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업화와 민주화 동시에 이뤄낸 정당으로서 책임감 갖고 비상체제 수립해야
  • ▲ 지난 24일 2017년도 예산안 시정연설을 위해 국회를 찾았던 박근혜 대통령이 새누리당 이정현 대표와 함께 본회의장을 나서고 있다. ⓒ국회 사진공동취재단
    ▲ 지난 24일 2017년도 예산안 시정연설을 위해 국회를 찾았던 박근혜 대통령이 새누리당 이정현 대표와 함께 본회의장을 나서고 있다. ⓒ국회 사진공동취재단

    제(齊)나라를 패업으로 이끈 명재상 관중(管仲)이 병이 깊어 자리에 누웠다. 제환공이 몸소 문병을 왔다가 "중보(仲父)의 병이 이렇게 깊은 줄 몰랐다"며 놀랐다.

    사경을 헤매는 관중을 바라보다가 제환공은 어렵게 입을 열어 "중보가 일어나지 못하면 직책을 누구에게 맡기면 좋겠느냐"며 "공손습붕(公孫隰朋)은 어떻겠느냐"고 물었다.

    그러자 관중은 가느다란 목소리로 "습붕은 무던하다"면서도 "하늘이 습붕으로 하여금 관중의 입(舌) 노릇을 하게 했는데, 이제 내가 죽으면 입만 오래갈 수 있겠는가"라고 한탄했다.

    관중이 죽자 제환공은 공손습붕을 재상으로 삼았는데, 채 한 달이 지나지 못해 습붕도 죽고 말았다. 관중의 입(舌)인 대변인 격으로 오래 활동했던 공손습붕은 끝내 재상으로서 역량을 펼칠 시간을 얻지 못했다.

    지난 두 차례의 대선에서 정권을 창출했던 새누리당이 최대 위기를 맞았다. 28일 발표된 여론조사 전문기관 〈한국갤럽〉의 정당 지지도 조사에서 새누리당은 26%에 그쳐, 29%를 얻은 더불어민주당에 뒤처졌다. 갤럽 여론조사에서 새누리당의 지지율이 민주당에 추월당한 것은 처음 있는 일이다.

    미증유의 위기를 8·9 전당대회를 통해 선출된 이정현 지도부가 헤쳐나갈 수 있을까. 당면한 위기를 극복하고 반전의 계기를 만들어갈 수 있을까.

    이정현 대표는 오랫동안 새누리당과 그 전신인 정당에서 당직자로 생활했지만, 여야 정치권과 국민들 사이에서는 박근혜 대통령의 대변인 격, 다시 말해 '입'이라는 이미지가 강하다.

    2004년 한나라당 박근혜 대표 시절 수석부대변인으로 발탁된 이래, 이정현 대표는 줄곧 과묵한 박근혜 대통령의 입장을 대변해오는 역할을 했다. 2008년 18대 총선에서 비례대표로 국회에 입성한 뒤에도 당시 사실상의 차기 대권 주자였던 박근혜 대통령의 '개인 원내대변인'으로 활동했다.

    이러한 인연은 박근혜 대통령이 당선된 뒤 함께 청와대로 들어가 홍보수석을 맡게 되면서 꾸준히 이어졌다.

    이러한 이정현 대표에게 2014년 7·30 보궐선거에 이어 올해 8·9 전당대회는 정치인으로서 '홀로서기'를 할 천재일우의 기회였다.

    7·30 보선을 통해 험지 중의 험지인 전남 순천에서 당선되며 당원과 국민들에게 자신의 이름을 각인한 이정현 대표는 올해 4·13 총선 이후 전국을 순회하는 '배낭 토크'에 나섰다. 그 여세를 몰아, 물론 물밑에서 친박계의 지원이 있었지만, 이정현 대표는 8·9 전당대회에서 극적인 승리를 이끌어내며 마침내 집권여당 당대표의 자리에 올랐다.

