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갈래 길이 나 있었다… 李박사가 간 길이 우리의 운명을 바꿨다"
  • 새누리당 김무성 대표최고위원이 지난 7월 17일, 이승만 박사 서거 50주기 추도식에서 참석해 분향하고 있다. ⓒ뉴데일리 정상윤 기자
    ▲ 새누리당 김무성 대표최고위원이 지난 7월 17일, 이승만 박사 서거 50주기 추도식에서 참석해 분향하고 있다. ⓒ뉴데일리 정상윤 기자

    대한민국과 중화인민공화국의 자유무역협정이 30일 드디어 국회에서 비준됐다.

    65년 전 이 나라 강산에서 각자 백만 대군을 동병(動兵)해 일전을 겨뤘던 미국과 중공이다. 지금은 세계 경제를 움직이는 두 초강대국(G2)으로 성장했다. 그 두 나라의 직접 충돌의 무대가 됐던 우리나라가 세계 10대 교역국 중에서는 유일하게 두 나라 모두와 FTA를 통해 하나의 시장으로 묶이게 됐다는 것은 역사의 아이러니다. 새삼 이를 미리 내다본 건국대통령 우남 이승만 박사의 혜안에 무릎을 치게 된다.

    폴 케네디가 〈강대국의 흥망〉에서 추산한 바에 따르면, 영국에서 산업혁명이 발원하기 전까지만 해도 중국의 총생산은 전유럽을 압도했다. 그런데 영국에서 산업혁명이 시작되고 이 흐름이 주변 서구 열강으로 번져나가면서 서세동점(西勢東漸)의 제국주의 시대가 열렸다.

    중국은 아편전쟁(1840~1842)으로, 애로호 전쟁(1856~1860)으로, 다시 청프전쟁(1884~1885)에 의화단 전쟁(1899~1901)으로 만신창이가 되고, 반식민지 상태로 전락했다. 1949년 대륙을 일통한 마오쩌둥이 중화인민공화국의 수립을 선언할 때까지 주(周)에서 진한(秦漢)을 거쳐 당송명(唐宋明)으로 이어지는 유구한 문명의 역사는 퇴색하고, 서구 열강에 의해 반문명국 취급을 받았다.

    반면 산업혁명을 통해 도약한 서구 문명은 대서양을 건너 미국에서 절정을 맞았다. 일제가 대륙에서 벌인 마지막 발악이었던 대륙타통작전에 중국이 한창 맞서고 있던 1944년 7월, 44개 국은 미국 뉴햄프셔주 브레튼우즈에서 모여 달러의 금태환과 다른 모든 국가의 환율을 달러 대비 고정, 그리고 국제통화기금(IMF)의 창설을 내용으로 하는 협정에 동의했다.

    35달러를 금 1온스로 바꿀 수 있는 미국 달러만이 진정한 통화가 됐다. 영국의 파운드 스털링화가 오랜 기축통화의 지위를 미국에 공식적으로 넘긴 셈이다. 2차대전이 끝난 뒤 미국은 본격적으로 자유민주주의와 자유시장경제, 세계시장의 수부(首府)로서의 역할을 수행하게 됐다.

    반면 중공은 2차대전이 끝난 뒤 국공내전을 통해 1949년, 장제스(蔣介石)의 국민정부를 대만으로 타도했다. 1944년 브레튼우즈 협정에 서명했던 중화민국의 중앙은행 총재 쿵샹시(孔祥熙)는 미국으로 망명했고, 대륙은 국제통화 및 세계시장 시스템과 단절됐다.

    1950년부터 53년까지 한반도에서 미국과 격돌했던 중공은 이후, 미국의 자유민주주의·자유시장경제·세계시장에 맞서 자기만의 세계를 구축하기 시작했다. 1958년 마오쩌둥은 "7년 안에 영국을 뛰어넘고, 15년 안에 미국을 따라잡으라(七年超英, 十五年赶美)"는 교시를 내리면서 대약진운동에 시동을 걸었다.

