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립군 양성과 청산리대첩서 활약… 1963년 건국훈장 독립장 받아
  • 청산리대첩 승전기념 장면 (국가보훈처 제작) ⓒ 국가보훈처
    ▲ 청산리대첩 승전기념 장면 (국가보훈처 제작) ⓒ 국가보훈처

    국가보훈처는 30일 청산리대첩에서 활약한 나중소 선생을 2016년 9월의 독립운동가로 선정했다고 밝혔다.

    정부는 독립군 양성과 청산리대첩에서 무장투쟁을 벌인 나중소 선생에게 1963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한 바 있다.

    나중소 선생은 경기도 고양군 출신으로 16세에 무과에 급제한 후 대한제국 무관학교에서 수학했다. 대한제국 진위대에서 재직 중 일제에 의해 군대를 해산 당하자 만주로 망명해 대한군정서(북로군정서) 등에서 무장투쟁을 벌였다.

    1919년 3월 나중소 선생은 북간도 왕청현에서 조직된 '대한정의단'의 교관으로 초빙돼 수백 명의 무장 독립군을 양성했다. 같은 해 10월에는 대한정의단이 북로군정서로 개편되자 참모부장에 임명돼 사령관 김좌진을 보좌하며 부대를 이끌었다.

    나중소 선생은 북로군정서군의 사관연성소 교수부장으로 300여 명의 독립군 사관을 양성했다. 이후 청산리대첩에 참전하여 백운평과 천수평 전투에서 일본군을 크게 무찔렀다.

    청산리대첩은 김좌진의 북로군정서군과 홍범도의 연합부대가 1920년 10월 21일부터 6일 간 청산리 일대에서 일본 정예군대와 벌인 전투다. 1,300명의 독립군 연합부대는 일본군 1,200여 명을 사살하며 대승을 거뒀다.

    청산리대첩 후 나중소 선생은 북간도를 거쳐 러시아 이만 지역으로 이동했다. 1921년 4월에는 36개 독립군 단체들이 모여 결성한 대한독립단 참모로 선임됐다. 하지만 1921년 6월 자유시참변이 일어나 북만주로 돌아갔다.

    나중소 선생은 1922년 1월 안도현 군인양성소 사령관에 임명돼 국내진공작전을 추진했다. 같은 해 8월에는 9개 독립군 단체들의 군사통일체인 '대한독립단'을 재건하고 만주 독립군 단체의 통합을 추진했다. 그 결과 1924년 3월 대한군정서가 재조직될 수 있었고 나 선생은 서무부장 겸 참모에 임명됐다.

    1925년 3월에는 영안현에서 신민부가 조직되자 나 선생은 중앙집행위원회 참모부위원장에 임명됐다. 같은 해 9월에는 신민부와 정의부의 연합부대에서 간도의 훈춘, 장백 및 함경도 등을 관할하는 서남로향관에 임명됐다. 나중소 선생은 1928년 8월 신민부 지방조직을 설치하던 중 돈화현 산중에서 숨을 거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