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인천상륙작전보다 더 큰 맥아더의 功

    트루먼 대통령이 신속하게 미군을 보내도록 이끌다.
    이틀 뒤 해공군, 5일 뒤 육군 참전 결정, 남침 10일 만에 최초 교전.

    趙甲濟  
      


  • 한국보다 대만 보호에 관심

    맥아더는 李承晩을 좋아하였지만 6·25 남침 이전엔 실질적인 도움을 준 적이 없다. 李 대통령은 미 극동군 소속 공군이 프로펠러 기를 제트기로 교체한다는 사실을 알고 퇴역하는 프로펠러 기를 달라고 하였지만 맥아더는 이 간청을 워싱턴에 전달하지 않았다. 李 대통령은 일본이 항복한 이후 압류한 한국인 선박이 60만 t에 이른다면서 돌려달라고 했지만 긍정적 반응이 없었다.

    1949년 주한미군이 일본으로 빠져 나간 이후 한국 방어는 미 극동군 사령부 관할도 아니었다(한국군에 파견 나와 있던 미 군사고문단도 극동군 소속이 아니었다). 맥아더는 대만을 군사적으로 보호해야 한다는 보고서는 여러 번 올렸지만 한국 방어를 강화해야 한다는 건의를 워싱턴에 한 적은 없다. 1950년 1월 오마르 N. 브래들리 합참의장은 도쿄에서 맥아더와 만나고 간 뒤, “우리는 한국은 전략적 가치가 적고 문제가 생기더라도 한국군이 대처할 수 있다는 데 의견을 같이 하였다”고 말했다.

    아시아의 총독

    6·25 남침 당시 극동군 사령부 산하의 병력은 이러하였다. 육군이 10만8000명인데, 8만3000명은 일본에 주둔한 워커 중장 휘하의 8군 소속이었다. 제1기병사단, 7사단, 24사단, 25사단. 다른 병력은 필리핀, 오키나와, 마리아나 群島 등에 흩어져 있었다.

    극동공군은 전투기가 1172대, 병력은 3만4000명, 해군은 직할 부대는 작았지만 태평양 사령부 소속으로 한 척의 항모, 한 척의 중순양함, 8척의 구축함, 3척의 잠수함을 가진 7함대가 이 海域의 主力이었다.   

    6·25 남침 직전 맥아더의 주된 관심은 대만이었다. 5월29일 그는 합참에 ‘대만은 불침항모(不沈航母)와 같기 때문에 미국의 서태평양 방어선(일본~오키나와~필리핀)에서 제외시켜선 안 된다’는 요지의 보고를 하였다. 

    무초 대사의 회고에 따르면 ‘맥아더, 이승만, 장개석은 狂的으로 이기적인 점에서 비슷하고, 李 대통령은 맥아더를 우러러 보았다’고 했다. 맥아더로선 이승만의 한국, 장개석의 대만, 미군 점령 상태의 일본, 그리고 자신이 구해준 필리핀을 거느린 ‘미국의 총독’이라는 의식이 있었을 것이다. 그의 경력과 실력이 카리스마가 되어 뒷받침하니 과대망상이라고 할 수도 없었다.

     신속한 초기 대응 

    1950년 6월25일 북한군의 전면 남침 소식을 접하고부터 맥아더는 전광석화처럼 움직였다. 그는 전쟁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타이밍’이라고 믿는 사람이었다. 인천상륙작전이 집중 조명을 받지만 한국을 구한 맥아더의 진면목은 과단성 있는 초기 대응과 파병 결정 유도였다.

    6월25일 첫날 그는 워싱턴(합참)의 승인이 나기도 전에 워커 8군 사령관에게 요코하마 항구에서 탄약, 박격포, 소총 등을 실은 배를 한국으로 출발시키도록 지시하였다. 해군, 공군 사령관에겐 이들 선박의 항해를 보호하도록 명령하였다. 워싱턴엔 7함대를 보내 줄 것을 요청하였다. 

    6월26일 오후(도쿄 시간) 트루먼 대통령은 맥아더에게 한국을 지키기 위한 무기 공급과 함께 해, 공군력의 사용을 허락하였다. 추인한 셈이다. 6월26일 무초 미국 대사는 駐韓 미국인의 철수를 시작하였다. 이틀 사이 약2000명이 인천항과 항공기 편으로 일본으로 철수하였다. 6월27일 처음으로 김포 상공에서 공중전이 일어나 미군기가 석 대의 북한 야크기를 격추하였다. 

