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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 이승만史(1) 부산정치파동⑦ 첫 내각제 개헌 실패...5.30 총선...6.25 남침.
6.25전야 ‘개헌 투쟁’...이승만 “대통령 직을 걸고 반대한다”
인 보길 /뉴데일리 대표, 건국이념 보급회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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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영화 '인천상륙작전'의 한 장면.(자료사진)
▶첫 내각제개헌안 제출...이승만 “정객 몇사람의 권력투쟁 안될 말”
6.25의 해, 1950년 대한민국의 ‘호랑이 해’는 개헌안과 함께 밝았다.
‘임기연장’ 요구로 씨름하던 민국당이 이를 철회하고 마침내 내각제 개헌안을 제출하였다.
“대통령중심제를 1년 넘게 해보았지만 이것으로는 도저히 민주적발전을 기대할 수 없고,
정당이 책임지는 내각제라야 정부가 안정되고 책임정치가 구현된다”는 것이 개헌 이유다.
정부수립 이래 권력에서 ‘소외’된 한민당(김성수)이 벼르고 벼르다가 신익희 세력과 민국당을
만들어 대정부투쟁을 벌이다가 더 참지 못하고 건곤일척 주사위를 던진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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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내각제 만부당, 직을 도하여 반대투쟁' 이승만 회견기사. 1950.1.27일자 조선일보 1면(조선DB)
중앙청 회의실로 몰려온 기자들의 질문에 이승만은 종래의 단호한 입장을 천명한다.
“현행 헌법을 우리는 고수하여야 한다. 국가기본법인 헌법이 조변석개(朝變夕改)되어
정부도 이렇게 된다면 절대 안될 말이다. 정객 몇 사람이 내각책임제를 기도하고 있다는 것은
천만부당한 일이다. 만일 국회에서 의원다수가 내각책임제를 찬성하여 헌법을 개정한다하더라도 나는 대통령의 지위를 포기하고서라도 민중과 같이 국권을 공고히 하기위하여
내각책임제 반대투쟁을 전개할 것이다. 진정한 애국동포는 헌법을 보호하여야할 것이며
이러한 애국자는 오는 선거에 많은 투표를 획득할 것이다. 사리사욕을 위하야 경거망동하는
정객이 몰락할 것은 명약관화하다“
▶첫 ‘대통령 교서’ 발표...”인재 없어 곤란...개헌하면 남미처럼 혼란“
사흘후 1월31일 이승만은 잇따라 장문의 ‘대통령 교서(敎書)‘를 발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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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대통령 교서를 동아일보와 달리 머리기사로 크게 보도한 조선일보. 1950.2.1일자ⓒ조선DB
“민국 정부가 초기에 있으나 차츰 조직되어가는 중이니 모든 것이 진행 되는대로
경험이 생길것이요. 그 경험에 따라 날로 교정되고 진전될 것이니
이것이 다 민주정체를 세운 나라들의 초기경력을 치르는 것이다.
우리가 한가지 이로운 점은 서양 민주국가들은 1백50~60년동안 경험하고 교정해서
오늘 저 만치 되어온 것인데 우리는 남의 경험을 거울삼아 첩경을 밟아 올라가게 되므로
많은 세월을 거치지않고 남의 발전된 방식을 이용해서 나갈 것이므로
이것이 한간지 큰 도움이요. 동시에 우리가 지금 한가지 어려운 점은
정부일에 다소간 경력있는 사람들이 많은 중에서 적당한 인물을 채용할 수 있으나
우리로서는 경력있는 사람을 찾으려면 왜정에 고용된 사람들뿐인데
그런 사람들은 내각이 원치 아니하므로 대부분 제외해놓고 보니
실로 경력있는 인재를 구하기 어렵고, 또 나라에 동양지재가 있고서도 누구인지
분간하기 어려워서 정치에 물든 정객들 중에서 추천을 받게 되므로
여간 곤란한 점이 없지 아니하나, 이중에서 공심(公心)을 가지고 허영이나 지위를 탐내지 않는
청백한 인사가 차츰 나타나게 될 것이니 일반동포는 이 형편을 양해하고, 오직 인내하며
신뢰하는 마음으로 국권옹호와 민생복리만을 위해서 노력할 것을 각오하며,
41년만에 처음으로 세운 정부의 공복을 지지하므로써 그 사명을 수행케 하는 동시에
정권이나 허영심으로 불만을 가져 정부를 무력하게 만들고저 하는 사람들의 주의가 무엇인지를 알아서 요동되지 말아야 될 것이다..........(중략)........만일 각자가 그 지위나 명예만을 위하여
과거에 장관이나 차관이 되었던 분이 그 지위가 한두층 낮아졌다 해서 국가의 중대한 일에
응하지 앉는다면 이는 구식관념에 젖어서 민주주의를 포섭치 못하는 폐습이요.....(중략).......
