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현대사의 뒤안길/全斗煥과 盧泰愚의 합창

    "죽장에 삿갓 쓰고 떠나가는 全 삿갓/全 삿갓은 떠나고 盧 삿갓이 들어온다."

    김성익         
      
    "내가 나가려고 하면 마음 편하게 내보내줘야지. 축하는 못 해줘도 정치인이나 누구나 마음 편하게 해주어야지. 내가 나가겠다는데…. 정권이라는 게 자식한테 넘겨주기는 쉬운가."
     "오늘은 좋은 날, 내, 다음 대통령 후보 모시고 한 잔 먹는 날 아니냐. 나보다 이 분이 더 권력이 세다. 나는 8개월 남았는데 무슨 권력이 있겠어."    
       
       ▶ 1987년 6월17일 대통령은 저녁 7시20분부터 9시30분까지 청와대 安家(안가)에서 盧泰愚 민정당 대표위원과 만찬을 함께 했다. 이 모임에는 安武赫 안기부장, 李春九 민정당 사무총장, 李致浩·玄敬大 의원, 朴英秀 비서실장, 安賢泰 경호 실장, 金潤煥 정무1, 李鍾律 공보 수석비서관 등이 자리를 함께 했다. 金聲翊 통치史料 담당 비서관도 동석, 기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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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통령: 統治權(통치권)을 내 임기 중에 안정적으로 끌고나가는 것은 어려운 게 아니야.
       군부 지지가 없으면 정권 유지가 안 돼. 민중혁명이 성공되게 할 수는 없어. 학생 몇 명 움직이는 것을 가지고 민중혁명이라고 얘기할 수도 없지. 지금 우리가 여론에 밀리고 하니 더러 심장이 약해지는 사람들도 있는 것 같은데 나는 나쁜 짓을 뭐 많이 했기에 겁이 나는 게 있느냐고 생각해요. 세상이 뒤집어질 무슨 일이 있겠어. 우리가 정치를 하는 데 있어 과거에 하던 식, 군대를 동원하고 비상계엄을 선포하는 그런 걸 반복해서는 안 되지 않겠어.
       내가 한 번 더 집권을 하겠다면 그런 방법도 있겠지. 민주주의를 하겠다는 게 내 소망이고 여러분의 뜻이기도 한데 국민이 全的으로 그 뜻을 오해하고 있어. 그 동안 정부와 여당이 껍데기만 만졌지 속으로 파고들지 못했다는 거 반성해야 됩니다.
       저 사람들은 마치 모든 시민 여론이 자기네를 지지하는 것처럼 조성하는데 우리는 黨이나 정부가 그런 것도 생각 못 하고 항상 뒤통수만 얻어맞고 있어. 현실이, 국민이 우리의 참뜻을 모르고 우리가 쓰러진 나라를 구해서 잘 해 놓은 것도 모르는 것 같아. 민정당이 집권한 이후 7년 사이에 많이 바뀌었어. 4·19세대는 벌써 늙은 세대고 그 밑이 主流를 이루고 있어. 朴 대통령은 폐쇄정책을 썼지만 나는 그 동안 개방정책을 써 왔어. 그렇게 하는 동안에 옛날 같은 전통적인 인내심이라든지 윗사람에 대한 존경심, 선배를 모시는 氣風이 없어지고 자유주의 사상이 팽배해 있어. 민정당이 공무원 아파트에서 표를 못 얻는 게 이렇게 젊은 층이 이유 없이 반발하기 때문이야. 12대 국회의원 선거 때도 그랬어. 12대 선거할 때 내가 정치규제를 6개월 전에 풀어주고 페어플레이하자고 했는데 당 지도부가 겁을 먹어서 안 된다고, 한 달 전에 푸는 게 좋다고 했지 않나.
       우리 국민이 얼마나 똑똑해. 그러니 민정당이 더티하게 보여서 12대 선거 때 고전한 게 사실이야.
      