  • ▲ 최순실 게이트 파문으로 새누리당이 혼란에 빠진 27일 열린 최고위원회의에서 이정현 대표와 정진석 원내대표가 대화를 나누던 중 무언가에 대해서 이견을 갖는 듯한 모습을 보이고 있다. ⓒ뉴데일리 이종현 기자
    ▲ 최순실 게이트 파문으로 새누리당이 혼란에 빠진 27일 열린 최고위원회의에서 이정현 대표와 정진석 원내대표가 대화를 나누던 중 무언가에 대해서 이견을 갖는 듯한 모습을 보이고 있다. ⓒ뉴데일리 이종현 기자

    '섬김의 리더십'을 표방하며 국민만 바라보고 가겠다고 천명했다. 그런데 불과 3개월도 되지 않아 '최순실 게이트'라는 거대한 암초를 맞닥뜨렸다.

    아직 박근혜 대통령의 '입'이라는 이미지를 벗지 못한 상태에서 "나도 연설문을 쓸 때, 친구에게 물어보기도 한다"는 말은 신중치 못했다. 박근혜 대통령의 정치적 생명이 경각에 달린 것은 곧바로 입(舌)인 이정현 대표의 위기가 됐다. 관중과 공손습붕의 정치적 관계와 같은 모양새다.

    이정현 대표의 입장에서는 억울할 수도 있다. 역량을 펼쳐볼만한 최소한의 시간조차 주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지금 당면한 위기 국면은 차분하게 현 지도부에 시간을 줄 여건이 되지 못한다는 지적이다.

    새누리당 정병국 의원은 28일 CBS라디오 〈뉴스쇼〉에 출연해 "그분(이정현 대표)은 정무수석도 하고 홍보수석도 하지 않았느냐"며 "의총 중에 많은 의원들이 당 지도부도 책임을 지고 물러나라고 했는데도 '추인을 받았다'고 하는데, 잘 봐야 한다"고 경고했다.

    그러면서 "지금 현재보다 당이 더 어려운 상황이 있을 수 있겠느냐"며 "5년 전에는 지금보다 어렵지 않은 상황이었는데도 박근혜 대통령 본인이 비대위원장을 맡아 극복했던 경험이 있다"고 말했다.

    정병국 의원의 말대로, 지금은 현 여권이 맞이한 최대 위기였다는 2004년 탄핵 광풍(狂風)보다도 훨씬 큰 위기다. 2004년 탄핵 광풍 때는 그래도 한나라당이 121석을 거뒀다. 지금 새누리당 의석은 129석다. 지난 4·13 총선에선 탄핵 광풍 같은 큰 악재가 없었는데도 탄핵 때와 별반 다를 바 없는 의석을 얻은 것이다.

    그리고나서 지금 '최순실 게이트'라는 악재가 더해졌다. 이대로라면 내년 12월 19대 대선의 전망은 극히 어두울 수밖에 없다. "의원회관 민주당 소속 의원실에서는 지금 누가 내년에 청와대에 따라 들어가느냐를 놓고 벌써부터 다툴 정도"라는 새누리당 의원의 푸념이 헛말이 아니다.

    자유민주주의 체제에서 정권의 교차 수권은 당연히 있을 수밖에 없는 일이지만, 수권 세력이 하필이면 친노·친문패권주의 세력이라면 무슨 일이 일어나게 될까.

    애써 해산해놓은 구 통진당 세력 등은 다시 살아나 활개를 칠 우려가 높다. 당연히 일관성 있는 대북 정책을 유지하는 것도 불가능하다. 1997년 '고난의 행군' 시절 위기에 봉착했던 북한 체제가 우리의 정권교체로 달러가 흘러들어가면서 기사회생했듯이, 위기의 김정은 체제도 '사전결재' 세력이 남쪽에 들어서면 이에 기대서 살아날 가능성이 높다.

    대외적으로는 사드(THAAD·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 배치 백지화 등으로 혈맹이자 전통적 우방인 미국과 마찰을 빚게 될 우려가 있다. 새 정권이 친중사대주의로 경도되면, 중국에 정치·경제적으로 점차 예속되는 핀란드화(Finlandization) 현상이 심화될 것이다.