오늘 관민(官民)할 것 없이 우리의 가장 큰 목적은 우리가 잃었던 나라를 회복해가지고
자유복리를 찾아서 이 복리의 기초를 영구히 세워가며 하루바삐 이북을 통일해서
완전무결한 독립자유국을 확고히 세우자는 것이니, 우리가 공산분자들과 싸우며 피 흘리며
투쟁해나가는 것은 대한민국의 토대를 굳게 새워나가자는 것 뿐이요.
지금은 군주나 전제제도와 달라서 군사로만 국권을 보호하자는 주의는 벗어나
민중의 지지로써 보호를 받아야할 것이니 우리가 건설하는 토대를 굳게 세워나감에는
오직 애국애족하는 민중의 심리와 정신에 달린 것이다. 그러므로 지금 우리가 건설하는 것이
원리적으로 바로 세우자는 그 목적 하나뿐이니 이미 세워놓은 것은 민중이 보호할 줄 알아야만
부지할 수 있을 것이요. 만일 민중이 보호할 줄 모르거나 고려치 않아서
남미주(남아메리카) 어떤 나라들 같이 정권 투쟁자들이 정부를 조석으로 변경하더라도
민중이 이를 돌아보지 않고 지낸다면 우리의 전도가 참담할 것이니 전민중이 정부에 대한 관념을 잘해야 할 것이오. 언제든지 이 결심이 굳게 서서 용진열투(勇進烈鬪)해야 할 것이다.“
이 교서는 국회를 포함한 국민 모두에게 건국 초기 정부의 어려움을 알려주고 합심협력하자는
간곡한 당부와 설득, 경고의 말로서 이승만 특유의 ‘국민 직접소통’ 통치방식이다.
여기서 눈에 띄는 점은 숙련된 인재가 없다는 것, 쓰고 싶은 인재는 모두 일제때 관료들이라는 것, 국민이 정치 투쟁자들에게 선동되어 정부를 흔들어대면 정변이 빈번한 남미나라들처럼 혼란에
빠진다는 것 등을 가르쳐 주는 이승만이 평생 즐겨 해왔던 정치강의였다.
초점은 말할것도 없이 내각제 개헌의 부당성을 지적한 메시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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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애치슨 미국무장관의 중대 연설 '애치슨 선언' 1950.1.14일자 조선일보1면ⓒ조선DB
▶김일성 신년사 “올해는 남조선 통일...스탈린 허락 받겠다”
같은 새해 1월 북한의 평양은 어떻게 돌아가고 있었을까.
‘국토의 완정과 조국의 통일을 위하여 궐기하자’는 제목의 신년사에서
김일성은 “통일은 인민군과 보안대를 강화함으로써만 가능하다”고 되풀이 주장하고
“중국이 해방을 완료했으니 이제는 남한 인민을 해방할 차례”임을 또 들이면서
소련 군정의 '아버지 스승' 슈티코프 앞에서 연신 남침전쟁을 조르는 것이었다.
“나는 스탈린 동지에게 충성하는 공산주의자이며, 나에게 스탈린은 바로 법”이며
남한침략 허가를 받아야한다고 우겼다. 무슨 일이든지 소련군보다 앞장 서는 김일성이었다.
1월12일 딘 애치슨 미국무장관은 워싱턴 내셔널 프레스클럽에서
‘아시아의 위기: 미국 정책의 시험대’를 주제로 유명한 연설을 한다.
“아시아의 미국 방어선은 알류산열도에서 일본을 지나 오키나와, 대만, 필리핀으로 이어진다.”
누가 들어도 한반도는 미국의 이익선에서 빠진다는 선언으로 국제적 파문을 일으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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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스탈린의 각본따라 전쟁을 일으킨 김일성은 모택동을 끌여들였다.(자료사진)
김일성은 신바람이 났다. 스탈린이 신경쓰던 미국 개입 걱정도 사라진 셈이 아닌가.
‘미소 양군철수-무력통일’ 노선은 북한정권 수립때부터의 전략, 소련군이 철수하면서 소련군과 대등한 북한군 전력강화라는 스탈린의 정책에 따라 소련 무기 공급이 이루어졌고, 중국 내전이
사실상 끝나므로 모택동이 약속한 팔로군(八路軍) 수만명도 북한에 들어와 합류하였다.