       대통령: 현재의 우리 민정당이 잘못했다는 소리가 아니야. 盧 대표 나쁘다고 하는 얘기도 아니고…. 일반 국민들이 金泳三, 金大中을 찍어주려는 것도 아니야. 지식인층에서도 그 두 사람을 지지하는 사람이 얼마나 되겠어.
       정국을 타개해 나가는 데 있어서는 정치 역량을 발휘해야 되고 그건 정당에서 해야 돼. 정부에서 하는 게 아니야. 우리가 지금 밀려가고 있는데 정부에서 할 것은 꽝 하는 것밖에 없어. 나는 카드를 다 썼어요. 이제 없어.
       정부에서 뭘 연구하더라도 이제는 전부 盧 대표를 중심으로 해야 된다는 얘기야. 그래서 내가 안기부장을 오라고 한 것은 비서실과 긴밀히 협조해서 뭔가 만들어야 한다는 거야. 그렇게 하려면 민의를 정확하게 알아야 되는데 盧 대표도 여러 사람을 만나고 있기 때문에 잘 알겠지만 정부가 여론을 수렴하는 것보다는 당이 해야 됩니다. 정보기관이란 제한된 사람만 만나지만 당은 광범위한 民意 수렴을 하지 않나.
       그래서 이 政局을 당에서 정치적으로는 잠재워나가도록 해야 되고. 안기부에는 전문가 연구팀도 있지 않나. 우리가 이렇게 잘해놓고 당하고 있다는 게 내가 개인적으로도 그렇고 나라 전체로 볼 때도 억울해요.
       내가 무슨 소망이 있겠어.
       내가 내놓는다니까, 일단 넘기고 대사 치르고 89년에 개헌 논의 하자고 하니까 89년에 가서 내가 한 번 더 하려고 직선 개헌을 한다고 오해할 수 있고.
       내가 속을 뒤집어서 보여 주나.
      
       대통령: 이렇게 잘 해놓았는데 내가 나가려고 하면 마음 편하게 내보내줘야지. 축하는 못 해줘도 정치인이나 누구나 마음 편하게 해주어야지. 내가 나가겠다는데…. 정권이라는 게 자식한테 넘겨주기는 쉬운가.
       盧 대표가 친한 친구인 것만은 사실이지. 내가 나를 아는 것보다 盧 대표가 나를 더 잘 알고 내가 盧 대표를 더 잘 알아. 그렇지만 잘 안다고 대통령을 시켜주는 게 아니야.
       대통령 후보를 모시고 축하연을 하는데 내가 오늘 한 잔 먹을 거야. 경호한다고 지키고 있으니 여기서는 술 먹을 기회가 없어.
       내가 술 마시면 실수를 잘 해. 내가 실수하면 盧 대표가 무서운 사람이라 뒤처리를 다 해. 盧 대표는 절대 술에 안 취해. 절대 실수가 없어. 나는 대체로 술이 약해. 강단으로 마시는 거지. 나는 술을 맛으로가 아니라 기분으로 마셔요.
       안기부장, 이제는 데모 보고 올리지 마라. 나는 청와대에 쳐들어 올 때까지는 꼼짝 안 한다. 천만 명이 나와도 상황을 보고하지 말고 대책을 보고해야 돼요.
       이제는 盧泰愚 대통령 후보라고 해야 돼. 盧 후보라고만 하면 ‘늙은 老(노)’자로 들리기 쉬워서 내가 공보 수석한테 盧泰愚 대통령 후보라고 부르라고 그랬어.
       金 수석은 눈이 크고 키가 커서 겁이 많아. 맨날 나 보고 겁먹는 소리만 해. 너무 善(선)해.
       나는 지금도 내 목숨 하나는 언제나 바칠 각오가 돼 있어. 병사도 나라를 위해서는 목숨을 바칠 각오를 해야 돼. 나는 목숨을 버린 지 오래 돼.
       盧泰愚 대통령 후보 각하, 한 잔 하시지요. 盧 후보는 나를 비판한 일이 없어. 잘못을 비판할 용기가 있어야 돼. 李春九, 카메라 앞에선 좀 웃어야 돼. 나는 두려운 게 없어. 내 일신은 미리 바쳐 놓았어요. 나는 다만 죽기 전에 통일을 보는 게 소원이야.
       임자한테 모든 권한을 넘겨주고 통일을 위해 뛸 거야.
      