  • ▲ 국회 본회의장에서 대화를 나누고 있는 새누리당 김무성 전 대표최고위원과 유승민 전 원내대표. ⓒ뉴데일리 이종현 기자
    ▲ 국회 본회의장에서 대화를 나누고 있는 새누리당 김무성 전 대표최고위원과 유승민 전 원내대표. ⓒ뉴데일리 이종현 기자

    '다시 야당으로 전락해서는 안 된다' '잃어버린 10년을 되풀이해서는 안 된다'는 위기감에 휩싸여 있던 2012년 때의 결의 자세가 필요하다는 지적이다. 정병국 의원도 언급했듯이 당시 새누리당은 당권~대권 분리 원칙을 과감히 저버리고, 차기 대권 주자였던 박근혜 대통령을 비대위원장으로 선임했다.

    박근혜 위원장은 기대를 저버리지 않고 민주통합당과 구 통진당이 담합해 맞선 19대 총선을 정면 돌파해 152석 단독 과반을 확보한 뒤, 여세를 몰아 18대 대선을 승리했다.

    지금이 그 때보다 더욱 비상한 상황이면 비상한 상황이지, 결코 덜한 상황이 아니다. 비상한 상황에서는 비상한 수단이 필요하다.

    연내 비상대책위원회 체제로의 전환이 불가피할 것으로 보이는 가운데, 덕망 있다는 외부 인사를 얼굴 마담으로 앉혀놓고 물밑에서는 친박~비박이 갈등하는 구조로는 필망(必亡)이다. 더 이상 관리형 비대위원장으로는 안 된다.

    대권 주자가 과감하게 비대위원장이라는 '독이 든 성배'를 잡고 쭉 들이키는 모습으로 승부수를 띄워야 한다.

    2004년 탄핵 광풍 이후 현 여권은 12년간 '선거의 여왕' 박근혜 대통령 덕분에 따뜻한 아랫목에서 선거를 치러왔다. 끓는 물 속 개구리마냥 '선거의 여왕' 효과가 사라진지도 미처 몰랐던 새누리당은 올해 4·13 총선에서 펄펄 끓는 분노한 민심에 데쳐졌다. 박근혜 대통령 임기 4년차까지도 포스트-박근혜에 대한 고민이 전혀 없었던 새누리당이 당연히 치러야 할 모진 댓가다.

    이제는 더 이상 포스트-박근혜에 대한 고민을 미룰 수 없는 상황이다. 노무현정권의 극악한 실정 끝에 한나라당의 수권이 당연시되던 2007년을 돌아보면 당내에 이명박·박근혜·손학규 등 인재가 넘쳐흘러 일부는 튕겨져 나갈 지경이었다. 지금은 당내를 둘러봐도 큰 인물이 너무 없다. 서로를 흔들고 흠집낼 때가 아니라, 이제는 인물을 만들고 키워야 한다.

    비대위원장을 맡을 대권 주자가 최악의 여건 속에서 치러질 내년 4월 재·보궐선거에서 평타나 칠 수 있을지 혹은 예상 외의 선전을 이뤄낼지, 또는 야당에 패배하고 그대로 정치적으로 사멸해갈지는 아무도 모른다.

    하지만 비상한 상황에서는 비상한 수단이 필요하다. 제나라는 습붕마저 관중의 뒤를 따라간 뒤, 마땅한 대안이 없다보니 역아(易牙)·수초(竪貂)·개방(開方)이라는 세 간신의 수중에 떨어졌다. 그 결과, 패업을 진(晉)나라에 넘겨주고 말았다.

    어디 다른 곳이라면 모를까, 패업을 친노·친문패권세력에게 넘겨주기에는 이미 민력(民力)이 고갈됐고 국운(國運)도 경각에 달렸다. 새누리당은 이 나라의 산업화와 민주화를 동시에 진전시켜왔던 정당으로서 책임감을 갖고 비장한 결의로 쇄신책을 마련할 필요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