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군, 참모총장 주관 출격조종사 19명 초청해 보훈행사 마련
  • 6·25 전쟁 당시 조국하늘을 수호하기 위해 출격하는 F-51D 전투기 편대.ⓒ공군
    ▲ 6·25 전쟁 당시 조국하늘을 수호하기 위해 출격하는 F-51D 전투기 편대.ⓒ공군

    6·25전쟁이 한창이던 1952년 1월 15일, 한국 공군은 역사에 길이 남을 신화적인 전공을 세웠다. 유엔공군이 성공하지 못한 ‘승호리 철교 차단작전’ 임무를 이제 막 태어난 한국 공군이 성공시킨 것이다.

    당시 평양 동쪽 지점에 위치한 승호리 철교는 적이 보급물자를 동부와 중부전선으로 수송하는 전략 요충지로서 북한의 전쟁지속능력을 저하시키기 위해 반드시 차단해야만 했다. 적은 이 철교를 교묘하게 위장·은폐시켰으며, 주변에 이중 삼중으로 수많은 대공포를 배치시켜 철저히 방어하고 있었다.

    유엔공군은 이 철교를 차단하기 위해 당시 최신예 전투기로 수없이 출격했지만 폭파하지 못한 채 한국 공군에게 임무를 인계했다.

    1952년 1월 12일 오전, 한국 공군 최초 100회 출격을 달성한 김두만 예비역 대장 김두만 예비역 대장 (6·25 전쟁 기간 중 공군 학사사관후보생 5기로 임관, 한국 공군 최초 100회 출격을 달성했으며, 제11대 공군참모총장을 역임)을 비롯한 6대의 전투기가 승호리 철교 차단을 위한 첫 출격에 나섰으며, 같은 날 오후 6대의 전투기가 추가로 출격했으나 성공하지 못했다.

  • 1952년 1월 15일, 승호리 철교 폭파 후 항공사진 (폭파된 철교 위로 연기가 치솟고 있다.)ⓒ공군
    ▲ 1952년 1월 15일, 승호리 철교 폭파 후 항공사진 (폭파된 철교 위로 연기가 치솟고 있다.)ⓒ공군

    당초, 철교 차단을 위해 적용한 전술교리는 8,000피트 고도에서 강하하여 3,000피트 상공에서 공격하는 작전이었다.

    한국 공군은 통상적인 전술로는 철교를 폭파할 수 없다고 판단해 적의 격렬한 대공포화를 무릅쓰고라도 4,000피트 고도에서 1,500피트까지 저공으로 접근하여 공격하는 ‘저공 공격’ 방법을 택했다.

    대공포화가 2,000피트까지 도달했던 것을 감안하면 이는 조종사들에게 상당히 위험하고 모험적인 방법이었으나, 오로지 철교를 폭파하겠다는 필승의 각오로 과감히 도전했다. 1952년 1월 15일 아침, 새로운 전술로 재무장한 한국 공군은 6대의 전투기로 구성한 2개 편대로 세 번째 출격을 감행했다.

    적의 대공포가 날개 옆을 스치는 아찔한 상황에서도 폭탄 12발과 로켓탄 20발, 기총 4,700여발을 퍼부으며 승호리 철교 중앙 부분에 두 개의 커다란 구멍을 뚫고 일대를 쑥대밭으로 만들어 적의 보급로를 차단하는데 성공했다.

    이와 같은 업적은 조국을 수호하기 위해 임무를 완수하기 전에는 살아서 돌아오지 않겠다는 결사로 투혼 했던 전투조종사들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 6.25전쟁이 발발하자 일본에서 F-51 무스탕 전투기를 인수하기위해 한국 조종사들이 인수 교육을 받고 있다.ⓒ공군
    ▲ 6.25전쟁이 발발하자 일본에서 F-51 무스탕 전투기를 인수하기위해 한국 조종사들이 인수 교육을 받고 있다.ⓒ공군

    6·25 전쟁 중 하늘의 전장을 누빈 공군 조종사는 총 129명(F-51D 115명, L-4/5 및 T-6 14명)이며, 전쟁기간 중 25명(전사자 23명, 순직자 2명)의 조종사가 조국의 하늘을 지키다 장렬히 산화했고, 현재는 39명의 조종사가 생존해있다.

