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칭 군 최고사령관’ 감투 쓴 뒤 펼치는 정책마다 무능력 드러나
  • 잠수함에 탄 김정은. 꽉 차 보인다. ⓒ北선전매체 화면캡쳐
    ▲ 잠수함에 탄 김정은. 꽉 차 보인다. ⓒ北선전매체 화면캡쳐

    죽은 김정일의 중앙추도회가 끝나기 바쁘게 김정은은 자칭 군 최고사령관으로 추대(2011년 12월 30일)됨으로 후계구도를 마무리했다.

    그 이듬해인 2012년 4월 11일엔 당 대표자회의에서 제1비서자리를 꿰찼고, 이틀 후인 13일 열린 최고인민회의에서는 국방위원회 제1위원장으로 ‘선출’ 됨으로 黨·政·軍 3권을 모두 장악하게 된다. 이후 지난 4년 동안 북한을 통치, 우리가 알고 있는 오늘에 이르고 있다.

    이런 김정은의 진면모(眞面貌)를 다시 한 번 살펴보기로 한다.

    김정은은 누구인가

    알려진 대로 김정은은 1984년 1월 8일 생, 본관은 전주, 김정일과 고용희 사이의 둘째 아들이다.

    2000년대 후반부터 김정일이 후계자로 내세우는 등 차츰 영향력이 커지고 이름이 알려지기 시작했으며, 2011년 김정일 사망 후 북한의 최고통치자가 되었다.

    김정은은 현재 조선노동당 제1비서 및 조선민주주의공화국 국방위원회 제1위원장, 조선인민군 최고사령관을 역임하고 있다.

    김정은 경력

    학력은 스위스 유학, ‘김일성군사종합대학졸업’으로 나와 있으나 정상적인 교육을 받은 적이 없다. 스위스에서는 학교에 적만 걸어놓고 호화생활만 누려오다가 2001년 귀국한 것으로 전해진다.

    지금 북한이, 김정은이 김일성군사종합대학에서 고등교육을 받은 것으로 선전하고 있지만 그 역시 다른 학생들과 함께 공부한 것이 아니라 가정교사의 방문 교육을 받은 것으로 확인되고 있다.

    그래서 김정은에게는 스승은 있어도 학교를 다니며 친분을 쌓은 친구나 동창생, 선배와 후배들이 하나도 없다.

    더 구체적으로 밝히면, 김정은은 평양으로 돌아온 뒤 김정일의 지시에 다라 2002년 4월부터 2006년 12월까지 김일성군사종합대학 특설반에서 교육을 받았다. 특설반 교육이란 몇몇 교수들을 극비리에 소환해 중앙당 조직지도부 부원으로 등록한 뒤 김정일의 관저에 드나들며 가르치는 교육이다.

    김정은의 후광 고용희

    김정은이 군사종합대학에 들어 간 것은 고용희의 제안에 따른 것이며, 김정은이 군사교육을 받기 시작한 시점은 김정일의 장남 김정남이 가짜 여권으로 일본에 불법 입국하려다가 발각된 직후이다.

    이 사건으로 김정남이 김정일의 눈 밖에 나자 상황을 간파한 고용희가 재빠르게 김정은과 김정철 두 형제에 대한 군사교육을 추진, 어린 시절 스위스에서 허송세월을 보낸 김정은을 김일성군사종합대학에서 공부시킴으로 후계자의 발판을 마련했던 것이다.

    한편 북한은 2002년 여름부터 고영희에 대한 개인숭배를 군대를 중심으로 진행하기 시작하였다. 당시 ‘김정일 선군정치와 사상강군’등 고용희를 칭송하는 단행본들이 발행된바 있다.

    그리고 ‘존경하는 어머님’, ‘평양의 어머님’이라는 표현으로 고용희를 칭송하는 노래들이 대대적으로 보급되기도 했다. 고용희를 ‘나라의 어머니’로 내세우는 개인숭배는 그에게서 태어난 김정철과 김정은 가운데 한 사람이 장차 김정일 후계자로 지명될 것임을 말해주고 있었다.

    김정은의 행적

    김정은은 2002년부터 2006년 12월까지 김일성군사종합대학의 보병지휘관 3년제와 2년제 연구원 과정을 마쳤다.

