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일 공산당 주최 ‘홍색가요제’서 문혁찬양가 나오자 시진핑 격노, 당 차원 조사 지시
  • 1966년 5월 16일 마오쩌둥의 제창으로 시작된 문화대혁명은 '마오이즘'이라는 中공산주의 광기가 만들어낸 비극이었다. 이는 中공산당도 1981년 공식 인정했다. 사진은 '문화대혁명' 당시 선전 포스터. ⓒ위키피디아 공개사진
    ▲ 1966년 5월 16일 마오쩌둥의 제창으로 시작된 문화대혁명은 '마오이즘'이라는 中공산주의 광기가 만들어낸 비극이었다. 이는 中공산당도 1981년 공식 인정했다. 사진은 '문화대혁명' 당시 선전 포스터. ⓒ위키피디아 공개사진

    “우리는 회생하려는 전근대성 문화와 시장정책 문화를 비판하고, 더욱 새로운 공산주의 문화를 창출해야 한다!”

    1966년 5월 16일, 中공산당 독재자 마오쩌둥이 외친 말이다. 中공산당 역사 가운데 최악의 사건인 ‘대약진 운동’과 ‘삼선 운동’에 이은 ‘문화대혁명’의 시작을 알린 말이다.

    中공산당의 공식 명칭은 ‘무산계급문화대혁명’, 줄여서 ‘문혁’이라고도 부르는 ‘문화대혁명’은 10년 동안 소위 ‘5,000년 중국 역사의 유산’을 모두 파괴한 공산주의 광기의 극치였다.

    ‘문화대혁명’을 제창할 당시 마오쩌둥은 1950년대 초반부터 1960년대 초반까지 벌인 ‘대약진 운동’과 ‘삼선 운동’으로 5,000만 명의 인민을 굶겨 죽인 책임을 지고 공산당 원로들에 의해 쫓겨날 위기에 처해 있었다. 

    1966년 5월 16일 마오쩌둥은 “중국 사회와 공산당 곳곳에는 여전히 브루주아 계급의 자본주의, 봉건주의, 관료주의 요소를 제거해야 한다”면서 “청년학생들과 민중들이 사상과 행동을 규합해 인민민주독재를 더욱 확고히 실현하기 위해서는 프롤레타리아 혁명 후에도 영구적 계급투쟁을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때부터 마오쩌둥의 지지자들과 청소년, 학생들은 ‘공산주의 혁명의 완전화’를 위해 닥치는대로 기존 제도와 권력, 권위를 깨뜨리기 시작한다.

    1966년 8월 16일 베이징에는 중국 각지에서 모인 1,100만 명의 홍위병이 마오쩌둥을 만나고자 했다. 이때부터 본격적인 ‘문화대혁명’이 시작된다. 곳곳의 종교시설, 문화유산은 철저히 파괴되고, 기존의 학자, 교사, 교수, 언론인 등 지식인들과 작가, 감독 등 예술가, 상인 등은 홍위병에 의해 척살 당했다.

    마오쩌둥은 3년 뒤인 1969년 “문화대혁명은 끝났다”고 선언했지만, 그의 부인 장칭, 그 측근들인 장춘차오, 야오원위안, 왕훙원 등 ‘4인방’이 실세 권력으로 등장, ‘문화대혁명’은 실질적으로 1976년 마오쩌둥이 죽을 때까지 10년 동안 계속됐다.

  • '문화대혁명' 당시 홍위병에 의해 파괴된 간수성 닝샤족 자치구의 불상. ⓒ위키피디아 공개사진
    ▲ '문화대혁명' 당시 홍위병에 의해 파괴된 간수성 닝샤족 자치구의 불상. ⓒ위키피디아 공개사진

    그 사이 수많은 사람들이 홍위병에 의해 살해당하거나 구타당한 뒤 치료를 받지 못해 숨졌다. 中공산당의 공식 발표에는 3만 4,800여 명이 사망하고, 74만 2,511명이 부상을 입었다고 한다. 하지만 중화권 매체나 ‘문화대혁명’에서 살아남은 사람들은 사망자 수가 40만 명에 달한다고 주장한다.

    이는 ‘대약진 운동’과 ‘삼선 운동’에서 비롯된 1957년부터 1961년 사이 대기근 사망자 5,000만 명에는 미치지 못하지만, ‘정치 광신도’에 의한 ‘정치 학살’이라는 측면에서는 세계적으로도 손 꼽을만한 일이었다.

    결국 1976년 마오쩌둥이 사망한 뒤 일명 ‘사인방’이 체포돼 처벌을 받고, 이어 권력을 쥔 덩샤오핑이 中공산당을 통해 1981년 “마오쩌둥의 과오가 크다”고 공식 선언하면서 일단락된 것처럼 보였다.

    2016년 5월 16일은 이런 ‘문화대혁명’ 발발 50주년이 되는 날이었다. 하지만 중국 어디서도 이를 기념하는 행사는 없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일부 중화권 매체는 지난 2일 中공산당이 주최한 ‘홍색가요제’에서 한 걸그룹이 ‘문혁 찬양 유행가’를 부른 사건 탓으로 돌리지만 그 때문만은 아니어 보인다.

    한국 언론들은 지난 16일, 중화권 매체들을 인용, “최근 중국 인민들 사이에서는 ‘문화대혁명’ 시대를 그리워하는 분위기가 나타나고 있다”고 보도했다. 최근의 경기침체와 사회 양극화 심화 때문에 ‘문화대혁명’ 때처럼 다함께 못 사는 사회를 그리워하고 있다는 주장이었다.