  • 세계시장으로의 길을 연 이승만 박사와 박정희 전 대통령의 공을 기려 지난달 9일부터 22일까지 미국 뉴욕 타임스퀘어에 게시된 광고 영상. ⓒ뉴시스 사진DB
    ▲ 세계시장으로의 길을 연 이승만 박사와 박정희 전 대통령의 공을 기려 지난달 9일부터 22일까지 미국 뉴욕 타임스퀘어에 게시된 광고 영상. ⓒ뉴시스 사진DB

    농업생산량·강철생산량과 같은 구체적인 수치에서 영미(英美)를 따라잡으라는 구체적인 지시가 하달됐다. 일종의 집단농장인 인민공사 체제는 농업생산량을 늘리기는 커녕 극도로 떨어뜨렸다. 강철 생산을 늘려야 하는데 대규모 제철소를 지을 자본도 기술도 없다보니 토법고로(土法高爐)라는 괴이한 정책이 강제됐다.

    촌락마다 할당된 강철 생산량을 맞출 길이 없다보니 농기구는 물론 숟가락, 젓가락까지 원시적인 용광로 안으로 들어갔다. 이렇게 해서 만들어진, 아무 짝에도 쓸모없는 고철이 강철로 둔갑해 중난하이(中南海)에 보고서로 올라갔다.

    나날이 급증하는 강철생산량을 보며 마오 본인도 어리둥절했던 모양이다. 마오의 주치의였던 리즈수이(李志綏)가 집필한 〈모택동의 사생활〉에 따르면, 마오는 "시골에서 만든 용광로들로 이만큼 강철을 만들 수 있다면 서구 열강들은 모두 바보인가"라며 "그들은 왜 큰 돈을 들여 커다란 제철소를 만드는 것인가"라고 의문스러워했다고 한다.

    파국은 머지 않았다. 1959년 루산(廬山)에서 열린 제8차 중국공산당 중앙위원회 전체회의에서 대약진운동을 비판한 펑더화이(彭德怀)에 대해 마오는 "당이 이 자리에서 나를 지지하지 않으면, 나는 다시 홍군을 이끌고 제2의 대장정을 시작하겠다"고 압박함으로써 굴복시키는 데 성공했지만, 이듬해부터 시작된 대흉작에는 버틸 도리가 없었다.

    토법고로로 인한 농기구의 멸실과 인민공사에 따른 농업 의욕의 저하에 가뭄과 홍수가 겹치면서 1960~61년 중공은 사상 최악의 작황을 기록했다. 공식집계된 '굶어죽은 인구'만 5000만 명. "사람이 굶어죽는 것은 중국 역사에 흔했던 일"이라고 버티던 마오는 국가주석에서 물러날 수밖에 없었고, 이후 실권을 되찾기 위해 문화대혁명이라는 일종의 친위 쿠데타를 일으키는 등 대륙을 극도의 혼란으로 몰고갔다.

    이러한 대혼란은 덩샤오핑(鄧小平)이 1978년 집권해서 백기를 들면서야 비로소 극복될 수 있었다. 덩샤오핑은 이듬해 선전(深圳)을 경제특구로 지정해 개방하면서 "검은 고양이든 흰 고양이든 쥐만 잘 잡으면 그만(黑猫白猫)"이라는 흑묘백묘론을 제시함으로써 자유시장경제·세계시장에 복귀할 뜻을 내비쳤다.

    공교롭게도 중공이 백기를 내걸고 세계시장에 복귀할 뜻을 내비치던 무렵은, 미국이 세계시장에서의 압도적인 우월적 지위를 상실해가던 시점과 일치했다. '위대한 사회'라는 기치를 내건 린든 존슨의 복지 정책과 베트남 전쟁은 재정 적자를 심화시켰고, 미국은 도저히 35달러로 금 1온스를 내주는 금태환제를 유지할 수 없는 지경에 몰렸다. 존슨의 뒤를 이은 리처드 닉슨은 1971년 8월, 긴급 기자회견을 통해 달러의 금태환 정지를 선언함으로써 타월을 던졌다.

