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병자호란을 부른 親明사대주의자들과 너무나 닮은
    사드 반대 親中사대주의자들

    淸을 자극, 하지 않아도 될 전쟁을 부른 척화파는 전쟁준비를 하자는 주장에는
    '민폐를 끼친다'면서 반대한다. 北의 핵무장을 방조한 세력이 방어망 건설을
    반대하는 꼴이다.

    趙甲濟          
     


  • 북한의 핵개발을 방조한 자들이 핵미사일 방어망 건설을 방해하는 것은
    淸을 도발, 전쟁을 불러놓고는 전쟁 준비엔 반대하는 인조 시절의 명분론자들과 어떻게나 같은지 놀랍다. 지금의 친북좌파가 진보의 탈을 쓰고 있지만 맨얼굴은 수구반동 세력임을 잘 보여준다. 한국의 左右 대결은 그 본질이 진보 對 守舊인데, 자유민주세력이 잔짜 진보이고 진보 자칭 세력은 守舊이다. 
      

       1637년 음력 1월2일 淸(청)의 태종이 포위당한 남한산성 내 조선왕 仁祖(인조)에게 보낸 편지는 그 내용이 직설적이고 당당하다.
       <(前略)내가 요동을 점령하게 되자 너희는 다시 우리 백성을 불러들여 명나라에 바쳤으므로 짐이 노하여 정묘년에 군사를 일으켜 너희를 정벌했던 것이다. 이것을, 강대하다고 弱者(약자)를 없신여겨 이유없이 군사를 일으킨 것이라 할 수 있겠느냐.
      
       너는 무엇 때문에 그 뒤에 너희 변방 장수들을 거듭 타이르되, '정묘년에는 부득이하여 잠시 저들의 무리한 요구를 받아들여 화약을 맺었지만, 이제는 正義(정의)로 결단을 내릴 때이니 경들은 여러 고을을 타일러 충의로운 사람들로 하여금 지략을 다하게 하고, 용감한 자로 하여금 적을 정벌하는 대열에 따르게 하라'는 등등의 말을 했느냐. 이제 짐이 친히 너희를 치러왔다.
      
       너는 어찌하여 知謨(지모) 있는 자가 智略(지략)을 다하고 용감한 자가 從軍(종군)하게 하지 않고서 몸소 一戰(일전)을 담당하려 하느냐. 짐은 결코 힘의 강대함을 믿고 남을 침범하려는 것이 아니다. 너희가 도리어 약소한 國力(국력)으로 우리의 변경을 소란스럽게 하고, 우리의 영토 안에서 산삼을 캐고 사냥을 했으니 이는 무슨 까닭인가. 그리고 짐의 백성으로서 도망자가 있으면 너희가 이를 받아들여 明나라에 바치고, 또 명나라 장수 공유덕과 경중명 두 사람이 짐에게 귀순코자 하여 짐의 군대가 그들을 맞이하러 그곳으로 갔을 때에도, 너희 군대가 총을 쏘며 이를 가로막아 싸운 것은 또 무슨 까닭인가.
      
       짐의 아우와 조카 등 여러 왕들이 네게 글을 보냈으나 너는 받아들이지 않았다. 지난 정묘년에 네가 섬으로 도망쳐 들어가 화친을 애걸했을 때, 글이 오고간 상대는 그들이 아니고 누구였더냐. 짐의 아우나 조카가 너만 못하단 말인가. 또 몽고의 여러 왕들이 네게 글을 보냈는데도 너는 여전히 거절하고 받아들이지 않았었지, 그들은 당당한 元(원)나라 황제의 후예들인데 어찌 너만 못하랴!
      
       元나라 때에는 너희 조선이 끊이지 않고 조공을 바쳤는데, 이제 와서 어찌하여 하루아침에 이처럼 도도해졌느냐. 그들이 보낸 글을 받지 않은 것은 너의 昏暗(혼암)과 교만이 극도에 이른 것이다. 너희 조선은 遼(요), 金(금), 元 세 나라에 해마다 조공을 바치고 대대로 臣(신)이라 일컬었지, 언제 北面(북면)하여 남을 섬기지 않고 스스로 편안히 지낸 적이 있었느냐.
      