    김일성군사종합대학은 연대장급 이상의 고위 군사지휘관 양성을 목적으로 설립된 곳으로 10년 이상 군관으로 활동한 사람들만 갈 수 있는 곳이다. 하지만 김정은에겐 예외였다. 수업도 집에서 개인적으로 받았으니 제대로 된 수업과정을 거쳤을 리가 없다.

    북한자료 ‘존경하는 김정은 대장동지의 위대성 교양자료’에는 “의미 깊은 2006년 12월 24일 존경하는 김정은 대장동지께서는 김일성군사종합대학 졸업증서와 휘장을 수여받으시고 주체의 선군혁명위업을 대를 이어 빛나게 완성하실 것을 굳게 다짐하시였다”고 기록되어있다.

    김정은이 장차 김정일의 후계자가 되리라는 것을 암시했던 대목이다. 이후 김정은은 김일성군사종합대학을 졸업한 이듬해인 2007년부터 김정일의 공식 활동에 동행하기 시작했다.

    김정은의 권력, 군 장악

    2007년 4월 김정은은 총정치국을 시작으로 군대장악에 달라붙었다. 한 달 전 총정치국 제1부국장에 임명된 김정각과 선전부국장 한동근 상장이 김정은의 군대 장악을 주도해나갔다.

    김정은은 2003년부터 보위사령관으로 일해 온 김원홍을 불러들여 늘 옆에 끼고 다녔다. 그에게서 군 상층부의 자질과 비리를 속속들이 전해 듣기 위해서였다.

    김정은은 아버지뻘의 김정각과 할아버지뻘의 한동근 등으로부터 깍듯한 대접을 받으며 권력의 힘을 실감하였다. 의례 세대가 바뀔 때 그러하듯, 김정각과 김원홍, 김영철 등은 김정은 후계시대를 잘 열어간다면 다음 시대에 권력 중심으로 다가가는데 문제없다고 나름의 타산들을 하고 있었을 것이다.

    김정은을 후계자로 내정한 김정일

    김정일은 김일성의 후광을 입고 자연스럽게 후계자로 받아들여졌다. 이른바 ‘미제와 일제를 타승한 백전백승의 강철의 령장’, ‘인민의 어버이’라는 이미지만으로도 그의 아들 김정일이 후계자가 되는데 반대할 사람은 그리 많지 않았다.

    그러나 김정은은 달랐다. 90년대 ‘고난의 행군’ 시기 300만 인민들이 굶어 죽은 상황에서, 또 2007년까지 복구되지 못한 파괴된 경제는 김정일의 무능력을 확인하기에 충분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김정일은 2008년 12월 24일 ‘천리마 제강련합 기업소’에서 김정은의 주도로 건설했다는 전력전기로를 보고 이제 겨우 스물네 살 밖에 안 된 김정은을 후계자로 지명했고 같은 해 8월 뇌출혈로 쓰러졌다.

    김정은의 운명이 뒤바뀔 수도 있었던 순간이었고, 김정은 수족들이 2012년을 목표로 했던 ‘후계체제 구축계획’이 수포로 끝날 수도 있었던 시점이었다.

    하지만 뇌졸중으로 쓰러진지 한 달이 넘은 2008년 9월말 김정일은 서서히 몸을 움직이기 시작하였다. 10월초에는 김일성종합대학과 평양철도종합대학 사이의 축구 경기를 관람하기도 하였다.

    이리하여 2012년 4월 태양절, 이른바 김일성 생일 백돌에 즈음해 김정일로부터 후계자로 지명 받으려던 김정은의 계획은 김정일의 중병에 의해 무려 3년이나 앞당겨지게 됐다.

    2009년 1월 8일 김정은의 스물 다섯 번째 생일날, 중앙당 조직지도부 부부장 리제강은 과장급 이상 중앙당 간부들이 모인 자리에서 김정은을 후계자로 정했다는 김정일의 ‘특별지시’를 전달했다.

    김일성의 아바타 김정은

    2010년 9월 28일 3차 당대표자회는 김정은을 세상에 알리는 회의였다. 대표자회에서 김정은은 당 중앙위원, 당 중앙군사위원회 부위원장의 감투를 썼다. 경륜이 일천하고 이제 겨우 스물여섯밖에 안된 애송이가 사실상의 ‘후계자’가 된 것이다.