    공군은 생존해있는 출격조종사들이 고령인 만큼 이들의 업적을 잊지 않고 후손에 널리 전하기 위해 매년 초청행사를 실시해오고 있다.

    전쟁 발발 당시 조종사들은 공군이 창설된 지 9개월 밖에 되지 않았고, 전투기 한 대 보유하지 못한 상황이었다.

    그러나 북한의 남침을 저지하기 위해 L-4/5, T-6 등의 경비행기로 작전에 투입되었다. 200여대의 야크(Yak) 전투기를 보유한 북한에 비해 턱없이 부족했던 항공력임에도 불구하고 우리 조종사들은 맨손으로 폭탄을 던지며 눈물겨운 사투를 벌여야만 했다.

    전쟁 발발 다음날, 미국이 전투기 지원을 결정하면서 10명의 한국 조종사들은 F-51D 전투기 인수를 위해 일본으로 건너갔다. 우리 조종사들은 위기에 직면한 조국을 구하기 위해 단 4일만의 기종전환 교육을 받고 1950년 7월 2일 고국으로 귀국했다. 조종사들은 휴식을 취할 틈도 없이 바로 다음날부터 태극마크를 달고 적진으로 출격하여 사력을 다해 적과 맞서 싸웠다.

  • 전쟁기간 중 F-51D 출격 조종사 115명 가운데 39명은 적의 쏟아지는 대공포화망 사이를 누비며 목숨을 건 임무수행을 거듭하여 100회 이상 출격을 달성했다.

    그중에서도 故 유치곤 대위(당시 계급)는 총 203회 출격하여 ‘불사조’란 별명을 얻었다. F-51전투기 도입 이후 한국 공군은 전시 중인 어려운 여건 속에서도 미 공군으로부터 작전준비태세 검열을 성공적으로 수검 받아 1951년 10월 11일부터 단독출격작전을 수행하게 됐다.

    이후 1952년 승호리 철교 차단작전, 송림제철소 폭격작전, 평양 대폭격작전 등을 완벽히 수행했으며, 1953년에는 351고지 및 고성지구 항공지원 작전을 통해 동북부 지역의 영토 확보와 전쟁 승리에 지대한 공헌을 했다.

    한편 6·25 전쟁기간 동안 한국 공군은 총 14,163회(F-51D 8,457회, L-4/5 및 T-6 5,706회) 출격하여 적 군용건물 1,799건, 보급물집적소 1,229건, 철로·도로·철교·교량 1,220건, 벙커 845건 등을 파괴하는 전과를 올렸다.

  • 공군은 6·25 전쟁 66주년을 하루 앞둔 6월 24일, 공군참모총장 주관으로 공군회관에서 대한민국의 자유와 평화를 지키기 위해 죽음을 각오하고 하늘에서 적과 싸운 6·25 전쟁 출격조종사를 초청해 그들의 헌신과 희생에 대해 위안(慰安)하고 감사를 표하는 보훈행사를 마련했다.

    오찬 및 환담이 진행된 이번 행사에는 6·25 출격조종사회 김두만 회장을 비롯한 출격조종사 17명이 참석했다. 특히 행사에 참석한 출격조종사 가운데 김두만 회장과 윤응렬 예비역 소장, 박재호 예비역 준장이 바로 이 승호리 철교 차단작전에 참여한 주인공이며 윤 예비역 소장과 박 예비역 준장은 당시 세 번째 출격에서 각각 편대장과 편대원으로 참여해 실제 철교를 폭파시킨 영웅들이다.

    공군참모총장은 초청행사에서 환영사를 통해 “여기 계신 출격조종사 대선배님들이 아니었더라면 지금의 대한민국과 공군은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라며 선배 조종사에 대한 경의를 표하고, “뜨거운 애국심과 투철한 군인정신을 이어받아 확고한 전방위 대비태세를 확립한 가운데 ‘현재를 직시하고 미래를 준비하는 최강의 정예공군 육성’을 위해 최선을 다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승호리 철교 차단작전 편대장을 맡았던 윤응렬 예비역 소장은 “현재 대한민국이 이룩한 눈부신 발전을 보고 있노라면, 전쟁 당시의 고난과 역경을 모두 잊을 수 있다”라며, “후배조종사들이 끊임없는 정진을 통해 조국 하늘을 굳건히 수호해 주길 바란다”라고 당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