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유엔과 대한민국❹ 샌프란시스코 창설회의 참여 요구(1945.4.25)

    이승만의 유엔가입 몸부림

    정 일 화 (한미안보연구회 이사. 정치학박사)

2차대전이 막바지에 이르고 있던 1945년 4월25일(4/25~6/26)
유엔창설을 위한 샌프란시스코회의가 소집되었다.
미영중소를 비롯한 연합군편에 섰던 모든 국가가 초청대상이었다.
소련의 연방국으로 편입되어있는 백러시아, 우크라이나를 비롯,
나라를 잃고 망명생활을 하던 프랑스 폴란드 덴마크같은 나라도 포함되어있었다.

"일본은 결국 미국을 침략하고 말 것"이라고 진주만 공격 몇달 전 그의 저서
‘일본의 안과 밖’(Japan Inside Out, 1941)를 통해 경고한 이승만은
코리아가 이 유엔창설에 참여함으로써 전쟁종결과 더불어 일본식민통치에서 벗어나
당당한 독립국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당시의 형편으로는 어림도 없는 꿈이었지만
 이승만은 그런 꿈을 갖고 미국과 중국을 흔들어 댔다.

이승만은 얄타회담에서 샌프란시스코회의 개최를 결정한 직후인 그해 2월 20일자로
임시정부 워싱턴대표 구미위원회 의장자격으로 미국무성에 서한을 내고
“6개월 전만 해도 관심을 보이지 않던 중국정부가 한국임시정부를 승인하려하고 있다.
국무성이 이점을 감안하여 묵시적 인정을 하기만 하면 중국은 한국임시정부의 법적지위를
공식적으로 인정할 것이다”(If State Department gives China a tacit understanding that it will cooperate, China will formally recognize the de jure status of the Republic of Korea).
그리고 지금 소련은 블라디보스토크에 한반도의 공산화를 위한
 ‘조선해방위원회’(Korean Liberation Committee)와 조선공산군을 준비해놓고 있으면서
여차하면 한반도를 공산화할 준비를 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때문에 임시정부의 승인은 한반도의 자유민주주의뿐 아니라
아시아와 미국의 이익을 위해서도 매우 절실한 일이라고 말했다.
임시정부가 샌프란시스코 UN창설회의에 나가기 위해서는
우선 중국과 미국의 국제승인이 절실했던 것이다.
임시정부가 승인을 받는 다면 미국의 무기대여법(Lend-Lease Act, 1942)의 지원대상국도 되어 미국의 무기를 대여받아 대일(對日本)전을 벌일 수 있고, 그렇게 되면 비록 전쟁의 막판이지만
당당히 연합군의 일원으로 참전하여 종전과 더불어 단번에 복잡한 일본식민지관계를 청산할 수 있었다. 

미국무성은 이승만의 서한을 이번에는 좀 신중한 태도로 검토했다.
장개석의 중국정부가 과연 그런 준비를 하고 있는 가를 주중 대사관과 미국을 방문한 샤오 유린(장개석의 비서) 외교관을 불러 문의하는 가하면 블라디보스토크에 과연 한반도의 공산정부 준비를 위한 군대를 준비하고 있는 가에 대해 조사했다. 

이때쯤 중경의 임정에서도 조소앙(외무장관)이 미국대사관을 방문하여
샌프란시스코의 유엔창설회의에 참석하겠으니 비자를 달라고 요청했다.

중경의 장개석정부와 미국을 방문한 샤오외교관은 한국임시정부를 승인할 의사가 여전히 없다고 말했다. 국무성 지시에 따라 주(駐)모스크바 미국대사관이 조사보고해 온 바에 따르면
블라디보스토크에 조선해방위원회가 존재한다는 것은 확인되지 않은 루머 일뿐이라는 결론이었다. 이에 미국무성은 한국임시정부 승인조처를 하지 않았다. 
조소앙의 비자도 거부되었다.

이승만은 3월 8일 아르헨티나 시리아 레바논이 유엔창설회원국으로 초청되자
다시 한국도 초청해 주기를 미국무성에 요청했고,
4월20일에는 회원국투표에 붙여 한국의 유엔회원가입 여부를 물어 줄 것을 요청했다.
한국은 3천만의 인구를 가진 적지 않은 나라이며 국제연합의 일원이 될 수 있는
역사를 갖고 있다고 말했다.

 이승만은 미국이 얄타회담에서 한반도를 또다시 소련에 넘길 비밀협약을 했다고 주장하면서
트루만대통령은 얄타 회담에서 그런 비밀협정이 없었다면 그 증거로 임시정부를 승인하라고
요구했다. 