조선인 주력부대인 팔로군은 장개석 군대 격파에 큰 공을 세웠으며 6.25남침에 앞장서 서울까지 달려온 최정예 부대로 ‘전쟁할 줄 아는 중공군’이었다.
북한은 이제 남한군대의 2배가 넘는 20만명의 완전무장 군대가 38선 이남 옹진까지 남침,
침략훈련을 벌이는 상태다. 이제는 '고마운 스탈린 원수'의 결단만 남은 것이다.
▶ 동아일보 ‘내각제 개헌‘ 캠페인...욕설 난무 수라장 국회서 부결
2월 7일 내각제 개헌안을 공고하면서 이승만 대통령은 또 특별성명을 발표한다.
“내가 이 개헌안에 대해서 이의를 붙이는 이유는 나 한사람이 대통령의 권한을 가지고
그것을 장구히 누리자는 생각에서 나온 것이 아니요. 오직 민주정부의 토대를 굳게 세워서
자유복리를 영구히 누리자는 일편단심....(중략)....나로서는 앞으로 남은 임기 2년반동안에
목숨이 살아서 직책을 마치게 된다면 그 후에는 이 자리를 물러나서 평민자격으로
자유권을 누리자는 것이 나의 결심이다.
만일 공산분자나 어떤 분자를 막론하고 국권을 방해하고 독립을 전도(顚倒:엎어버림)하려는
행동으로 반란을 일으키거나 국외에서 침략군이 몰려 올지라도 대통령이나 시민의 자격으로나
조금도 다름없이 끝까지 싸워서 목숨을 바치려는 것 뿐이니, 개헌 문제에 대해서
사적 생각이나 욕심이 조금도 없음을 누구가 믿어주기를 바라는 바이다.
나로서는 헌법보장을 선서한 책임상 이 내각책임제를 묵인할 수가 없다.
누구나 이 안건을 자세히 보면 그 의도를 알수 있을 것이므로 범상히 보아넘기지 말고
그 결과가 어떻다는 것을 깊이 각오해야 할 것이다....“
전보다 더 속마음을 털어 감성에 호소하는 대화체 성명은 '장기집권'을 안하겠다는 다짐과 함께
국회내 공산세력을 상기시키며 내각제 개헌안을 반대하여 달라는 '간청'으로 들렸다.
국무총리 이범석도 내각제개헌 반대 성명을 냈고, 대한 청년단과 대한노총 산하단체들은
서울 운동장(현 동대문역사문화공원)에서 대규모 반대집회를 열고 규탄 결의문을 채택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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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민국당의 개헌안 보도 캠페인을 벌인 동아일보 1면ⓒ동아DB
한편 김성수의 신문 동아일보는 민국당의 내각제 개헌을 대대적으로 보도 캠페인에 돌입하였다.
1면에 ‘개헌안을 심사숙고하자’는 사설을 시리즈로 싣고, 개헌을 찬성하는 신익희 국회의장 강연 ‘개헌의 의의’를 연재하면서 김성수의 심복 신도성(愼道晟) 의원의 ‘대통령제와 내각책임제’ 기고문과 ‘개헌의 필요성’ 해설 시리즈, ‘개헌반대 투쟁에 모순 있다’는 고발성 연재 등등,
거의 날마다 민국당의 기관지처럼 개헌에 집중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개헌안 심의에 들어가자 한두시간씩 열띤 격론과 공방이 날마다 쏟아져나왔다.
제헌때 헌법기초위원장 서상일(민국당)의원은 "1년반의 이승만 정치는 독재정치"라고 규정, 이번 개헌은 "민주주으냐, 독재주의냐, 내각챔임제는 우리의 숙명"이라고 이승만을 직접 겨냥했다.
개헌안 서명을 거부한 김준연(金俊淵)의원은 “아홉 달을 계속해서 우리 대통령을 공격하고서도
그것도 모자라 임기를 연장하자더니 이제 또 개헌까지 하겠다는 의도가 무엇이냐, 민국당이 독재를 안한다고 누가 보증하겠느냐”고 정면 대결에 나서기도 하였다.
표결이 시작되자 의사당은 소란에 빠졌다. 이승만을 지지하는 대한국민당이 백지투표로 기권하자 ‘죽일 놈들 같으니...’ ‘에이 개 같은 놈들...’ 막말들이 쏟아지고 몸싸움이 벌어졌다.
