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유엔과 대한민국 ❺      
     
      ‘대한민국은 한반도 유일의 합법정부인가’

                           정 일 화(한미안보연구회 이사. 정치학박사)


[남북한총선을 확정지은 웨드마이어 보고서]

1945년 9월 오키나와에서 일본제국주의군과의 혈투를 벌여
오키나와를 점령했던 미24군단은 38선이남의 일본군무장을 해제하기 위해 인천항에 상륙했다.
일본군은 서울 용산에 조선군사령부를 두고 있으면서 3개 사단을 거느리고 있었다.
하지 24군단 사령관은 맥아더장군의 일반명령 제1호에 의해
38선 이남의 일본군 무장을 해제한 후 군정을 실시했다.
사령관 아래 군정장관(아놀드 육군소장)을 두고 각 도에는 대령 급의 지사를 임명했다.
38선이 갈라져 남북교류가 안되었다. 코렐라, 장티브스, 기아등의 어려운 사회문제가 발생하고
좌우파의 극렬한 대립과 좌파들의 폭동이 연이어 일어나는 가운데 3년간의 군정을 실시했다.

 미국은 1943년 12월1일 발표된 카이로선언의 주관자로서 한반도자유독립을 실현하려 했으나
전쟁 마무리과정에서 소련군이 먼저 한반도를 점령하여 38선까지 내려와 남북이 갈라지게 되자
4대국 신탁통치안 또는 미소공동위원회를 통해 한반도의 통일된 독립정부를 수립하려 했다.
그러나 모두 실패했다.  

1947년 미국이 한반도 문제를 유엔을 통해 해결하기로 한 데는
웨드마이어 보고서(General Wedmyer: Report on China-Korea, 1947)의 영향이 컸다.
웨드마이어장군은 1947년 8월 중국내전의 실태를 파악한 후 한국에 건너와
10일간 한국문제를 소상이 검토한 후 백악관에 긴 정책보고서를 제출했다.

그는 미국이 역사적으로 한반도에 대해 진중한 태도를 갖기 못했기 때문에
문제해결이 꼬였다고 지적하고 유엔을 통한 해결을 권고했다.
한미양국은 1882년 우호조약을 체결했으나 미국은 1894년의 청일전쟁에서 불간섭주의로 나가
중국의 종주권이 일본으로 넘어가는 것을 방관했고
1899년에는 한국이 미국의 도움을 호소했으나 이것역시 내정불간섭이라는 이유로 무시했다.

1904년 한반도 문제를 둘러싸고 러일전쟁이 일어났을 때 루스벨트대통령은
“조선은 자기방어를 위해 주먹한방 날릴 힘도 없는 나라”라고 말하면서
조선에 대한 극히 무관심한 태도를 보였다.
고종은 한미우호조약을 근거로 미국의 도움을 요청했으나 미국은 거부했다. 

1943년의 카이로선언에서 미국은 일본항복과 더불어 한반도는 독립된다고 선언했으나
“적절한 과정을 거쳐”라는 조건을 붙여 한국인들을 분노하게 만들었고,
일본 항복 후인 1945년 12월에는 모스크바외상회의에서 한반도를 5년간 미영중소에 의한
신탁통치를 한다는 것을 합의하여 거센 항의데모를 만나게 되었다. 

모스크바 회의 합의사항을 실천하기 위해 열린 미소공동위원회는 2년간 회의를 거듭했으나
한국인들이 바라는 독립정부수립에 도움이 되지 않고 있기 때문에
이 문제를 결국 유엔으로 끌고 갈 수밖에 없다고 웨드마이어보고서는 결론내고 있었다. 

1947년 9월17일 미국은 한국문제를 유엔총회에 상정했다.
 소련측의 격렬한 반대를 받았으나 9월23일 정식의제로 채택되었고
10월14일 총회에서 41대 0, 기권7로 총회결의안(총회 결의안 제112호)으로 의결되어

첫째 UN한국임시위원단을 구성하여 1948년 3월 31일까지 한반도전체를 통한 인구비례 총선거를 해 정부를 구성할 것과, 둘째 선거에 의한 합법적 정부가 설립되면 90일 이내에 정부와 협의하여 외국군이 철수할 것을 결정했다.
소련은 이 결의에 앞서 외국군이 1948년 1월1일까지 모두 철수한 뒤 한국문제를 한국인에게
맡기자는 안을 내놓아 표결에 붙였으나 찬성 6, 반대 35, 기권6으로 부결되었다. 

 호주, 캐나다, 자유중국, 프랑스, 엘살바도르, 인도, 필리핀, 시리아등으로 구성된
유엔한국임시위원단(UNTCOK)이 서울에 들어와 총선거 준비를 진행했다.
38선 이북을 장악한 소련 군정은 UNTCOK의 입북을 거부했다.

