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연재] 이승만史(1) 부산정치파동⑦ 첫 내각제 개헌 실패...5.30 총선...6.25 남침.

    6.25전야 ‘개헌 투쟁’...이승만 “대통령 직을 걸고 반대한다”

    인 보길 /뉴데일리 대표, 건국이념 보급회 회장
  • 영화 '인천상륙작전'의 한 장면.(자료사진)
    ▲ 영화 '인천상륙작전'의 한 장면.(자료사진)

    ▶첫 내각제개헌안 제출...이승만 “정객 몇사람의 권력투쟁 안될 말”

6.25의 해, 1950년 대한민국의 ‘호랑이 해’는 개헌안과 함께 밝았다. 
‘임기연장’ 요구로 씨름하던 민국당이 이를 철회하고 마침내 내각제 개헌안을 제출하였다. 
“대통령중심제를 1년 넘게 해보았지만 이것으로는 도저히 민주적발전을 기대할 수 없고,
정당이 책임지는 내각제라야 정부가 안정되고 책임정치가 구현된다”는 것이 개헌 이유다.
정부수립 이래 권력에서 ‘소외’된 한민당(김성수)이 벼르고 벼르다가 신익희 세력과 민국당을
만들어 대정부투쟁을 벌이다가 더 참지 못하고 건곤일척 주사위를 던진 것이었다.
  • '내각제 만부당, 직을 도하여 반대투쟁' 이승만 회견기사. 1950.1.27일자 조선일보 1면(조선DB)
    ▲ '내각제 만부당, 직을 도하여 반대투쟁' 이승만 회견기사. 1950.1.27일자 조선일보 1면(조선DB)

  • 중앙청 회의실로 몰려온 기자들의 질문에 이승만은 종래의 단호한 입장을 천명한다.
    “현행 헌법을 우리는 고수하여야 한다. 국가기본법인 헌법이 조변석개(朝變夕改)되어
    정부도 이렇게 된다면 절대 안될 말이다. 정객 몇 사람이 내각책임제를 기도하고 있다는 것은
    천만부당한 일이다. 만일 국회에서 의원다수가 내각책임제를 찬성하여 헌법을 개정한다하더라도 나는 대통령의 지위를 포기하고서라도 민중과 같이 국권을 공고히 하기위하여
    내각책임제 반대투쟁을 전개할 것이다. 진정한 애국동포는 헌법을 보호하여야할 것이며
    이러한 애국자는 오는 선거에 많은 투표를 획득할 것이다. 사리사욕을 위하야 경거망동하는
    정객이 몰락할 것은 명약관화하다“

    ▶첫 ‘대통령 교서’ 발표...”인재 없어 곤란...개헌하면 남미처럼 혼란“

    사흘후 1월31일 이승만은 잇따라 장문의 ‘대통령 교서(敎書)‘를 발표한다.
  • 이대통령 교서를 동아일보와 달리 머리기사로 크게 보도한 조선일보. 1950.2.1일자ⓒ조선DB
    ▲ 이대통령 교서를 동아일보와 달리 머리기사로 크게 보도한 조선일보. 1950.2.1일자ⓒ조선DB