       짐이 이미 너희를 아우로 대했는데도 너는 갈수록 배역하여 스스로 원수를 만들어 백성을 도탄에 빠뜨리고 都城(도성)을 포기하고 대궐을 버려 처자와 헤어져서는 홀로 山城(산성)으로 도망쳐 들어갔다. 설사 목숨을 연장해서 천년을 산들 무슨 이로움이 있겠느냐.
       정묘년의 치욕을 씻으려 했다면 어찌 하여 몸을 도사려 부녀자의 처소에 들어앉아 있느냐. 네가 비록 이 城 안에 몸을 숨기고 구차스레 살기를 원하지만 짐이 어찌 그대로 버려두겠는가.
       짐의 나라 안팎의 여러 왕들과 신하들이 짐에게 황제의 칭호를 올렸다는 말을 듣고, 네가 이런 말을 우리나라 군신이 어찌 차마 들을 수 있겠느냐고 말한 것은 무엇 때문이냐.
      
       대저 황제를 칭함이 옳으냐 그르냐 하는 것은 너에게 있는 것이 아니다. 하늘이 도우면 匹夫(필부)라도 天子(천자)가 될 수 있고, 하늘이 재앙을 내리면 천자라도 외로운 필부가 될 것이다. 그러니 네가 그런 말을 한 것은 방자하고 망령된 것이다.
       이제 짐이 大軍(대군)을 이끌고 와서 너희 八道(팔도)를 소탕할 것인데, 너희가 아버지로 섬기는 명나라가 장차 너희를 어떻게 구원할 것인가를 두고볼 것이다. 자식의 위급함이 경각에 달렸는데, 부모된 자가 어찌 구원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만일 그렇지 않다면 네가 스스로 무고한 백성들을 물불 속으로 몰아넣은 것이니, 억조중생들이 어찌 너를 탓하지 않으랴. 네가 할 말이 있거든 서슴지 말고 분명하게 고하라.
      
       崇德(숭덕) 2년 정월2일>
      
       이 편지의 마지막 부분은 폐부를 찌르는 직격탄이다. 명나라의 배경만 믿고 나를 황제라 부르지 못하겠다고 도발했으니 그 명나라의 구원병으로 나를 막아보라. 만약 明軍이 오지 않으면 너는 오만과 오판으로써 백성들을 파멸로 이끌고 들어간 죄를 면하기 어려울 것이다. 대충 그런 뜻이다.
       청태종의 이 직격탄은, 황제라고 불러달라고 하는 요구를 굳이 거부하여 참혹한 겨울 전쟁을 부른 인조와 그 신하, 특히 명분론의 인질이 된 척화파의 무능한 안보와 국방태세에 대한 조롱이다.
      
       상황을 전쟁으로 몰고간 척화파 사대부들은 淸에 반대함으로써 자신의 지조를 높이는 데만 신경을 썼지 그런 외교가 전쟁을 불러 국가와 백성들을 파멸로 몰고갈 것이라는 데 대해서는 눈을 감았고 전쟁을 불러놓고는 전쟁 준비에도 반대했다. 구제불능의 이런 신하들은 패전한 뒤에도 존경을 받았고 애써 淸과 협상하려 했던 최명길 등은 대대로 욕을 먹었다. 이런 조선조는 병자호란 때 망했어야 했다.
       1637년 음력 1월29일 남한산성에서 농성중이던 인조는 주화파 최명길을 淸軍 진영으로 보냈다. 최명길은 淸에 대한 강경론으로 병자호란을 부른 책임이 있는 오달제 윤집을 데리고 갔다. 청태종은 두 사람에게 '너희들은 무엇 때문에 두 나라 사이의 盟約(맹약)을 깨뜨리게 했느냐'고 물었다.
      
       오달제가 말하기를, '우리나라는 300년 동안 명나라를 섬겨왔소. 명 나라가 있다는 것만 알 뿐 청나라가 있다는 것은 모르오. 청국이 황제를 참칭하고 사신을 보내왔으니 諫官(간관)의 몸으로 어찌 화친을 배척하지 않을 수 있단 말이오'라고 했다. 윤집은 '우리나라가 天朝(명나라)를 섬겨온 지 이미 300년이나 되어 의리는 임금과 신하요, 정은 아버지와 아들이오. 더 할 말이 없으니 속히 나를 죽여주시오'라고 말했다.
      