 
  • 유엔 관리하의 자유총선으로 수립된 대한민국 건국 선포 기념식(1948.8.15). 이 중앙청 건물은 제헌국회 의사당과 대한민국 정부청사로 사용되었던 역사적인 장소였으나, 김영삼 정부가 일제총독부 청사였다는 이유만으로 철거하였다. (자료사진)
    ▲ 유엔 관리하의 자유총선으로 수립된 대한민국 건국 선포 기념식(1948.8.15). 이 중앙청 건물은 제헌국회 의사당과 대한민국 정부청사로 사용되었던 역사적인 장소였으나, 김영삼 정부가 일제총독부 청사였다는 이유만으로 철거하였다. (자료사진)

  • 총선을 반대한 유혈폭동

    이들은 선거가 가능한 남한지역만이라도 해야 하는 지를 다시 총회에 결정을 요청했고 임시총회는 1948년 2월 27일 34대2의 절대적 지지로 한반도총선을 재의결했다. 
     북한지역의 선거는 추가로 실시할 계획이었다.

    어렵고 긴 여정을 거쳐 1948년 5월10일 한반도역사상 처음 있는 자유 평등 비밀선거 원칙에 의한 총선거가 남한에서 실시되어 198명의 국회의원이 선출되었고 이들은 7월17일 대통령제중심의
    대한민국 헌법을 통과시킨 후 건국대통령으로 이승만박사를 선출했다.

    한반도 역사상 전혀 새로운 이념의 자유민주주의 국가가 탄생했다. 

    국가는 국제적 승인이 있어야 국제적으로 정식 국가로 인정받는다.
    상해임시정부가 그렇게 국제적승인을 받으려 했지만 임시정부 주재국인 중국마저도
    승인을 거부해 결국 외로운 독립운동기구로 밖에 인정될 수 없었다.

     국제연합의 권고 절차에 따라 대한민국이 설립되었기 때문에 세계의 국가승인을 받는 것이
    어렵지 않게 되었다. 그러나 처음부터 대한민국수립을 반대했던 소련 등의 반대세력이 있었음으로 결코 그 절차가 쉬운 일은 아니었다.
    1948년 10월 대한민국 정부는 장면, 조병옥, 김활란 등으로 구성된 대표단을 제3차유엔총회가
    열리고 있던 파리에 파견하여 국제연합의 국가승인을 받게 했다. 

  • 소련은 대한민국 건국 선거를 방해하기 위해 남한의 일부세력을 평양으로 불러 이른바 남북제베력 합동회의를 열었다. 사진은 평양에 간 김구가 김일성의 뒤를 따라가는 장면.(1948. 4)
    ▲ 소련은 대한민국 건국 선거를 방해하기 위해 남한의 일부세력을 평양으로 불러 이른바 남북제베력 합동회의를 열었다. 사진은 평양에 간 김구가 김일성의 뒤를 따라가는 장면.(1948. 4)

    대한민국이 한반도유일의 합법정부

    대한민국 선거를 주도한 유엔한국임시위원단의 보고서가 유엔제1(정치)위원회에 상정되어
    보고서의 채택여부를 결정하기 위한 회의가 열렸다. 이 회의에 참고인자격으로 한국과 북한을
    초청할 것인지를 논의했다. 제1위원회의 미국대표는 존 포스터 덜레스가 맡고 있었다.
    한국대표 초청안이 36대 6, 기권1표로 통과되었다.
    그러나 북한정권 초청안은 찬성 6대 반대 36, 기권6으로 부결되었다.

    제1위원회에 제안된 한국결의안은 미국-중국-오스트레일리아가 공동제안한 내용으로
    한국의 5월10일 총선거는 자유롭고 비밀이 지켜지는 가운데 합법적으로 치러진 선거라는 것과
    이런 합법적인 선거로 선출된 국회가 헌법을 제정하고 정부를 구성함으로써
    한반도 유일의 합법정부가 되었다는 내용이었다.

    제1위원회는 의제상정자의 설명과 한국대표로 초청된 장면박사의 보고를 들은 후
    결의안을 표결에 붙여 찬성 40 반대1, 기권6표로 결의안을 통과시켰고
    통과된 결의안은 총회로 이관되어 12월12일 오전과 오후 두 차례에 걸친 긴 토론을 걸쳐
    표결에 붙인 결과 찬성 48, 반대 6, 기권 1표의 절대다수로 통과되었다. 

    유엔총회결의안 제195로 명명된 대한민국정부 승인결의안은 전문과 총9장으로 되어 있는데
    1장은 유엔한국임시위원회의 보고를 승인한다는 것,
    2장은 대한민국이 한반도 유일의 합법정부라는 것,
    3장은 외국군의 실현가능한 조속한 시기 내에 철수 한다는 것,
    4장은 총회결정 제112결의안의 완성을 위해 유엔위원회(UNCOK)를 새로 설립한다는 것
    등으로 되어 있다.

    이 결의안이 가결되면서 1949년 1월1일부로 미국이 대한민국과 국교를 수립하고
    이어 세계 자유우방국들과의 국교관계가 널리 이뤄졌다.
  • 대한민국을 건국한 이승만 초대 대통령이 건국기념식에서 연설하고 있다.(1948.8.15. 중앙청)
    ▲ 대한민국을 건국한 이승만 초대 대통령이 건국기념식에서 연설하고 있다.(1948.8.15. 중앙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