    6월27일 맥아더는 합참에 국군의 전면적 붕괴가 임박하였다고 보고하였다. 이날 합참은 맥아더에게 38도선 이남에서 해공군이 북한군을 공격하는 것을 승인하였다.

    맥아더는 즉시 행동으로 옮겼다. 이날 오후 조지 스트레이트마이어 공군 사령관에게 敵軍 집결지와 장비 및 시설을 폭격하도록 지시, 8시간 안에 183회의 출격을 하였다. 이틀 안에 북한군 공군기 26대를 격추시켰다.

     '미 육군의 개입 없이는 북한군 격퇴 불가능'

    워싱턴 시간으로 27일 트루먼 대통령은 성명을 통하여 7함대를 대만 해협에 파견한다고 발표하였다. 1년 전 중국본토가 공산화된 이후 미국에서 쟁점이 되던 대만의 보호 여부가 이때 결정된 것이다. 한국전 덕분에 살아난 나라가 대만이다.

    맥아더는 27일 존 H. 처치 준장이 지휘하는 15명의 현지 조사반을 한국에 보냈다. 극동군 사령부의 전방 지휘소 겸 연락단으로 이름 지었다. 처치 준장은 28일 밤 맥아더 사령관에게 ‘미 육군의 개입 없이는 북한군을 38도선 이북으로 몰아낼 수 없다’고 보고하였다.

    다음날 새벽 6시 맥아더는 참모들을 전용기로 쓰던 C-54 기(바탄 호)에 태우고 폭우 속의 하네다 공항을 출발, 4시간 후 수원 비행장에 내렸다. 북한 전투기가 활주로에 있던 비행기를 공격한 직후였다. 

    수원의 한 학교 건물에서 맥아더는 이승만, 무초 대사와 함께 현황 보고를 들었다. 처치 준장은 9만8000명의 한국군 가운데 2만4000명만 소재가 파악된다고 하였다. 채병덕 총참모장은 200만의 한국 젊은이들을 무장시켜야 한다고 건의하였으나 묵살되었다. 맥아더는 영등포 쪽 강둑에 올라 서서 불타는 서울을 바라보았다. 북한군이 쏘는 포탄이 주위에 떨어지고 있었다. 그는 이 자리에서 두 가지 결정을 마음 속에 내렸다고 한다. 駐日미군을 신속하게 투입하고, 북한군의 배후에 상륙작전을 편다. 

    수원으로 돌아온 맥아더 일행은 바탄호에 타고 오후 6시15분 하네다를 향하여 출발하였다. 출발 직후 비행장에 대한 북한 공군기의 공격이 있었다. 바탄 호 안에서 맥아더는 동승한 마가렛 히긴스 기자에게 도쿄에 도착 즉시 트루먼 대통령에게 미군 사단을 한국에 보내야 한다는 건의를 하겠다고 말하였다. 밤11시에 하네다에 도착한 70 老將 맥아더는 다음 날 새벽까지 보고서를 준비하였다.

    워싱턴도 빨리 움직였다. 큰 전쟁을 치른 이들이 수뇌부에 있었다. 한국전 초기 대응의 主役 트루먼, 애치슨, 브래들리, 맥아더가 6월25~30일 사이에 얼마나 빠르게 (세계사적 영향을 끼치게 될) 결정을 내리고 행동하였는가 뒤돌아보면 감탄이 절로 난다. 이런 신속 대응이 없었더라면 미군이 오기 전에 북한군이 부산항을 점령하였을지 모른다. 6월30일 오전 미 합참은 맥아더에게 중요한 지침을 내린다. 해공군을 동원, 대만에 대한 중국의 공격을 저지하라(동시에 대만이 중국을 공격하는 기지로 이용되는 것을 막아라). 7함대를 극동군 사령부의 작전통제 하에 둔다. 북한 지역에 대한 작전도 허용한다.

    맥아더는 이 지침을 받기 24시간 전에 공군사령관에게 북한지역을 폭격하도록 명령하였으니 워싱턴은 기정사실을 추인한 셈이다. 맥아더가 아니면 할 수 없는 엄청난 越權이었다.