    그로부터 30여 년, 세계시장에서 차지하는 미국의 지위가 예전보다 많이 내려왔다고는 해도 여전히 막강한 소프트파워를 기반으로 세계 제1의 경제대국의 위치를 고수하고 있으며, 중공은 박정희 정부의 개발독재를 흉내내 고도의 압축성장을 함으로써 미국에 뒤이은 세계 제2의 경제대국으로 올라섰다.

  • 이승만 박사 서거 50주기를 맞아 미국 우정국에서 발행한 기념 우표. ⓒ뉴시스 사진DB
    ▲ 이승만 박사 서거 50주기를 맞아 미국 우정국에서 발행한 기념 우표. ⓒ뉴시스 사진DB

    세계시장에 합류해 있는 모든 나라, 전 세계의 사람들의 소비 생활이 이 G2로부터 자유롭지 못한 게 현실이다. 애플의 아이폰을 쓴다고 하면, 제품 설계와 기획·마케팅은 미국의 캘리포니아에서 이뤄지지만, 제조와 생산은 중공 광둥성의 선전에서 이뤄지고 있다. 미국의 대평원에서 수확된 밀로 만든 빵을 먹고, 중공의 섬유공장으로부터 비롯된 옷을 입고 다니고 있다. 진정한 의미의 세계화가 실현된 것이다.

    애덤 스미스가 일찍이 〈국부론〉에서 분업에 관해 논하면서 "한 사람이 핀을 만드는 18개의 전체 공정을 홀로 맡는다면 하루에 20개를 만들기도 어렵지만, 열 명이 이를 분업해서 하는 작은 공장에서는 하루에 4800개의 핀을 만들고 있었다"며 "한 사람당 480개의 핀을 만드는 셈이니, 분업의 효율은 무려 24배"라고 감탄했다.

    영국의 영세한 공장에서 이뤄지던 분업이 이제 전지구적 차원에서 전개되고 있다. 그리고 우리나라도 식민 지배와 전쟁의 참화로부터 벗어나, 이 세계시장과 전지구적 분업의 한 귀퉁이를 차지했다. 더글러스 맥아더 원수는 6·25 전쟁으로 초토화된 서울을 돌아보면서 "이 나라를 복구하려면 최소한 100년은 걸릴 것"이라고 장담했지만, 반 세기 만에 세계 10대 교역국의 위상을 차지하고, 이제는 전쟁 때 격돌했던 두 초강대국인 미국·중공과 FTA를 체결하기에 이른 것이다.

    일찌감치 자유민주주의와 자유시장경제, 세계시장을 우리의 나아갈 길로 천명했던 이승만 박사의 선견지명에 놀라게 된다.

    송병락 서울대학교 경제학부 명예교수의 〈한국경제론〉에 따르면, 광활한 국토와 무궁무진한 천연자원을 가진 러시아가 공산주의라는 희대의 역사적 대실험으로 한 세기에 가까운 세월을 낭비하지 않았더라면, 중공이 30여 년을 헛되이 보내지 않았더라면 세계시장에서 우리의 설 자리는 없을 수도 있었다. 남미가 우리나라처럼 적극적으로 세계시장을 겨냥하는 수출주도형 성장전략을 채택하지 않고 수입대체전략을 채택함으로써 주저앉은 것도 우리에게는 행운이었다.

    하지만 그 무엇보다도 우리가 스스로 자유민주주의와 자유시장경제, 세계시장을 겨냥하는 수출주도형 성장전략을 선택하지 않았더라면 아무리 외부에서 많은 행운이 겹쳤다 하더라도 만사휴의(萬事休矣)일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누가 그 길을 선택했는가. 누가 그러한 방향을 설정했는가.

    해방 직후의 혼란 속에서, 유교적 평등주의가 뿌리깊이 남아 있는 이 땅에서 많은 사람들이 뭣도 모르면서 사회주의를 제창할 때, 홀로 자유민주주의와 자유시장경제, 세계시장의 우월성을 확신했던 이가 이승만 박사다. 1955년, 전쟁 직후의 그 어렵던 상황에서도 서둘러 IMF에 가입해, 없던 외환을 쪼개 1250만 SDR(특별인출권)을 확보한 것도 이승만 박사가 아니고서는 발휘할 수 없는 혜안이리라.