어느 신문이 ‘2백 선량들이 편 갈라 격투’라고 보도한 것처럼 제헌국회부터 ‘추악한 전통’이
시작되었다고나 할까. 3월 15일 개표결과는 역시 예상대로 나왔다.
‘찬성 79, 반대 33, 기권 66, 무효 1표’ 개헌의석 재적 3분의 2에 53표가 부족,
이렇게 해서 최초의 내각제 개헌안은 한달 반 만에 민국당의 패배로 부결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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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내각제 개헌안 부결 보도. 이승만은 직접선거안 피력. 1950.3.15일자 동아일보 ⓒ동아DB
.▶ 운명의 날 ‘4월 10일’...스탈린 ‘남침’ 결정, 최신탱크 대량 제공
모스크바 4월 10일 크렘린 궁전, 스탈린은 마주 앉은 김일성에게 손을 내밀었다.
“좋아. 내 말 잘 들어요. 남한 공격에 엘리트 사단을 창설하고 장비는 기계화로 할 것.
38선에 전투력을 집중 배치, 남한에 평화통일을 제안한다. 남한이 거부할 테니 기습한다.
선공을 감추기 위해 신경 쓸 것, 그동안 남쪽과 싸우던 옹진반도부터 점령하고,
미국이 개입할 틈을 주지 말고 속전속결로 끝낼 것, 소련은 직접개입 안하지만
아시아 전문가 모택동이 여유가 생겼으므로 그에게 맡기겠다.“
“스탈린 각하, 고맙습니다. 자신 있습니다.” 김일성은 90도 각도로 연신 굽신거렸다.
마침내 결정되었다. 작년엔 말리던 스탈린이 '남침전쟁'을 허락한 것이었다.
미국과의 전쟁이 두려워 미루던 한반도무력통일에 결단을 내린 스탈린은 김일성이 미심쩍었지만 승산은 있었다. 지난해 8월29일 카자흐스탄 사막에서 핵실험에 성공했을 때 미국이 놀라는 것을 보았다. 핵 경쟁은 대등해졌고 재래식 무기는 소련이 월등하며 중국엔 무진장의 병력이 있잖은가. 로벤버그 박사에게 좀 미안할 뿐, 장기간 핵기술 비밀을 제공해준 고마운 간첩 로젠버그 부부,
바로 어제(4.9) 미국 정부가 사형을 집행했다는 보고를 받았다.
“미국이 오기 전에 일주일 내라 했지요?” 김일성에게 다짐을 둔 스탈린은 결재를 서둘렀다.
미국은 한반도에 개입하지 않을 것이다. 중국 내전에도 미국은 파병을 안했으니 말이다.
북한에 보내는 군사장비 목록에 최신형 탱크 200대와 자동화기들을 대량 추가하였다.
이미 년초부터 소련은 전투기 180대, 2차대전에 전공을 날린 무기들과 함께 장교단 2천여명도
보낸 바 있다. 중국에서도 800여명의 전쟁고문단이 북한에 들어갔다.
남은 것은 D-데이 결정뿐. 애치슨 선언이 식기전에 남한을 먹어치워야 한다.
소련공산당 중앙위 국제국이 작성한 ‘1950년 3월30일~4월25일 김일성의 소련방문’ 문서는
한민족의 운명을 짓밟은 6.25전쟁이 이렇게 준비되고 결정되었음을 한눈에 보여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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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서울을 점령한 북한군의 소련제 탱크들이 시청앞을 지나고 있다.(자료사진)
▶5.30 총선 민국당 참패...국회는 무소속-좌파가 장악
4월 19일, 정부는 5월30일 2대 국회의원 총선거 실시를 공고하였다.
워낙 이승만은 선거를 연기하고 싶었다. 트루먼 정부가 준다는 원조는 의회에서 퇴짜 맞았고
추가 요청도 절반이 깎여 겨우 6천만 달러, 국내 언론은 고맙다고 대서특필했지만 석 달이 넘도록 감감소식이었다. 애치슨의 한국방어 발언에 고맙다고 인사했지만 애치슨 선언이 왜 나왔는지
미국의 국내사정은 이승만도 잘 알고 있다. 또 다시 미국은 이대로 한국을 버리려는 것인가.
“올 여름이 위험하다. 5~6월이 위험하다” 북한의 전쟁준비가 심상찮은 수준이라는 보고다.