     '시간이 가장 중요하다.'

    드디어 6월30일 이른 오후 맥아더는 미 국방부에 미 육군을 한국에 파병할 것을 요청한다. 그는 <해·공군만으로 대응하기엔 늦었다. 북한군이 진격을 계속하면 한국은 무너질 위험이 크고 한국군은 반격 능력을 상실하였으므로 우선 1개 전투 연대를 파견, 2개 사단 증파에 대비하도록 해야 한다>고 했다.

    워싱턴 시간으로 6월30일 새벽 4시 콜린스 육군 참모총장은 텔레타이프를 통하여 맥아더와 긴급회의를 시작하였다. 콜린스는 2개 사단 증파는 대통령의 허가를 받아야 한다고 했다. 맥아더는 “이런 식의 늑장 대응으로는 북한군의 공세를 저지할 수 없다. 시간이 가장 중요하다. 신속하고 명확한 지침을 내려주는 것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고 압박하였다.

    콜린스는 “연대의 전개가 끝나기 전에 2개 사단 파견에 대한 대통령의 허가를 받으면 안 되겠느냐”고 물었다. 이 순간 텔레타이프 화면이 하얗게 정지되었다. 맥아더가 콜린스 총장을 무시하고 답을 하지 않은 것이다. 맥아더 傳記 3부작의 著者 클레이턴 제임스 교수는 <맥아더는 미군의 어느 누구도 감히 할 수 없는 술수를 쓴 것이다>고 했다. 콜린스는 맥아더의 무응답을 질책할 입장이 아니었다. 그는 새벽임을 무시하고 페이스 육군장관을 전화로 불렀고, 페이스 장관은 즉시 트루먼 대통령에게 전화를 걸었다. 새벽 5시였다. 트루먼은 일어나 있었다. 페이스 장관이 맥아더의 건의 내용을 설명하였다. 트루먼은 “1개 전투 연대의 사용을 승인하였다고 맥아더에게 통보하라”고 말하였다. 페이스로부터 이를 전해 들은 콜린스는 맥아더에게 알리고 2개 사단 증파 건은 곧 결정하여 통보하겠다고 했다.

    30일 아침 백악관, 국무부, 국방부, 의회 요인들이 여러 차례 만나서 분주하게 회의를 거듭한 끝에 트루먼 대통령은 육군을 보내는 결단을 내린다. 그날 이른 오후 합참은 맥아더에게 “육군의 사용에 대한 제한을 해제한다”고 통보하였다.

     한국을 구하다

    미 육군의 公刊史는 <육군을 파견하도록 하는 데는 맥아더의 역할이 결정적이었다>고 기록하였다. 애치슨 국무장관은 육군 파병 결정을, “역사적인 한 주간의 절정이었다”면서 “이로써 우리는 한국에 전면적으로 간여하게 되었다”고 썼다.

    육군 참전 결정 다음 날인 7월1일 일본에 있던 미24사단의 선발대(스미스 대대)는 벌써 항공편으로 부산에 도착하였다. 딘 사단장으로부터 최전방으로 이동, 북한군의 남진을 저지하라는 명령을 받은, 포병 포함 약500명의 이 부대가 오산 죽미령에서 북한군과 최초로 교전하는 것은 7월5일, 남침 열흘째 되는 날이었다. 첫 전투에서 미군은 150명의 死傷者를 내면서 참패하지만 미군은 물러나면서 시간을 벌어 인천상륙작전을 준비한다. 맥아더는 7월에 이미 상륙작전의 대강을 세우고 8월에 합참의 허가를 받는다.

    아무런 영토적 利害 관계가 없는 나라가 지구 반 바퀴나 떨어져 있는 나라를 지키기 위하여 군인들을 보낸 것도 이례적일 뿐 아니라 결정과 행동의 신속성은 가히 경이적이었다. 이것이 인천상륙작전을 능가하는 맥아더의 공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勝敗를 결정하는 전쟁의 핵심을 ‘속도’라고 확신한 맥아더의 천재성이 빛나는 순간이었고 이게 한국을 구한 것이다.
    [조갑제닷컴=뉴데일리 특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