       두 충신의 말은 기개가 있으나 답답하기 그지 없다. 漢族(한족) 나라 明에 대한 충성과 일편단심만 보일 뿐 자신들이 불러들인 전쟁으로 죽어나가고 있던 백성들에 대한 배려는 보이지 않는다. 망해가는 明에 대한 일편단심은 在野(재야) 선비가 해야 할 일이지 在朝(재조)의 관리가 할 일은 아니었다. 국제정세에 대한 無知(무지), 외교와 군사에 대한 無知, 백성들에 대한 무관심만 보여주는 조선조 엘리트의 수준이다.
      
       민족사의 극과 극을 이야기하라면 對唐(대당) 결전으로 唐軍(당군)을 한반도에서 몰아내고 민족통일국가를 완성한 문무왕, 김유신 등 7세기의 신라 지도부가 최상이다. 최악은 사대주의와 위선적인 명분론에 혼을 빼앗겨 할 필요가 없는 전쟁을 초대하여 王朝(왕조)도 民生(민생)도 도탄으로 밀어넣었던 仁祖 시대의 집권세력이다. 신라 지도층과 인조 시절 지도층은, 같은 민족인데 어떻게 이처럼 다른 사람들이었나 하는 생각이 들 정도이다.
      
       신라 지도층의 성격은 개방, 활달, 文武(문무)겸전, 풍류, 자주, 명예, 오기, 자존심, 품격으로 표현된다. 인조 지도층의 성격은 편협, 명분, 위선, 독선, 무능, 文弱(문약)으로 표현된다.
       신라는 국가와 불교가 기능을 분담했다. 국가가 종교에 복종하지도 종교가 국가에 이용만 당하지도 않았다. 신라와 불교는 각기의 영역을 인정하면서 상호 협력하였다. 흔히 신라 불교를, 호국 불교라고 말하지만 통치 이데올로기화된 불교는 아니었다.
      
       조선조 시대에는 朱子學(주자학)이 통치 이데올로기로 변했다. 정치가 주자학을, 주자학이 정치를 이용하면서 전례가 없는 수구성과 명분성과 위선성을 보여주었다. 정치와 철학이 결탁하면 정치는 생동감을 잃고 철학은 흉기가 된다. 주자학적 명분론이 부른 전쟁이 병자호란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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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592년 왜병에게 기습을 허용했던 조선은 그 35년 뒤 후금에게 다시 침략을 허용하였다. 丁卯胡亂(정묘호란)이 그것이다(인조 5년). 인조는 그 9년 뒤인 1636년에 다시 병자호란을 막지 못하고 치욕의 삼전도 항복을 하고말았다. 어떻게 된 것이 40여년 사이 세 번이나 똑 같이 외부세력에 선제공격을 당하고 말았느냐 말이다.
       더욱 웃기는 것은 인조 조정이 할 필요도 없는 전쟁을 불러들였다는 점이다. 1636년 淸으로 이름을 바꾼 後金은 조선에 대해서 大淸皇帝(대청황제)라고 불러줄 것을 요구했다. 조선조는 明에 사대하고 있는 입장에서 의리상 그렇게 못하겠다고 버티었다.
      
       이때 明은 이미 망해가고 있었고 大淸은 떠오르는 세력이었다. 광해군은 이런 국제정세의 변화를 정확히 읽고서 明과 後金 사이에서 줄타기를 하여 전쟁을 면했었다. 그런 광해군을 배신자라고 규정하여 쿠데타로 쫒아냈던 인조 조정은 明 황제 이외의 누구도 황제라 부를 수 없다는 명분론을 굽히지 않았다.
      
       인조도 현실외교로써 청과 화친하고싶었으나 명분론을 들고 나온 斥和派(척화파) 신하들의 반발 때문에 淸과 대결하는 방향으로 선회했다. 한 10개월간 계속된 인조 조정의 내부 노선 투쟁을 들여다 보면 한심하기 짝이 없다. 명분론은 淸軍의 침입을 부르는 초대장임이 확실했다. 그렇다면 명분론을 주장하는 사람은 전쟁 준비론자가 되어야 한다. 그런데 그게 아니었다. 대사간 尹煌(윤황)이 임금에게 전쟁준비를 건의하면 그가 지휘하는 사간원에서는 이런 건의를 올린다.
      