    실제 TV조선 등 일부 매체가 중국 현지인을 인터뷰했을 때 ‘문화대혁명’ 시절이 더 살기 좋았다고 대답하기도 했다.

    이 같은 중국 사회 분위기에 찬물을 끼얹은 것이 지난 2일 ‘홍색가요제’에서 일어난 사건이었다고 한다.

    중화권 매체 ‘보쉰’이 지난 13일(현지시간) 보도한 데 따르면, ‘56개의 꽃’이라는 이름의 걸그룹이 ‘홍색가요제’ 개막과 함께 부른 노래가 마오쩌둥을 찬양하는 ‘지도자를 의지하며 큰 바다로 나가자’는 노래와 시진핑을 연상케 하는 ‘중국의 꿈이 아름답다’는 곡이었다는 것이다.

    中공산당 중앙선전부가 주최한 가요제에서 마오쩌둥 찬양가와 시진핑 찬양가 같은 노래가 나오자 중국 인민들은 이를 두고 “시진핑 총서기 1인 지배 체제를 위한 게 아니냐”는 추측을 하기 시작했다고 한다.

    한편 ‘홍백가요제’를 직접 본 시진핑 中공산당 총서기는 크게 화를 내며 비서실에 해당하는 중앙판공청에 “누가 저런 노래를 부르게 한 배후인지 당 차원에서 철저히 조사하라”는 지시를 내렸다고 한다.

  • 유엔 총회에서 연설 중 시무룩한 표정을 짓는 시진핑 中공산당 총서기. ⓒ유엔 홈페이지 캡쳐
    ▲ 유엔 총회에서 연설 중 시무룩한 표정을 짓는 시진핑 中공산당 총서기. ⓒ유엔 홈페이지 캡쳐

    지난 16일 ‘문화대혁명’ 50주년이 되던 날이 끝나기 직전 中공산당 관영매체인 ‘인민일보’와 ‘환구시보’는 ‘문화대혁명’을 비판하는 논평과 사설을 내놨다.

    ‘인민일보’는 ‘역사를 거울로 삼는 것은 더욱 좋은 전진을 위해서다’를, ‘환구시보’는 ‘문혁은 이미 철저히 부정됐다’를 내놨다.

    ‘인민일보’는 해당 논평을 통해 “역사는 이미 문혁이 이론과 실천에서 완전히 잘못됐다는 점을 증명했다”면서 “문혁과 같은 잘못이 재연되는 것을 절대 용납하지 않을 것”이라고 비판했고, ‘환구시보’는 “공산당은 1981년 문건을 통해 사상적, 조직적, 법률적으로 문혁을 깊이 반성하고 ‘사인방’ 등 사건의 주범들을 재판하고 그들의 죄행을 청산했다”면서 “이런 커다란 반성은 전면적 개혁개방의 사상적 기초가 됐다”며 21세기 中공산당과 마오쩌둥의 공산당은 다르다는 점을 강조했다.

    中공산당 관영 매체들이 이처럼 문화대혁명을 강하게 비판한 것은 시진핑의 개인사와도 연관이 있어 보인다.

    현재 중국 사회에서는 시진핑을 칭송하며, 그를 우상화하려는 일련의 움직임이 보이고 있다. 그러나 이런 움직임 가운데는 시진핑을 진심으로 존경하며 따르겠다는 뜻보다는 모든 권력이 시진핑에게로 몰리자, 그의 권력을 쫓으려는 세력들의 ‘아부’도 포함돼 있다. 이는 ‘사다리에 올려놓고 흔들어 떨어뜨린다’는 음모일 가능성도 있다.

    때문에 시진핑은 자신을 칭송하거나 찬양하는 표현을 사용하지 못하도록 공산당 기관들에 지시했다. 그러자 이번에는 ‘문화대혁명 50주년’을 내세워 ‘시진핑 1인 독재체제’를 찬양하려는 움직임이 보이기 시작한 것이다.

    이에 시진핑과 中공산당은 중앙선전부를 통해 언론, 인터넷, SNS 등에 문화대혁명 관련 내용을 게재하지 말라고 지시한 것으로 알려졌다.

    시진핑은 ‘문화대혁명’이 터질 때 부친 시중쥔이 기득권 권력층으로 몰려 시골로 쫓겨나면서 불우한 어린 시절을 보낸 바 있다. 이후로도 표현을 하지는 않지만 ‘문화대혁명’에 부정적인 시각을 가진 것으로 알려졌다.

    시진핑의 실질적인 권력 배경이 ‘공산주의청년단(共靑)’이라는 강경 공산당 조직이지만 ‘문화대혁명’은 1981년 덩샤오핑이 공산당의 이름으로 철저히 배척한 적이 있어 별다른 문제가 되지 않았다는 분석이 있다.

    그러나 시진핑은 ‘공청’이 지지할 만큼 철저한 중국 공산주의자로, 일당 독재체제의 유지와 당 중앙을 통한 지배체제를 지키는 일에 있어서는 타협을 하지 않는 것으로 알려져 있어, ‘문화대혁명’과 관련해 그가 최근 보여주는 행태들은 ‘공산당 체제’를 위협하는 요소를 제거하기 위한 것이라는 해석도 설득력을 얻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