  • 전시에도 자유민주주의와 자유시장경제, 세계시장에 대한 확신을 놓지 않은 이승만 박사가 6·25 전쟁 중 대구에서 국회 개회 연설을 하고 있다. ⓒ뉴시스 사진DB
    ▲ 전시에도 자유민주주의와 자유시장경제, 세계시장에 대한 확신을 놓지 않은 이승만 박사가 6·25 전쟁 중 대구에서 국회 개회 연설을 하고 있다. ⓒ뉴시스 사진DB


    만에 하나, 우리나라가 이승만 박사가 설정한 길로 향하지 않고, 로버트 프로스트의 시에 나오는 글귀마냥 '가지 않은 길'로 향했다면 어떠했겠는가.

    공산주의를 선택해 소련의 위성국으로 전락했다면, 일제 치하 35년의 식민 시대에 더해 다시 그만큼의 기간을 헛된 실험에 소모했을 것이다. 소련이 붕괴한 뒤 뒤늦게 자유화 조치에 나선들 폴란드·체코만큼 성장하기도 힘들었으리라. 그들은 지리적으로 유럽에 있어서 서구 선진제국의 경제적 수혜를 입기에 용이하고, 기본적으로 우리나라처럼 1945년 종전 시기에 절대빈곤 선상에서 출발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나마도 이것은 행운이 따르는 경우를 상정한 것이고, 만일 공산주의조차 아닌 북한식 삼대세습 봉건 전체주의 체제에 편입됐다면 지금 우리가 어떠한 삶을 살고 있을는지는 긴 설명이 필요 없다. 저 휴전선 너머 북쪽을 보라.

    로버트 프로스트는 '가지 않은 길'을 "두 갈래 길이 숲 속으로 나 있었다. 그래서 나는 사람이 덜 밟은 길을 택했고, 그것이 내 운명을 바꾸어 놓았다"고 마무리지었다.

    그 말대로다. 이승만 박사는 당시 제3세계 신생독립국들 사이에서 유행성 역병처럼 번지던 공산주의를 단호히 배격하고, '사람들이 덜 밟은 길' 자유민주주의와 자유시장경제, 그리고 세계시장을 선택했다. 그것이 우리의 운명을 바꾸어 놓았다.

    우리나라가 한 손으로 세계 제1의 경제대국인 미국의 손을 잡고, 다른 손으로 그 뒤를 바짝 추격하고 있는 중공의 손을 잡아서, 이미 FTA를 체결한 유럽연합(EU)까지 합하면 우리나라의 경제영토가 전세계의 74.6%까지 넓어진 날, 공교롭게도 세계시장은 다시 한 번 대변혁을 예고하고 있다.

    IMF의 SDR 바스켓에 중공 위안화가 편입된 것이다. 1944년 성립한 브레튼우즈 체제는 미국 달러화를 유일한 금태환 통화로 하고, 다른 모든 통화는 미국 달러와 고정된 환율을 갖도록 했는데, 이는 1971년 리처드 닉슨의 금태환 정지 선언으로 붕괴됐다.

    이렇게 되자 현물과의 태환 가치가 사라진 미국 달러화에 IMF SDR의 독점적 지위를 부여하는 게 옳은지 근본적인 의문이 제기됐다. 이에 1976년 자메이카의 수도 킹스턴에서 열린 IMF 잠정위원회에서는 SDR의 기능을 재고해 여러 통화를 혼합하는 바스켓을 구성하기로 하고, 미국 달러·영국 파운드·프랑스 프랑·독일 마르크·일본 엔의 5개 통화를 선정했다.