       盧 대표: 두려움이 없게 해 드리는 게 우리 모두의 책무입니다.
       朴英秀 비서실장: 盧 대표, 각하를 잘 부탁합니다.
       대통령: 비서실장이 부탁해야겠지. 나라를 위해 우리 모두 동지로 뭉쳐야지 배신을 하면 되겠어. 내 일생 내 좋아하는 사람들을 위해 바쳤어. 그게 오늘의 나를 만든 거야.
       盧泰愚 대통령 후보께서는 나보다 정말 훌륭한 분이다. 내가 신뢰하고 존경하는 盧 후보, 이 나라를 구출하고 발전시킬 수 있는 분이 盧 대표시다. 우리나라는 전략 전술을 모르는 대통령이 나오면 안 돼요. 이제는 체제와 이념을 수호하기 위한 싸움이다. 내 死生觀(사생관)은 묻지 마라. 나한테는 죽는 것은 명예다. 비서실장이 사생관이 확립돼 있으면 비서관들의 동요가 없어요. 오늘은 좋은 날, 내, 다음 대통령 후보 모시고 한 잔 먹는 날 아니냐. 나보다 이 분이 더 권력이 세다. 나는 8개월 남았는데 무슨 권력이 있겠어.
      
       *노래 1: 죽장에 삿갓 쓰고 떠나가는 全 삿갓(두 번 盧 대표와 합창) 열두 대문 문간방에 걸식을 하며 / 술 한 잔에 시 한 수로 / 떠나가는 全 삿갓 全 삿갓 / 全 삿갓은 떠나고 盧 삿갓이 들어오는 거다.
      
       *노래 2: 운다고 옛사랑이 오리오마는 / 눈물로 달래보는 / 구슬픈 이 밤 / 고요히 창문 열고 별빛을 보니 / 그 누가 불러주나 휘파람소리(박수)
      
       *노래 3: ‘사나이 가는 길 앞에’… 내 십팔번이야
      
       <대통령: 盧후보가 퉁소 잘 불고 휘파람 잘 불고 다재다능한 분이야. 운동을 못 하나, 음악을 못 하나. 내가 운이 좋아 먼저 대통령을 했고 이 양반이 후보가 됐지만 이 사람이 나보다 몇 십 번 앞선 사람이다. 이 사람을 무조건 존경하고 잘 모셔야 해. 목숨 걸고 나한테보다 백 배 더 잘 모시라는 거야.>
      
       노래: 사나이 가는 길 앞에 웃음만이 있을소냐 / 결심하고 가는 길 가로막는 / 폭풍이 어이없으랴 / 푸르른 희망을 가슴에 움켜 안고 / 떠나온 정든 고향을 내 다시 돌아갈 때엔 / 열굽이 도는 길마다 꽃잎을 날려보리라.
      
       내 십팔번이야.
      
       盧 후보 휘파람 한 번 불어주시오.
       盧 대표: 순풍에 돛달고 / 몇 십 리를 돌려서 / 외로이 걸어가니 / 외로이 이 밤 처량해(노래).
       安武赫 안기부장: 어머니를 생각하면서 한 곡 부르겠습니다.
       대통령: 돌아가셨는가.
       安 부장: 모르겠습니다.(이북에서) 어떻게 되셨는지. 어머님 묘소가 없습니다.(‘불러봐도 못 오실 어머님…’을 노래).
       대통령: 그래 미안해. 이게 우리 비극이야.
       (李致浩 의원: 일송정 푸른 솔)
       대통령: (함께 부르고 나서) 제목은 선구자라는 거지(누군가 홈 스위트 홈을 부르고 全 대통령도 따라 불렀다)
       경호실장: 6월12일에 각하께서 盧泰愚 후보 각하라는 말씀을 처음 하셨습니다. 여당 대통령 후보로는 역사에 처음 나오는 호칭이지요.
      
       盧 대표: 역사에 처음이지요. 우리가 진짜 통일을 해야 됩니다. 통일은 내 소명입니다. 영광은 각하께 돌리고. 나도 젊을 때 아이큐 143으로 천재라는 소리를 듣고 헤르만 헷세 작품을 2주일 만에 외웠습니다. 그러나 凡人(범인)의 지혜를 모으는 게 천재라고 생각합니다. 미국 언론이 자이언트 스텝이라고 했는데 이 발전 추세를 우리가 받들어나가야 합니다.
       朴英秀 비서실장: 후보님, 힘을 합칩시다. 각하 영광을 위하여.
       盧 대표: 각하는 늘 민심의 한가운데에 계십니다. 그러면 내가 받듭니다.
       정무 수석: 잘 받들어 주십시오.
       盧 대표: 우리는 이상한 길을 걷지 않습니다. 백성이 뭘 원하는가를 초점으로 가는 겁니다. 그게 각하 뜻입니다.
      