    2009년 1월 김정은은 내부적으로 후계자로 정해진 이후 인민들이 가장 원하는 경제 문제를 전혀 해결하지 못한 채 2010년 9월 그들 앞에 나섰다. 인민들은 단지 호기심으로 김정은을 바라봤을 뿐, 저들의 지도자로 받아들이지는 안는 듯 했다.

    하지만 김정은 추종세력은 이 난국을, 인민들 속에 막연하게 남아 있는 김일성 향수로 극복하려고 했다.

    당 지도부 선거를 위한 당 대표자회 소집에 관한 당정치국 결정서가 발표된 2010년 6월 이후 ‘조선중앙TV’에서는 1950년대와 1960년대 김일성의 현지지도 기록영화들을 대대적으로 보여주었다.

    인민들은 영문도 모른 채 50년대와 60년대의 김일성 모습을 TV를 통해 바라보면서 김일성의 과거를 되살려 냈다. 그리고 2010년 9월 28일 당대표자회에 관한 보도화면에서 김정은은 5~60년대 김일성의 모습과 너무나 닮은 모습으로 인민들 앞에 나타났다.

    서른도 채 안된, 국정 경험도 전무한, 새파랗게 어린 상통에, 김일성을 오버랩 시킨 적중한 연출이었다.

    어린 김정은, 4년간 무얼 했나 살펴봤더니….

    이렇듯 장황하게 김정은을 소개한 것은 그의 경력 어디를 봐도 북한의 최고통치자가 될 자질도, 능력도, 경험도 없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함이다.

    황장엽 前북한 노동당 비서는 김정일 후계자 문제가 한참 거론되던 시기, “북한의 독재시스템이 워낙 잘 돌아가기 때문에 열 살짜리 아이를 후계자로 앉혀놔도 전혀 문제될 것이 없다”고 말한바 있다.

  • 김정일 앞에 바짝 얼어있는 김정은. ⓒ北선전매체 화면캡쳐
    ▲ 김정일 앞에 바짝 얼어있는 김정은. ⓒ北선전매체 화면캡쳐

    그렇게 북한의 최고통치자가 된 김정은은 국정운영경험 부재 등으로 실수에 실수를 거듭한다. 최고 권력자가 된 김정은이 범한 첫 번째 실수는 2012년4월 13일 이른바 ‘인공지구위성’ 보자기를 씌운 ‘광명성 3호‘ 발사였다.

    하지만 어설픈 기술로 실패하고 말았다. 이에 오기를 부리듯 그해 12월 12일 ‘광명성 3호 2호기’를 발사했다. ‘광명성 3호 2호기’는 궤도에 오르기는 했으나 워낙 작동을 염두에 두지 않은 가짜위성으로 지금은 우주 고아로 떠돌고 있다.

    ‘광명성 3호 2호기’라는 가짜위성보다 그것을 궤도에 올려놓은 ‘은하 3호’라는 운반체, 즉 장거리 미사일 성능개선이 당시 발사의 기본 목적이었다. 장거리 미사일 성능이 ‘개선’되었다고 확인한 김정은은 다음해 2013년 2월 12일 저주의 3차 핵 시험을 감행하였다.

    그리고 미국과 일본, 심지어는 중국을 포함한 국제사회로부터 격리, 배격, 제재의 쓴맛을 보고 있는 중이다.

    권좌에 앉은 김정은의 두 번째 실수는 장성택 처형이다. 김정일로부터 최고 권력을 상속받은 애송이 김정은은 자기의 체제 확립을 도와준 고모부 장성택을 처형함으로 인간으로서의 양심과 도덕을 던져 버렸고 자타가 공인하는 살인마가 되었다.

    김정은의 지시에 의해 북한 노동신문은 12월 9일 1면에서 장성택의 체포소식을 전했다.

    신문은 장성택이 숙청된 이유에 대해 “최근 당 안에 배겨 있던 우연분자, 이색분자들이 주체혁명위업계승의 중대한 력사적 시기에 당의 유일적 령도를 거세하려 들면서 분파책동으로 자기 세력을 확장하고 감히 당에 도전해 나서는 위험천만한 반당, 반혁명적 종파사건이 발생하였다”고 밝혔다.