  • 전시에도 자유민주주의와 자유시장경제, 세계시장에 대한 확신을 놓지 않은 이승만 박사가 경기도의회 의원들과 환담을 나누고 있다. ⓒ뉴시스 사진DB
    ▲ 전시에도 자유민주주의와 자유시장경제, 세계시장에 대한 확신을 놓지 않은 이승만 박사가 경기도의회 의원들과 환담을 나누고 있다. ⓒ뉴시스 사진DB

    애당초 미국 달러 42%, 영국 파운드 13%, 프랑스 프랑 13%, 독일 마르크 19%, 일본 엔 13%의 비율로 구성됐던 SDR 바스켓은, 이후 각국의 경제적 위상 변화와 유로존 통화 동맹 등의 영향으로 2000년, 미국 달러 39%, EU 유로 32%, 일본 엔 18%, 영국 파운드 11%로 변화했다.

    이런 상황에서 IMF 집행이사회는 30일(현지시각) 미국 워싱턴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중공 위안화의 SDR 바스켓 편입을 발표했다. 편입 비중은 11%로 미국 달러·EU 유로에 이은 세 번째의 지위다. 위안화의 SDR 바스켓 편입에 따라, 각 통화의 바스켓 비중은 미국 달러 42%, EU 유로 31%, 영국 파운드 8%, 일본 엔 8%로 재조정됐다.

    중공의 위안화가 공식적으로 국제적인 기축통화 중의 하나로 인정받게 된 것이다. 물론 가까운 시일 내에 기축통화이자 국제결제통화로서 미국 달러화의 압도적인 지위를 위협하는 일이 일어나지는 않겠지만, 세계 산업 시장에서의 G2 체제를 국제 금융 시장에서 뒤늦게 추인했다는 점에서 그 의의는 작지 않다는 지적이다.

    중공 위안화의 SDR 바스켓 편입에 발맞춰, 우리 정부는 오는 12월 중순 중공의 상하이 유가증권시장에서 위안화표시 외국환평행기금채권(외평채)을 발행할 예정이다. 규모는 30억 위안 정도로, 한화로 환산하면 6000억 원에 이르는 규모다.

    중공은 채권 등 금융시장을 점진적으로 개방해왔으나, 외국이 위안화로 표시된 국채를 중공에서 발행한 사례는 아직까지 없었다. 우리나라가 첫 테이프를 끊게 됨과 동시에 이는 두 가지 지점에서 중요한 의미가 있는 것으로 평가된다.

    첫째로는, 외평채 발행으로 확보한 위안화가 외환보유액에 편입된다는 점이다. 중공 위안화의 IMF SDR 바스켓 편입이 확정된 상황에서, 우리나라 외환보유액이 다변화하는 출발점이 될 것으로 전망된다.

    둘째로는, 한중 FTA가 비준된 상황에서 정부가 앞장서서 중공에서 위안화 표시 채권을 발행함으로써 향후 우리나라 개별기업이 중공에서 성공적으로 위안화 표시 회사채를 발행할 확률이 높아졌다는 점이다.

    이로써 우리나라 경제는 더욱 세계시장과 긴밀히 밀착하고, 국제적인 자유시장경제 속에서 톱니바퀴처럼 맞물려 돌아가게 됐다. 애덤 스미스의 이론이 밑바탕에 깔려 있지만, 그조차 살아서 봤다면 다소 겁낼 정도로 거대한 규모의 국제적 분업 구조 속에서 '하청 국가'를 운운하며 주변부자본주의론이니 신식민지국가독점자본주의론이니를 읊조리는 것은 참으로 허망하고 헛된 일이다.

    한반도에서 대결을 벌였던 두 나라와 우리가 모두 FTA를 체결하고, 그들의 영토를 우리의 경제 영토로 삼는 일, 이승만 박사가 확신을 가지고 선택했던 자유민주주의와 자유시장경제, 세계시장의 길을 걸어오지 않았더라면 현실화될 수 있는 일이었을까. 이승만 박사의 탄신 140주년과 서거 50주기를 맞아 이뤄지는 이 거대한 격동의 시기에, 이날을 확신하고 내다봤던 혜안이 우리 시대에 새삼 아쉽고 그리워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