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왕정 비판하던 기자에서 자유 민주주의 탄생 시킨 초대 대통령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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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목숨을 바칠 각오로 대한제국의 자유와 독립을 나 혼자라도 지키며, 우리 2천만 동포 중 1999만 9999명이 모두 머릴를 숙이거나 모두 살해된 후에라도 나 한 사람이라도 태극기를 받들어 머리를 높이 들고 앞으로 전진하며,  한 걸음도 뒤로 물러나지 않을 것을 각자 마음속에 맹세하고 다시 맹세하고 천만 번 맹세합시다" -이승만 저서 독립정신 中-


    오는 26일 한국을 건국한 초대 대통령 이승만 박사 탄신 141주년 기념 행사가 서울 중구 정동제일교회 본당에서 열린다.

    국가보훈처는 공산주의 세력 팽창에 맞서 대한민국의 자유민주주의 체제를 확고히 세운, 초대 대통령 이승만 박사의 정신을 되새기는 '건국대통령 이승만 박사 탄신 141주년 기념식'이 26일 오후 2시, 서울 중구 정동제일교회 본당에서 연다고 밝혔다.

    사단법인 건국대통령이승만박사기념사업회가 주관하는 이날 행사에는 문태선 서울북부보훈지청장, 「이승만의 토지개혁과 교육혁명」의 저자 이 호 목사 등 각계 인사와 유족, 학생, 시민 등이 참석해 추도예배형식으로 진행될 예정이다.

  • ▲ 이승만 대통령이 1948년 8월15일 대한민국 건국선포식에서 연설하고 있다. ⓒ뉴데일리DB
    ▲ 이승만 대통령이 1948년 8월15일 대한민국 건국선포식에서 연설하고 있다. ⓒ뉴데일리DB


    ◆이승만의 일생, 개화주창하던 기자에서 자유민주주의 이양한 초대대통령으로…

    건국대통령 우남 이승만 박사(1875. 3. 26 ~1965. 7. 19)는 황해도 평산에서 태어나 대부분의 인생을 대한민국 독립과 건국을 위해 바친 인물이다.

    이승만 박사는 조선의 관리 생활부터 시작해, 왕정 제도를 비판하는 기자, 독립운동가, 저술가, 대한민국 초대 대통령 등 파란만장한 인생을 살았다.

    이승만 박사의 첫 직업은 기자였다.

    이승만 박사가 약관 시절이던 조선 말기, 관직 부패가 횡횡하고 과거 급제가 어려워져 고민하고 있을 때 그는 선교사들의 권유로 배재학당에 입학한다. 배재학당에서 공부하던 이승만은 미국에서 귀국한 서재필에게 들은 개화사상에 감명 받아 같은 학당 학생들과 '입헌군주제 실시' 등을 주장하며 1896년 협성회를 조직한다. 이때 발간된 신문이 '협성회보'다.

    고종 황제에 대해 지속적인 비판을 하던 협성회보는 결국 정부의 탄압을 받아 폐간된다. 이승만 박사는 이에 굴하지 않고 1898년 한글로 쓰여진 한국 최초의 일간지 '매일신문'을 발행해 기자로 활동한다.

    이승만 박사는 1898년 "광무황제(고종황제)는 연령이 높으시니 황태자에게 자리를 내주셔야 한다"는 전단지를 배포해 징역 7년형을 언도받고 한성 감옥에서 옥고를 치르게 된다. 역모죄였다. 그는 수감생활동안 「독립정신」을 저술해 외교의 중요성, 낡은 사고 방식의 탈피를 주장하는 계몽, 국민 개인의 자유권을 소중히 해야 한다는 주장을 펼친다.

    이승만 박사는 선교사들의 도움으로 석방돼 1904년 11월 미국으로 건너가 조지워싱턴 대학, 하버드 대학, 프리스턴 대학에서 각각 학사·석사· 박사 학위를 받고 1910년 귀국한다.

    1912년 하와이로 근거지를 옮긴 이승만은 '태평양 잡지','태평양 주보'를 발간하는 한편 박용만, 안창호 등과 독립운동을 펼친다.

    1919년 3ㆍ1운동이 일어나고 4월에 상해에서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수립되자 임시정부 초대 대통령으로 추대됐으며, 1921년 5월에는 워싱턴 군축회의, 1933년에는 제네바 국제연맹회의에 참석해 일본의 침략행위를 폭로하기도 했다.

    1941년 12월, 일본의 진주만 공격으로 태평양 전쟁이 발발하자 임시정부 구미위원장이던 박사는 국민의 단결을 호소하는 육성방송을 시작한다. 일본이 패망 후 1945년 10월 귀국 “뭉치고 엉키라, 뭉치면 살고 흩어지면 못 사나니 다 같이 하나로 뭉치자”는 유명한 말을 남겼다.

    1948년에는 대한민국 정부 수립을 국내외에 선포하고 초대 대통령에 취임했다. 정부에서는 박사의 공훈을 기려 1949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수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