    이후 12월 13일 신문은 “12일 장성택을 처형했다”고 밝히면서 2면에 재판을 받는 장성택의 모습이 담긴 사진도 게재했다. 또한 신문은 장성택이 처형된 핵심 이유가 “군대를 동원한 군사정변을 꾀한 것이다”고 밝혔다.

    너무도 신속하게, 그리고 허무하게 끝나버린 장성택 처형사건을 보면서 북한주민들은 “이렇게 피도 눈물도 없이 매정한 것이 인생사인가” 싶다면서 김정은을 비난했다. 간부들은 간부들대로 김정은과 함께 해야 하는 자신의 미래를 두렵게 바라보았고, 김정은과 보이지 않는 마음의 벽을 쌓아갔다.

    한편 국제사회는 ‘김정은’하면, “성정이 급하고 매정하며 포악한 것이 분명하다”는 평을 내렸다.

    장성택 처형을 전후해 김정은은 자신의 마음에 들지 않는 사람들을 가차 없이 처벌, 처형했으며 이 처벌자 그룹에는 총참모장 리영길, 인민무력부 부부장 김 철, 인민무력부장 현영철, 최룡해 등이 속했다.

    김정은의 세 번째 실수는 처 리설주를 대동하고 주민들 앞에 나타난 것이다. 김정일처럼 김정은도 평소 여자관계자 복잡했으며 특히 배우들에 대한 집착이 대단했던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려 심, 현송월과 같은 여배우들과 놀아나던 김정은은 결국 리설주를 부인으로 맞아 인민들 앞에 ‘소개’했지만 그 순간 반세기동안 북한의 선전선동으로 쌓아졌던 우상화의 탑이 붕괴됐다.

    김일성의 어머니 강반석, 김정일의 어머니 김정숙 등으로 ‘혁명의 군자탑’을 쌓았던 ‘어머니의 우상’을 단숨에 깨어버린 것이다.

    지금 북조선 인민들에게 김정은은 위대하지도 않고, 현명하지도 않다. 나와 꼭 같은 젊은이, 혹은 나처럼 가정과 아내를 거느린 한 남성에 지나지 않는다. 그런 김정은이 이른바 위대성 교양자료를 통해 세 살 때 운전을 하고 다섯 살 때 주변사람들을 깜짝 놀래우는 사격술을 보였다고 하면 누가 믿는단 말인가.

  • 리설주와 함께 현지지도를 간 김정은이 헤벌쭉 웃고 있다. ⓒ北선전매체 화면캡쳐
    ▲ 리설주와 함께 현지지도를 간 김정은이 헤벌쭉 웃고 있다. ⓒ北선전매체 화면캡쳐

    네 번째로 김정은은 북한의 경제를 파국으로 내 몬 화폐개혁의 책임에서 벗어날 수 없다.

    김정일과 김정은은 무리한 ‘화폐교환’ 추진으로 경제를 엉망으로 만들었다. 이들은 2009년 11월 30일 낡은 돈과 새 돈을 100:1의 비율로 강제 교환하는 ‘화폐교환’을 단행했다.

    화폐교환의 목적은 인민들이 보유한 통화량을 흡수하여 소비시장의 물가가 올라가는 것을 억제하고, 사적 시장거래를 통제함으로 국영유통망을 강화하기 위한 것이었다.

    하지만 현재까지 물가는 더욱 올라가고 있고, 국영유통망의 공급 능력은 확대되지 않은 채 사적 시장 거래만 위축되어 인민생활이 더욱 어려워지고 있다. 그리고는 그 책임을 엉뚱한 사람에게 물어, 박남기 前노동당 계획재정부장을 총살해 버렸다.

    이 외에도 김정은의 크고 작은 실수는 헤아릴 수 없이 많지만, 반듯이 짚고 넘어가야 할 부분은 “내가 모든 것을 다 할 수 있고, 내가 아니면 북조선에서 어떤 일도 되지 않는다”고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과거 독재자 김정일은 1996년 12월 7일 김일성종합대학 창립 50돐 기념행사에서 “우리의 식량난이 가슴 아플 정도로 심각하며 이로 인해 비사회주의적현상이 발생하고 있다”고 말한바 있다.