지난해 조직한 학도호국단은 전국 947개 학교에 45만명의 학생들이 훈련중이고,
미군 고문단에 졸라 조직한 ‘호국군’은 해체해야 했고 대신에 청년단체 회원들로
‘향토방위군’ 민병대를 맨손 훈련시키고 있으니, 원조가 와야 무기 훈련을 할 것 아닌가.
무초대사에게 거듭 재촉해 봐도 ‘곧 올 것’이란 대답뿐이다.
그나마 ‘농지개혁’이 예상보다 빨리 진척되는 게 다행이다.
국회 자본가계급 때문에 법안 확정은 늦었지만 ‘유상구입-유상분배’ 개혁안은 호응이 좋아
벌써 70%이상 농민이 농토를 갖게 되었으니 6월말쯤 되면 목표를 달성할 전망이다.
'경자유전(耕者有田) 농지개혁이야말로 구한말 청년시절부터의 꿈이었다.
더불어 농민의 자립만이 공산주의를 막고 없애는 방공(防共) 반공(反共)의 지름길임을 이승만은 소련 레닌의 공산쿠데타 이후 보아왔지 않은가. 북한의 무상몰수-무상분배는 공산당의 사기다.
농토와 함께 농민까지 '국유화'하여 또 다른 정부 노예가 될게 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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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농지개혁법' 표지(자료사진)
선거운동이 시작되자 이승만도 나섰다. 특정후보 지원이 아니라 국민계몽을 위해서다.
중간파나 무소속으로 위장 출마한 공산당 후보들에 대하여 유권자들에게 주의를 환기시키고
북한 공산당이 뭔지 얼마나 무서운 것인지 반공교육을 해주고 싶어서였다.
우리 나이 76세 대통령은 부인 프란체스카 여사와 함께 투표직전닷새동안
3남지방을 도는 순회 강연을 벌였다. 열차로 내려가 배를 타고 해안을 도는 강행군이다.
대구역전 광장에서 수만명의 시민 학생들에게 그는 주먹을 흔들며 말하였다.
“고귀한 피를 흘려 획득한 민주주의와 자유를 옹호하기 위하여 공산당과 싸우는 동시에
총선거를 통하여 국회에 침투하고 정부를 반대하려는 공산당의 음모와 이들의 동조자들을
엄정비판하여 진정한 애국자에게 투표하도록 합시다.“
투표결과는 그러나 놀랍게도 이승만이 경계했던 중간파와 무소속 당선자가 절대다수,
3분의 2에 육박한 126석으로 크게 늘었다. 친이승만계는 57석, 민국당은 24석으로 참패였다.
국회의장엔 신익희가 재선되고 부의장엔 장택상과 좌파 무소속 조봉암이 선출되었다.
6월 19일 2대국회 개원식에 참석한 이승만은 “민주와 공산세력으로 대립하고 있는 국제정세”를 길게 설명하고 정부에 협조할 것을 당부하였다. 앞으로 4년 '무소속 국회'를 어찌할 것인가.
6월24일 경무대, 신익희의 국회의장 재선을 축하하는 모임을 가졌다.
이 자리엔 이승만과 민국당 최고위원 김성수, 신익희, 지청천, 백남훈과 정치위원장 조병옥이
둘러앉았다. 소수파로 전락한 자유진영의 앞날과 정국 운영을 걱정하는 오월동주(吳越同舟)의
정적(政敵)들은 별로 말이 없었고 6월의 마지막 토요일 밤은 그렇게 깊어가고 있었다.
그 밤이 새기도 전에 전면 전쟁이 터질 줄을 누가 알았으랴.
김일성은 스탈린이 작성해준 ‘전쟁 시나리오’대로 ‘평화제의’를 해보았고,
6월10일엔 총동원령을 내려, 23일까지 38선 전선 공격지점으로 병력을 집결 배치해놓고
주말 밤을 기다려 시계를 연신 쏘아보고 있었다. H-아워 카운트다운 개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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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북한 괴뢰 불법 남침 보도. 1950.6.26일자ⓒ조선DB
▶ ‘전면 남침’ 보고받은 이승만 대통령, 무릎을 치다
6월25일 일요일 새벽4시, 터진다 터진다하던 북한 침략전쟁이 터지고야 말았다.
정부가 서자마자 도망치듯 미군이 철수한 날부터 사실은 ‘기다리던 전쟁’이었다.
절호의 찬스, 이승만은 저도모르게 무릎을 탁 치며 이를 악물었다.
