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무라카미 류, 회심의 근미래소설

    동(東)일본 대지진으로부터 7년, 도쿄올림픽까지 2년이 남은 2018년의 일본이 이 소설의 무대.
    사전예고를 통한 해괴한 테러가 잇달아 발생한다. 
    범인은 ‘마음의 병’을 지닌 젊은이들. 언뜻 그들의 충동적인 범행으로 보이지만, 하나하나 실마리를 좇아가다 보면 70대에서 90대까지의 노인 집단이 나타난다.

    노인들은 어떤 형태로든 전쟁을 체험했고, 패전의 폐허에서 살아남았으며, 이윽고 사회적인 지위와 부를 일구었다. 그러나 여생이 얼마 남지 않은 그들이 현대 일본의 돌아가는 꼬락서니에 의분을 느껴 테러를 통해 새로운 사회를 일구어 내고자 한다. 그들이 노린 대상은 일본의 여론을 좌지우지하는 공영방송 NHK, 유명 아이돌 그룹, 남에 대한 배려를 잊은 무례한 인간들, 그리고 원자력발전소….

    그런 점에서 이 작품은 무라카미 류의 전작(前作) <희망의 나라 엑소더스>(2000년 발표)와 맥락이 비슷하다. <희망의…>에서도 작가는 일본사회를 ‘천천히 죽어가는 환자’로 표현했고, 더구나 두 작품에 나오는 주인공 격인 화자(話者)는 이름도 직업도 똑같다. 하지만 <희망의…>에서는 현대 일본사회의 절망과 더불어 새로운 나라에 대한 희망을 다룬데 견주어, 이번 작품 <올드 테러리스트>는 현대 일본인의 어찌 할 수조차 없게 된 정신세계를 암시하면서 출구가 없는 폐색(閉塞) 상황을 그렸다는 점에서 큰 차이가 난다.
    월간 《문예춘추(文藝春秋)》 2011년 5월호부터 2014년 9월호까지 39회 연재한 작품이다.

  • 반(反) 사회적 모티브가 잠재된 소설

    무라카미 류는 그동안 경제, 전쟁, 히키코모리(=자폐아), 학교문제 등 사회적 테마에 타깃을 맞춘 문제작을 꾸준히 발표해왔다. 거기에는 종종 ‘테러’나 ‘파괴’와 같은 반사회적, 반체제적인 모티브가 잠재해 있었다. 소설 <다빈치 코드>를 누르고 일본에서 종합 베스트셀러 1위에 올랐던 <반도에서 나가라>(2005년 발표) 역시 그랬다. ‘고려 원정군’을 자칭하는 500명의 북한 특수부대원이 야구장 관객 3만 명을 인질로 잡고 후쿠오카(福岡)를 점령한다는 상황 설정이 어쩌면 이번의 신작 <올드 테러리스트>와 궤를 같이 한다는 인상을 던져준다.

    그렇지만 ‘북한 특수부대’와, 이번 소설에 등장하는 ‘만주국 출신을 자처하는 일본 노인들’이라는 구도는 확연한 차이가 난다. 여기에 대해 무라카미 류는 「작가의 말」에서 “노인, 특히 남성 고령자의 대다수는 일반적으로 사회로부터 경시되고 있다는 인상이다”고 전제한 뒤 “70대부터 90대까지의 노인들이 테러를 불사하며 일본을 바꾸려 일어선다는 이야기의 아이디어가 떠오른 것은 이미 상당히 오래전의 일이다. 그 나이의 사람들은 어떤 형태로든 전쟁을 체험했고, 식량난 시대를 살았다. 대체로 죽임을 당하지도 않았고, 병으로 죽거나 자살하지도 않았다. 자리보전이나 하고 누워있지도 않으며, 살아남았다는 것 자체가 대단하다고 여겼다. 그들 중에서 경제적으로 성공하고, 사회적으로도 리스펙트되거나, 극한 상황도 체험한 사람들이 의분을 느껴 네트워크를 만들고, 가지고 있는 힘을 다 짜 내어 일어선다면 어떻게 될까? 어떻게 싸움을 걸고, 어떻게 전개할까? 그런 상상은 내 호기심을 자극했다.”고 집필 동기를 밝혔다.

    무라카미 류 다운 걸작!

  • ▲ 무라카미 류(자료사진)
    ▲ 무라카미 류(자료사진)
    독자에 따라서는 “얼빠진 일본을 다시 한 번 초토화시키겠다”는 테러리스트들이 제2차 세계대전에서 쓰인 독일제 88식 탱크로 원자력발전소를 공격한다는 계획에 황당무계함을 느낄 수 있다. 그런 점을 감안하더라도 독자들이 이 소설의 스토리에 빠져드는 이유의 하나는 ‘테러를 일으키는 장면의 묘사가 너무나 생생하여 저절로 눈길이 멈추어지는 리얼리티’에 있다. 200자 원고지로 2천400매가 넘는 대작이건만 파트(章)를 나누지도 않았고, 일체의 소제목마저 달지 않았다. 그럼에도 술술 페이지가 넘어가는 이 장편소설의 이채로운 매력, “무라카미 류만이 쓸 수 있는 유일무이의 작품”이라는 평가가 뒤따르는 소이(所以)다.

    사실 무라카미 류에게 있어서 소설의 형식과 상상력은 불가분하게 맺어져 왔다. 그가 언젠가 “현대의 들리지 않는 외침을 번역하는 것이 소설의 사명”이라고 단언한 것도 어딘가 선이 닿아 있음을 느끼게 해준다. 그 점, 이번 소설의 마지막 대목에 나오는 “기록하라, 눈앞의 사실을 기록하라”는 구절이 특히 인상적으로 다가온다. 그래서 독자들은 이번 신작에 ‘무라카미 류다운 걸작!’이라는 찬사를 보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