한국은 유엔 회원국 아닌 패전국 일본의 일원으로 해방을 맞지 않을 수 없었다.
조선은 2차대전중 군인 15만 징용 50만을 포함하여 60만명 이상이 일본제국의 이름으로
연합군과 맞서 싸웠고 부자들은 비행기를 헌납하고 덜 부자는 탱크와 다른 무기들을 헌납하는 등 일본제국에 충성했다. 적어도 국제법으로는 조선은 2차대전의 패전국의 일원일 뿐이었다. 

이승만이 다시 유엔을 붙잡으려 한 것은 미군정하에서 신탁통치안이 잠잠해 지고
미소공동위원회의 실패가 확연해 진 1946년 12월이었다.

그는 한국 독립정부 수립을 위해 유엔의 여론을 움직이겠다며 미국으로 건너 갔다.
미국무성 자료에 따르면 한반도 독립 문제를 유엔으로 끌고 가야한다는 공식 제의를
가장 먼저 내놓은 사람은 맥아더였다.
  • ▲ 대한민국 건국기념식장에 환담하는 이승만 대통령과 맥아더 극동군사령관(1948.8.15)
    ▲ 대한민국 건국기념식장에 환담하는 이승만 대통령과 맥아더 극동군사령관(1948.8.15)

    그는 연합군사령관 극동군사령관 및 일본점령군사령관으로서 비록 한반도를 직접통제 하지는
    않았지만 남한의 군사점령사령관인 하지중장의 상관으로서 한반도정세를 검토한 후
    그렇게 결론 짓고 국무성에 정식건의서를 올렸다.

  • 1947년 1월 27일 맥아더는 한국인들이 신탁통치를 결사적으로 반대하고 있고
    미소공동위원회도 결렬된 마당에서 한국문제 해결을 위한 4가지 방안을 국무장관에게 제출했다. 첫째가 한국문제를 유엔에 상정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Submission of entire Korean Position to UN). 

    미 국무성은 한국문제를 유엔으로 끌고 가겠다고 소련에 제안했다.
    소련은 점령자 해결 우선원칙을 내세우면서 유엔으로 갈 문제가 아니라고 반대했다.
    모스크바 3상회의 결정과 미소공동위원회가 유효한데 유엔으로 가서는 안 된다는 것이었다. 

    1947년 9월 뉴욕에서 제2차 유엔총회가 열렸을 때
    마샬(Alfred Marshall)국무장관, 일리노어 루스벨트(Eleanor Roosevelt)전대통령 부인,
    오스틴(Warren Austin)상원의원, 덜레스(John Foster Dulles)국무성 법률고문(뒤에 국무장관) 등 화려한 미국대표가 등장하여 소련의 방해공작을 교묘히 피하면서
    한국문제를 유엔에 상정하는데 성공했다.

    덜레스국무장관은 3대가 선교사 집안으로 한국을 잘 아는 외교관이었다.
    그는 유엔정치위원회에서 소련의 비신스키 대표와 맞붙어 격렬한 이론논쟁을 벌였다.
    소련은 한국문제를 유엔에 상정하기 위해서는 의제상정에 앞서 한국대표를 불러 의견을 듣는 것이 순서라고 말했다. 38선 이북에는 이미 김일성정권이 사실상 형성되어있었고
    38선 이남에는 많은 정당 사회단체가  아직도 난립하고 있어 대표초청이 어렵든지
    아니면 북한대표 단독초청이 유리할 것으로 계산했다.

    덜레스대표는 소련의 한반도 대표 초청 안을 받아들인다고 말했다.
    그리고 즉각 그 대표선출을 위해 남북총선거를 실시하자고 수정 제안해
    이것이 의제로 채택되어 유엔을 통한 한국문제의 실마리가 풀리게 되었다.
     
  • ▲ 1940년대 미국과 중국등에 임시정부 승인을 강력히 요구하던 때, 미국에서 태극기를 들고 서 있는 이승만.
    ▲ 1940년대 미국과 중국등에 임시정부 승인을 강력히 요구하던 때, 미국에서 태극기를 들고 서 있는 이승만.

    유엔총회는 어려운 난관을 뚫고 남북총선거를 통한 자유롭고 민주적인 독립정부를 설립할 것을 결의했고 이에 따라 유엔한국임시위원단을 구성하여 한반도에서 남북한 총선준비에 들어갔다.
    38선 이북 소련 통치하의 북한지역은 유엔결의에 저항하면서 대표단 진입을 막았다.

    유엔은 다시 선거가 가능한 지역만이라도 총선거를 실시하여 나라를 세우고
    나머지는 뒤에 선거가 가능할 때 선거해서 통일을 이루면 될 것이라고 다시 결의해
    1948년 5 10선거가 이뤄지고 그해 8월15일 대한민국이 탄생되었다.
    소련과 북한이 유엔을 거부해 결과적으로 한반도는 영구분단으로 가게 된것이다
    (jcolumn@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