北 기습도발에 원점타격하고 해임된 장군… 숙환으로 타계유가족 "용맹함의 상징이셨지만, 가족에겐 한없이 자애로워"
  • ▲ 4일 박정인 장군의 장례식장 모습. ⓒ 뉴데일리 정성화 기자
    ▲ 4일 박정인 장군의 장례식장 모습. ⓒ 뉴데일리 정성화 기자

    43년 전 북한의 기습 사격에 대응, 즉각 포 사격 명령을 내려 북한군 30명을 사망하게 한 박정인(육사 6기) 전 3사단장(예비역 육군 준장)이 별세했다.

    유족 측에 따르면 고인은 지난 3일 가족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숙환으로 세상을 떠난 것으로 전해졌다. 향년 88세.

    박정인 장군이 '대북 원점 타격의 원조'로 불리게 된 건, 지난 1973년 3월 7일 강원도 철원지역 비무장지대(DMZ)의 적막을 깨뜨린 총성 때문이었다.

    북한군은 559GP(경계초소)에서 DMZ 표지판 보수작업을 하던 남측 3사단 백골부대 소속 병사를 향해 기습사격을 가했다. 이 총격으로 백골부대 병사 2명이 중상을 입는 피해가 발생했다.

    북한의 무력 도발은 즉각 백골부대 3사단장이었던 박정인 장군에게 보고됐다. 박 장군은 북측에 사격중지 요청을 내렸다. 그러나 북한군은 총격을 멈추지 않았다.

    이에 박정인 장군은 즉각 휘하 사단 포병대대에 대응사격을 지시했다.

    105mm, 155mm 견인포가 적 진지를 향해 일제히 포탄을 쏟아 붓자, 겁을 먹은 적군은 즉시 달아났다.

    북한의 기습 도발에 맞서 적진을 초토화한 박정인 장군은 단숨에 영웅이 됐다. 2012년 10월 7일, 육군 12사단 37연대 1대대를 '박정인 대대'로 명명한 것도 장군의 무훈(武勳)을 기리기 위한 차원이었다.

    박 장군은 회고록 '풍운의 별'에서 당시 북한군이 한 발도 대응 포격하지 못한 것을 지적하며 "북한 공산당은 약한 자에게 강하고, 강한 자에겐 더없이 약하다"고 꾸짖기도 했다.

    이 사건은 6.25전쟁 이후 우리 군이 북한을 향해 야포 사격을 가한 최초의 사례로 기록된다. 하지만 박 장군은  이 사건 이후 한 달 만에 군복을 벗었다. 상부의 허락 없이 임의로 대응사격을 했다는 것이 이유였다.

    박 장군은 이러한 상황도 담담히 받아들였다. 오히려 "내 소신대로 행동한 것이 자랑스럽다"며 군인다운 면모를 보였다.

    박 장군의 유가족 중 한 명은 취재진에게 "아버지는 늘 '만주까지 가자'라는 말을 하셨다"며 "오로지 북진통일이 소원이셨던 분인데 통일이 못 돼 아쉬워 하셨다"고 전했다.

    또한 "군인 중의 군인, 용맹함의 상징이셨던 분이지만, 가족에겐 한없이 따뜻하고 사랑스러운 분이셨다"며 눈시울을 붉혔다.

    유족으로는 아들 홍건씨, 딸 현숙·선애·현애 등 1남 3녀가 있다. 빈소는 삼성서울병원에 마련됐다. 발인은 5일 오전 8시 30분, 장지는 대전현충원으로 확정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