  •    <기록자 김성익 비서관 해설: 대통령이 전국적인 시위 사태가 수그러들지 않은 가운데 일주일 전 민주당의 전당대회에서 선출된 대통령후보 盧 대표와 함께 축하주를 하는 자리였다. 적지 않은 대통령의 저녁 모임에 참석했지만 이때만큼 대통령이 자신의 감정과 속마음을 그대로 드러내는 것을 본 적은 없었다. 全 대통령은 이 모임의 서두에서 盧 대표를 중심으로 한 시국의 정치적 수습 방향을 마련할 것을 지시하고 술잔을 권한 다음부터 술기운이 돌기 시작해서 차츰 酒醉(주취)에 빠져들어 갔다. 대통령이 노래를 부르는 것을 본 것도 이 모임에서 처음이었다. 대통령의 노래는 굵은 목소리와 기교를 부리지 않는 스타일이 인상적이었다. ‘사나이 맹세’는 그의 애창곡으로 나중에 청와대에서 있었던 離任(이임)행사 때 유명 가수가 불러 일부 공개된 일이 있었다.
     
       “盧 대표는 나보다 훌륭한 분”이라고 얘기하는 부분에 이르러서는 깊은 감회에 젖는 듯 목소리가 떨리는 것을 느꼈다. 全 대통령이 이 자리에서 대체적으로는 기복이 없는 담담한 목소리로 얘기했지만 때때로 감정에 북받치는 자세를 보였다. 술기운 때문이라고는 해도 어떤 자리에서든 항상 힘 있고 소신에 찬 자세를 보이던 것과는 다른 면모였다.
       이 기록에서 염두에 두어야 할 것은 全 대통령이 정부 여당이 밀리고 있다는 시국 인식 아래 ‘민의를 정확하게 파악하여 ‘페어플레이를 통한 정치적 해결방안을 비밀리에 만들라’고 지시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 시점은 全 대통령이 이미 직선제를 수용하기로 결심을 하고나서 盧 대표를 설득하고 있는 단계로서 그런 태도 변화를 다른 참석자들에 대한 保安(보안)을 의식, 완곡한 어법으로 표시한 것이다. 또한 목숨을 걸자는 비장한 각오를 군데군데 표시하고 있고 盧 대표에 대한 예우에 신경을 쓰는 내용이 많다는 점이 눈에 띈다.
       그리고 노래 가사를 빌려 자신은 떠나고 盧 대표가 들어온다는 것을 말하고 있는 점이다.
       全 대통령이 ‘盧 대표는 나의 잘못을 비판할 용기가 있어야 한다’고 한 점, 盧 대표가 ‘백성이 뭘 원하는지를 초점으로 가는 게 대통령의 뜻’이라고 한 점은 앞으로의 시국 타개 방향의 전개 과정에서 주목되는 대목이다.
       특히 盧 대표가 참석자들에게 백성이 원하는 바를 초점으로 하는 것이 대통령의 뜻이라고 말한 것은 全 대통령과 盧 대표 사이에 참석자들이 그 내용을 모르는 어떤 얘기가 별도로 진행되고 있었음을 시사한다. 그것은 직선제 수용에 관한 얘기였다. 이 모임이 시작되기 전 全 대통령은 盧 대표위원과 따로 비밀리에 만나 얘기를 나눈 뒤 다른 참석자들보다 늦게 이 자리에 나타났다.
       이 시점은 6·10사태에서 나타난 민의를 며칠 후에 발표되는 6·29선언을 통해 직선제 수용으로 풀어나가기로, 全 대통령과 盧 대표 사이에서 깊은 논의를 통해 그 방향을 잡아가던 결단의 前夜(전야)이기도 했다.
       당시 민의의 표출에 대한 집권층의 결론으로서 6·29라는 우리 정치사의 새로운 방향과 내용이 준비되고 있었던 순간이고 이 자리의 두 주인공은 얼마 안 가 한 사람은 전직 대통령으로, 또 한 사람은 새로운 공화정을 책임지는 대통령으로 각기 운명이 바뀌는 갈림길 앞에 서 있는 순간이었다.>
    [조갑제닷컴=뉴데일리 특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