 로스차일드’의 대표이사로 재직 중이었다.

    로스차일드 가문의 투자은행에서 전문경영인으로 근무하던 ‘윌버 로스’는 한국이 외환위기에 빠지자 ‘누군가’의 요청을 받아 한국에 왔다. ‘윌버 로스’는 이후 DJ정권의 ‘산업구조조정’을 사실상 주도하면서 ‘흑자도산’한 국내기업들을 해외자본에 헐값으로 팔아넘기는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당시 업계에서는 “DJ정권 핵심 관계자들을 등에 업은 ‘윌버 로스’가 한강구조조정기금, 아리랑구조조정기금, 서울구조조정기금, 아리랑구조조정기금에 투입된 정부 공적자금을 활용해 막대한 수익을 올렸다는 소문이 파다했다.

    일설에 따르면, 당시 4대 구조조정기금을 총괄 관리하던 산업은행마저 그에게는 꼼짝 못했다고 한다. 때문에 ‘검은머리 외국인’을 앞세운 외국계 투자은행이 한국 금융계를 좌지우지하게 됐다고 한다.

    이에 DJ정권 당시 국내 금융계와 산업계를 좌지우지했던 금융감독원과 국내 경제부처들은 “그런 사실은 어불성설”이라며 관련 내용을 부인했다. 이 과정에서 국내 언론에서는 ‘윌버 로스’가 한라그룹 구조조정을 주도, 막대한 이익을 올렸고, 당초 “10억 달러의 외자를 유치하겠다”던 약속도 지키지 않았다고 비판했다.

    하지만 DJ정권은 언론들의 지적을 무시했다. 오히려 DJ정권은 2000년 11월에는 “외환위기 극복”을 선언한 뒤 ‘윌버 로스’에게 훈장을 수여하기도 했다.

  • 세계 채권시장에 대해 설명하기 위해 뉴스에 출연한 윌버 로스. ⓒ美CNBC 스쿽크 박스 화면 캡쳐
    ▲ 세계 채권시장에 대해 설명하기 위해 뉴스에 출연한 윌버 로스. ⓒ美CNBC 스쿽크 박스 화면 캡쳐


    한국 정부와 언론의 ‘수준’을 직접 본 ‘윌버 로스’는 2000년 ‘NM 로스차일드’를 그만두고 그동안 벌었던 돈에다 투자자들의 돈을 모아 직접 사모펀드를 만든다. 이곳의 이름이 ‘WL 로스&컴퍼니’다. 창업 초기 자산은 4억 4,000만 달러였다.

    ‘윌버 로스’는 이후로도 계속 한국에서 ‘작업’을 벌인다. DJ정권 말기인 2002년 1월에는 현대투자신탁을 美금융그룹 AIG가 주도하는 컨소시엄에 매각한다면서, 매각 주간사를 자신이 직접 맡는 등 국제금융계의 관행과는 다른 행태를 보이기도 했다. 한국 금융당국이 뒤늦게 문제를 제기한 뒤에는 발을 빼고 철수했다.

    ‘윌버 로스’는 ‘WL 로스&컴퍼니’를 통해 주로 ‘턴어라운드’ 작업을 했다. 위기에 빠진 기업을 인수한 뒤 구조조정 및 정리해고, 사업구조 개선을 통해 가치를 높인 뒤 다시 되파는 것이다.

    그는 LTV코퍼레이션, 베들레헴 철강 등을 인수한 뒤 구조조정을 거쳐 인도 ‘미탈 그룹’에 팔아 큰 이익을 올리기도 했다. 2007년 4월 中공산당의 美서브프라임모기지 채권 투매로 시작된 2008년 세계금융위기 당시에는 ‘뱅크 유나이트’ 등 미국과 유럽의 파산한 은행을 인수, 구조조정한 뒤 되팔아 차익을 남겼다.

    ‘윌버 로스’는 현재 ‘WL 로스&컴퍼니’ 산하에 ‘국제철강그룹’ ‘국제석탄그룹’ ‘국제자동차부품그룹’ ‘국제섬유그룹’ 등을 거느린 재벌이 됐다. ‘포브스’가 평가한 2014년 기준 재산은 290억 달러에 달한다. 하지만 그가 재산을 불린 종자돈은 사실 한국에서 벌었다는 것이 업계의 평가다.

  • 1998년 2월 청와대를 찾아 김대중 당시 대통령과 만난 윌버 로스. ⓒE히스토리 관련사진 캡쳐
    ▲ 1998년 2월 청와대를 찾아 김대중 당시 대통령과 만난 윌버 로스. ⓒE히스토리 관련사진 캡쳐


    ‘윌버 로스’는 정치적 활동도 활발히 했다. 루돌프 줄리아니가 뉴욕 시장일 때 공기업 민영화 사업의 자문을 맡았으며, 클린턴 정부 당시부터 한동안은 美민주당 당원으로 활동했다.

    ‘윌버 로스’의 월스트리트 인맥 또한 만만치 않다. 하지만 주류 투자은행보다는 기업 사냥꾼으로 유명한 ‘칼 아이칸’과 같은, 공격적 M&A 전문가와 친분이 두텁다. 특히 그를 트럼프에게 상무장관으로 추천한 사람이 ‘칼 아이칸’이라는 소문은 계속 흘러나오고 있다.

    ‘칼 아이칸’은 1936년생으로 ‘윌버 로스’보다 한 살 많다. 1980년대부터 최근까지 주식 가치가 적정 수준이 아니다 싶은 기업이라면, 그 지분을 매수한 뒤 다양한 방법으로 수익을 올렸다. 한국의 경우 KT&G가 그의 먹잇감이 된 적이 있다.

    아무튼 ‘윌버 로스’가 美상무장관이 된다면, 이는 한국과 일본, 중국 등에는 상당히 불리한 정책을 내놓을 가능성이 높다. ‘윌버 로스’는 자본이익과 기업의 효율성, 주주의 가치에 대해 절대적으로 신봉하는 모습을 보인다. 그가 만약 ‘미국의 이익’을 핵심목표로 정책을 펼친다면, ‘호혜관계’를 바탕으로 한 미국과의 양자 무역 관계는 크게 줄어들 가능성이 높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