    그러면서도 그는 식량난의 책임을 간부들, 특히 경제실무 책임 일군들에게 떠넘기며 다음과 같이 말하기도 했다.

    “혼자서 당과 군대를 책임지는 것도 바쁜데 경제실무사업까지 맡아볼 수 없고, 경제실무사업은 당중앙위원회 책임일군들이 책임을 지고 수행해야 합니다. 내가 혼자서 당과 군대를 비롯한 중요부분만 틀어쥐어야지 경제실무사업까지 맡아보면 혁명과 건설에 돌이킬 수 없는 후과를 미칠 수 있습니다. 수령님(김일성)께서는 생전에 나에게 절대로 경제 사업에 말려들어서는 안 된다고 하시면서 경제 사업에 말려들면 당 사업도 못하고 군대 사업도 할 수 없다고 여러 번 당부하시였습니다." 

    결국 통치는 하되 책임은 지지 않겠다던 김정일의 수에 한참 못 미치는 행동패턴을 김정은이 보이고 있다는 이야기다.

    한편 김정은은 보여주기식, 치적 쌓기를 위해 자신이 직접 나서서 물놀이장 건설도 지도하고, 승마장건설도 지도한다. 자라농장이며 과학자아파트 건설현장 시찰이며…. 김정은이 싸다니지 않는 곳이 거의 없다.

    아직은 평양시 아파트 붕괴사고와 같은 책임을 남들에게 떠넘기고 있지만, 시간이 흐름에 따라 김정은 책임론은 반드시 나오게 되어 있다.

    여섯 번째로 김정은은 돈주머니를 살피지도 않고, 김일성, 김정일을 능가할 만큼의 외화를 사용하고 있다.

    2009년 1월 김정은은 당내부적으로 ‘후계자’로 통보된 이후 4천여 만 달러를 들여 김정일, 김일성 생일 등 잔치를 벌여놓고 축포와 레이저 조명을 동원한 대형 불꽃놀이를 벌려왔다.

    그리고 김정일과 김정은의 초호화별장과 우상화물을 관리하는데 매년 3억 달러 이상을 탕진하고 있다.

    김정일과 김정은은 핵무기와 미사일 개발에 83억 4,000만 달러를 처넣었다. 2006년 7월과 2009년 4월, 2012년 4월과 12월에는 한번 쏘는데 수백에서 수천만 달러가 들어가는 장거리로켓을 발사했고 2006년 10월과 2009년 5월, 그리고 2013년 2월 저주의 핵 시험으로 조선반도와 동북아시아, 나아가 세계평화와 안정을 극도로 위협했다.

    반면 미국과 일본, 유럽과 국제사회는 북한에 대한 제재를 더욱 강화하고 있으며 한국도 5.24조치 후 북한에 대한 지원을 전혀 하지 않고 있다. 곧 외화가 고갈되고 김 부자가 그동안 벌여온 선물정치도 끝장날 판국이 되어 버렸다. 

    *  *  *

    김정은으로서는 실수를 더 많이 자처해야 하고, 대한민국과 국제사회는 ‘어린 김정은의 실수’를 더 크게 유발시켜야 한다.

    장성택 처형 등으로 집권초기의 초조함에서 탈피한 대신 작금의 김정은이 자신감에 넘쳐 보이지만, 따지고 보면 북한 주민들의 외면과 권력 상층부의 과장된 충성심에서 비롯된 광기에 다름 아니다.

    이러한 광기는 자연히 또 다른 실수와 연계되게 되어 있으며 그러다보면 주민들은 ‘어린 놈’의 실체를 간파하게 되고, 간부들은 간부들대로 미래가 보이지 않는 김정은과 거리를 두게 될 게 뻔하다.

    이런 김정은을 타도하지 말라는 법은 없다.

    글을 마감할 쯤에 모란봉 악단의 베이징 철수소식이 들려왔다. 김정은의 또 다른 실수다.

    ‘집에서 새는 바가지 밖에서도 샌다’는 속담 그른데 없고, 수준미달의 김정은의 실수는 앞으로도 예기되어 있다는 반증일 것이다.


    [자유북한방송 -  뉴데일리 특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