       '요사이 병란의 기미가 이미 생겨 화가 언제 닥칠지 모르는데, 하늘이 크게 재앙을 내려 수해와 旱災(한재)가 거듭 계속되니, 팔도의 생령이 모두 죽게 될 지경입니다. 그런데 전쟁까지 하게 된다면 국가가 반드시 망하게 될 것입니다.'
      
       전쟁을 하지 않으려면 청이 요구하는대로 그들 황제를 大淸皇帝라고 불러주면 된다. 그렇게 하자는 주화파 崔鳴吉(최명길)에 대해선 明에 대한 의리를 저버리는 짓이라고 규탄해마지 않던 척화파가 자신들이 부른 전쟁 준비를 하자고 하니 백성들의 고통 운운하면서 아무것도 하지 않으려 한다.
      
       한국의 좌파들은 北의 핵개발을 비호하거나 사실상 지원해놓고는 우파가 "北이 핵무장하였으니 우리는 미사일 방어망을 만들어야 한다"고 나서니, "왜 중국이 싫어할 일을 하느냐"고 반대하는데 인조 시절의 척화파 꼴이다.
      
       대사간 윤황이 또 강화도의 무기와 전투식량을 평양으로 실어보내 평양에서 적을 막자고 건의한다. 비변사는 이 전쟁 준비 건의에 대해서 뭐라고 하는가.
       '그렇게 해야겠지만 民力(민력)이 감당하지 못하기 때문에 하지 못한다. 억지로 일을 시키면 내란이 일어나지 않을까 걱정이다. 국가가 지금까지 유지될 수 있었던 것은 人心 때문이다.'
      
       할 필요도 없는 전쟁을, 시대착오적인 명분론을 앞세우다가 초대해놓고는 전쟁 준비를 하겠다니 '그러면 백성이 고생하니 하지 말자. 백성들을 혹사하면 내란을 일으킬지 모르겠다'고 하는 판이니 대책이 없다.
       실제로 제대로 된 방어책이 없었던 仁祖 조정은 청군이 서울로 들어왔을 때에야 강화도로 달아나려고 했으나 길이 끊겨 남한산성으로 들어갔던 것이다. 이렇게 하여 인조로 하여금 그런 굴욕적 항복을 하도록 했더라면, 그리하여 수십만의 백성들이 청으로 납치되어가는 비극을 불렀다면 강경파 신하들 중에 책임지고 자살하는 사람이 있어야 할 것인데 아무도 없었다. 현실론을 앞세워 화친을 주장했던 최명길만 욕을 먹게 되었다.
       국제정세를 오판한 명분론으로 병자호란을 불러들인 척화파 선비들은 충신이 되고 현실적 판단에 따라 화친을 주장했던 사람들은 배신자로 치부 된 것이 조선조의 또 다른 비극이었다. 책임져야 할 사람들을 영웅으로 만들어버리니 진정한 반성도 책임규명도 불가능해지고 그런 과오의 메카니즘은 실패에서 배우지 못하는 체질로 살아남아 조선조를 망하게 하는 데 일조했으며 지금은 한국을 망치지 않을까 걱정이다. 병자호란을 부른 위선적 명분론은 한반도에서 핵전쟁을 부를지 모른다.
     
       북한의 핵개발을 방조한 자들이 핵미사일 방어망 건설을 방해하는 것은 淸을 도발, 전쟁을 불러놓고는 전쟁 준비엔 반대하는 인조 시절의 명분론자들과 어떻게나 같은지 놀랍다. 前者는 親明사대주의, 後者는 親中사대주의자들이다. 지금의 친북좌파가 진보의 탈을 쓰고 있지만 맨얼굴은 수구반동 세력임을 잘 보여준다. 한국의 左右 대결은 그 본질이 진보 對 守舊인데, 자유민주세력이 잔짜 진보이고 진보 자칭 세력은 守舊이다.
      [조갑제닷컴=뉴데일리 특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