  • “민국 정부가 초기에 있으나 차츰 조직되어가는 중이니 모든 것이 진행 되는대로

    경험이 생길것이요. 그 경험에 따라 날로 교정되고 진전될 것이니
    이것이 다 민주정체를 세운 나라들의 초기경력을 치르는 것이다.
    우리가 한가지 이로운 점은 서양 민주국가들은 1백50~60년동안  경험하고 교정해서
    오늘 저 만치 되어온 것인데 우리는 남의 경험을 거울삼아 첩경을 밟아 올라가게 되므로
    많은 세월을 거치지않고 남의 발전된 방식을 이용해서 나갈 것이므로
    이것이 한간지 큰 도움이요. 동시에 우리가 지금 한가지 어려운 점은
    정부일에 다소간 경력있는 사람들이 많은 중에서 적당한 인물을 채용할 수 있으나
    우리로서는 경력있는 사람을 찾으려면 왜정에 고용된 사람들뿐인데
    그런 사람들은 내각이 원치 아니하므로 대부분 제외해놓고 보니
    실로 경력있는 인재를 구하기 어렵고, 또 나라에 동양지재가 있고서도 누구인지
    분간하기 어려워서 정치에 물든 정객들 중에서 추천을 받게 되므로
    여간 곤란한 점이 없지 아니하나, 이중에서 공심(公心)을 가지고 허영이나 지위를 탐내지 않는
    청백한 인사가 차츰 나타나게 될 것이니 일반동포는 이 형편을 양해하고, 오직 인내하며
    신뢰하는 마음으로 국권옹호와 민생복리만을 위해서 노력할 것을 각오하며,
     41년만에 처음으로 세운 정부의 공복을 지지하므로써 그 사명을 수행케 하는 동시에
    정권이나 허영심으로 불만을 가져 정부를 무력하게 만들고저 하는 사람들의 주의가 무엇인지를 알아서 요동되지 말아야 될 것이다..........(중략)........만일 각자가 그 지위나 명예만을 위하여
    과거에 장관이나 차관이 되었던 분이 그 지위가 한두층 낮아졌다 해서 국가의 중대한 일에
    응하지 앉는다면 이는 구식관념에 젖어서 민주주의를 포섭치 못하는 폐습이요.....(중략).......
    오늘 관민(官民)할 것 없이 우리의 가장 큰 목적은 우리가 잃었던 나라를 회복해가지고
    자유복리를 찾아서 이 복리의 기초를 영구히 세워가며 하루바삐 이북을 통일해서
    완전무결한 독립자유국을 확고히 세우자는 것이니, 우리가 공산분자들과 싸우며 피 흘리며
    투쟁해나가는 것은 대한민국의 토대를 굳게 새워나가자는 것 뿐이요.
    지금은 군주나 전제제도와 달라서 군사로만 국권을 보호하자는 주의는 벗어나
    민중의 지지로써 보호를 받아야할 것이니 우리가 건설하는 토대를 굳게 세워나감에는
    오직 애국애족하는 민중의 심리와 정신에 달린 것이다. 그러므로 지금 우리가 건설하는 것이
    원리적으로 바로 세우자는 그 목적 하나뿐이니 이미 세워놓은 것은 민중이 보호할 줄 알아야만
    부지할 수 있을 것이요. 만일 민중이 보호할 줄 모르거나 고려치 않아서
    남미주(남아메리카) 어떤 나라들 같이 정권 투쟁자들이 정부를 조석으로 변경하더라도
    민중이 이를 돌아보지 않고 지낸다면 우리의 전도가 참담할 것이니 전민중이 정부에 대한 관념을 잘해야 할 것이오. 언제든지 이 결심이 굳게 서서 용진열투(勇進烈鬪)해야 할 것이다.“

    이 교서는 국회를 포함한 국민 모두에게 건국 초기 정부의 어려움을 알려주고 합심협력하자는
    간곡한 당부와 설득, 경고의 말로서 이승만 특유의 ‘국민 직접소통’ 통치방식이다.
    여기서 눈에 띄는 점은 숙련된 인재가 없다는 것, 쓰고 싶은 인재는 모두 일제때 관료들이라는 것, 국민이 정치 투쟁자들에게 선동되어 정부를 흔들어대면 정변이 빈번한 남미나라들처럼 혼란에
     빠진다는 것 등을 가르쳐 주는 이승만이 평생 즐겨 해왔던 정치강의였다.
    초점은 말할것도 없이 내각제 개헌의 부당성을 지적한 메시지였다.

  • 애치슨 미국무장관의 중대 연설 '애치슨 선언' 1950.1.14일자 조선일보1면ⓒ조선DB
    ▲ 애치슨 미국무장관의 중대 연설 '애치슨 선언' 1950.1.14일자 조선일보1면ⓒ조선DB

    김일성 신년사 “올해는 남조선 통일...스탈린 허락 받겠다”

    같은 새해 1월 북한의 평양은 어떻게 돌아가고 있었을까.
    ‘국토의 완정과 조국의 통일을 위하여 궐기하자’는 제목의 신년사에서
    김일성은 “통일은 인민군과 보안대를 강화함으로써만 가능하다”고 되풀이 주장하고
    “중국이 해방을 완료했으니 이제는 남한 인민을 해방할 차례”임을 또 들이면서
    소련 군정의 '아버지 스승' 슈티코프 앞에서 연신 남침전쟁을 조르는 것이었다.
    “나는 스탈린 동지에게 충성하는 공산주의자이며, 나에게 스탈린은 바로 법”이며
    남한침략 허가를 받아야한다고 우겼다. 무슨 일이든지 소련군보다 앞장 서는 김일성이었다.

    1월12일 딘 애치슨 미국무장관은 워싱턴 내셔널 프레스클럽에서
     ‘아시아의 위기: 미국 정책의 시험대’를 주제로 유명한 연설을 한다.
    “아시아의 미국 방어선은 알류산열도에서 일본을 지나 오키나와, 대만, 필리핀으로 이어진다.”
    누가 들어도 한반도는 미국의 이익선에서 빠진다는 선언으로 국제적 파문을 일으켰다.
  • 스탈린의 각본따라 전쟁을 일으킨 김일성은 모택동을 끌여들였다.(자료사진)
    ▲ 스탈린의 각본따라 전쟁을 일으킨 김일성은 모택동을 끌여들였다.(자료사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