어차피 터질 것이 뻔히 보였던 소련의 위성국 통일전쟁은 그러나 드디어 이승만에겐
다시 없는 '통일전쟁'으로 성공해야 하는 절체절명(絶體絶命)의 기회가 온 것이다.
국내채비를 서두른 이승만은 동경에서 잠자는 맥아더를 깨워 호통을 친다.
“미국 때문에 이 전쟁이 나고야 말았다. 즉시 미군이 와서 책임지고 이 나라를 구하라”
미군만 참전하면 전쟁은 이긴다.
미국은 참전하지 않을 수 없는 국제 상황임을 이승만은 벌써부터 꿰뚫고 있던 참이었다.
3년전 트루먼 독트린 선언은 반소(反蘇) 냉정시대의 시작, 어설픈 친공 유화핵으로
중국대륙까지 빼앗겨 궁지에 몰린 트루먼은 지금 반공 매카시즘에도 시달리고 있다.
옛날 이승만을 왕따시켰던 국무성 실세 알저 히스도 간첩으로 투옥되었다.
한국의 힘만로는 어림없는 통일전쟁, 하늘이 미국과 세계를 일깨워 돕지 않는가.
예지의 전략가 이승만은 건국때 써먹었던 ‘유엔 카드’를 다시 꺼내들었다.
유엔이 총선을 맡아 태어난 ‘유엔의 아들’ 대한민국, 한반도 유일의 합법정부로 유엔이 인증한
한민족의 주인 아닌가. 유엔 헌장을 파괴한 소련을 유엔이 응징하지 않을 수 없는 전쟁이다.
얼마나 절묘한 역사의 장난인가, 역사는 창조하려는 개인의 창작물, 토인비의 말이다.
누가 뭐라 하든 ‘북진 통일’ 뿐! 입술을 깨문 이승만은 유엔군이 오자 담화를 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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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6.25직후 한국에 날아온 맥아더 장군을 수원공항에서 맞은 이승만 대통령.(자료사진)
“공산 악마의 죄악이 가득해서 심판의 날이 왔습니다. 49개국 연합군은 우리 한국에
육해공 각 방면으로 모여듭니다.....소련은 벌써 자기들은 관계없다고 발을 빼는 모양입니다.
공산군은 진퇴유곡에 빠져 벗어날 길이 없습니다.....이런 가운데 말들이 많음을 알고있습니다.
정부는 어찌해서 전쟁 막을 군비도 없었느냐? 군사물자가 오늘 온다 내일 온다 하면서 오지 않는 중에 이리 된 것이니, 이제는 국민 모두가 합심협력 한길로 나가야만 우방 연합군도 우리를 더욱 돕고 싶은 성심이 분발될 것입니다. 이번에 우리는 반드시 남북을 통일해야만 합니다.”
변명 겸 격려 겸 자기다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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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남정옥 박사 지음 [6.25전쟁시 대한민국 정부의 전쟁지도] 2015.12.30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발행.
▶전투경험은커녕 군인도 아니었던 이승만 대통령이 3차대전 규모의 한반도 전면전쟁을
어떻게 지도하여 유엔군을 이끌어 나갔는지에 대한 연구는 그동안 꽤 나와 있으나
아직도 수백 권의 저술을 더 필요로 하고 있다.
6.25 전쟁과정은 여기 ‘부산정치파동’ 연재부분에선 생략하고, 몇장의 화보로 대신한다.
이듬해 1.4 후퇴로 마침내 ‘부산정치파동’은 본무대 부산으로 이동, 제2막을 연다.
▶ 권총 뺀 이승만, 무초에게 "제주도? 죽어도 안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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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6.25직후 무초 대사, 처치 준장 들과 회동한 이승만 대통령. 수원 기지에서 맥아더를 기다리고 있다.(자료사진)
▶성공률 5000대 1 '인천상륙작전'...맥아더는 약속 지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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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8선은 국군이 돌파하라" 이승만, 정일권에 지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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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승만 대통령과 정일권 참모총장.(자료사진)
▶ 평양 입성 연설 '동포 여러분 자유가 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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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평양에서 열린 이승만 대통령 평양입성 환영대회.(자료사진)
▶모택동 "한반도는 예부터 우리것" 중공군 인해전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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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서울 중앙청을 점거한 중공군과 북한군들(자료사진)
▶ 이승만, 미군에 북한동포 피난 요청...흥남 철수작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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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중공군 참전으로 후퇴하는 군대와 피난민들이 흥남 부두에 몰려들었다.(자료사진)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