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그들이 갔다... 그리고 남은 것은
    재평가? 이것만은 꼭 짚고 넘어가자

    이 덕 기 / 자유기고가


    두 사람이 있었다.

    성은 김(金)이요, 이름은 DJ 그리고 YS.

    누구를 먼저 호칭하느냐까지 경쟁하는 상대였던 만큼, 오해가 없도록 알파벳 순 또는 먼저 가신 순(順)으로 쓴다.

    한 사람은 6년여 전에, 한 사람은 엊그제 세상을 떴다.

    두 사람 다 한때는 ‘북악(北岳) 산장’의 주인이었다.


  • 헌데 나중 사람이 세상을 뜨고 나니, 두 사람이 마치 대한민국의 구세주(救世主)였던 듯이 추켜세우고 있다.

    그 두 사람의 언저리들은 물론 이런 저런 언론들까지도 덩달아서...

    망자(亡者)들에 대한 예우(禮遇)야 ‘동방예의지국’의 전통이라지만, 장지(葬地)인 국립현충원의 두 사람 묘(墓)자리까지 명당(明堂)이니 어쩌니 지껄여대는 걸 보노라면 민망하기 그지 없다.

    그 두 사람 중 하나는 천주교인, 다른 이는 개신교 신자다.

    모두 기독교인이니 속칭 명당이든 아니든 크게 따질 바가 아닐텐데...

    망자(亡者)가 명당(明堂)에 묻히면 자손들에게 발복(發福)한다고 한다.

    그런데 그 두 사람이 최고 권좌에 앉아 있던 시절, 인사에 개입하여 전횡(專橫)을 일삼고 천문학적 규모의 비리·뇌물 사건에 연루됐던 자식들까지 만약에 정말 그렇게 복 받는다면 궁민(窮民)들의 마음은 어떨까?
     
    나중 세상 떠난 사람의 장례와 더불어 이 두 사람에 대해 다시 평가·조명해야 한다는 말이 그들의 언저리(옛 졸개들)에서 나온다고 한다.

    덩달아 일부 언론도 호들갑을 떨고 있다.

    무얼 어찌하겠다는 건지 의문이 가지만, 굳이 하려거든 이런 일들도 한 번쯤은 돌아보길 바란다.

    바로 두 사람이 각각 ‘북악(北岳) 산장’의 주인 노릇을 하면서, 북녘 세습독재의 손아귀에 핵 무기를 쥐어주게하는 결정적인 계기와 조건을 직·간접적으로 만들었다는 사실이다.

    한 사람은 동맹국이 북녘의 핵 시설 제거를 위해 폭격을 해야 한다는데도 극구 반대했다.

    이후에 또 한 사람은 이른바 ‘햇볕정책’이라는 미명하에 다 무너져가는 세습독재자에게 막대한 자금과 물자를 제공하여 그의 숨통을 틔어주고 결과적으로 핵 무기 개발을 도왔다.

    비록 지난 일에 가정(假定)은 없다지만, 결코 그냥 묻어둬서는 안 된다.

    흔히 세간에서는 이 두 사람을 각각 ‘행동하는 양심(良心)’과 ‘대도무문(大道無門)’의 정치인이라고 한다.

    하지만 그들의 권력을 향한 끈적끈적하고 치열한 욕망을 보노라면 가히 “행동하는 욕심(慾心)”, 그리고 “대도무문(大盜無門)”의 경지라 할 수 있었다.

    최고 권좌(權座)를 향한 불타는 의지만은 어쨋든 평가 받을 만했다.


  • 꽤 오랜 시간이 흐른 지금, 그리고 두 사람이 세상을 떠난 이 시점에서 마치 대한민국 민주주의를 처음 만들었거나, 또는 이 땅 ‘민주화의 공(功)’을 독차지해도 되는 양 떠받들려는 세력들이 있다. 그러나...

    ‘공(功)’이란 어떤 일를 이루어 그것의 결실을 궁민(窮民)들에게 대부분 베풀고 나누어 주었을 때 성립하는 것 아닌가?

    그런데 이 두 사람의 주장과 행적을 곰곰이 살펴보면, “대한민국 민주화=내가 ‘북악(北岳) 산장’ 주인 되는 것”이란 일관된 철학과 행동 논리가 있었다.

    그리하여 그 결과로 ‘북악(北岳) 산장’의 주인 자리를 꿰차고 그 권력을 언저리·떨거지들과 나눠가졌으니, 이른바 ‘민주화라는 그럴듯한 사업’을 벌여 나름대로 ‘수익(收益)’을 챙긴 것이라 해야 맞다.

    그런 건 ‘공(功)’이라고 하지 않는다.

    그 동안 여러 차례 죽을 고비를 넘기며 고초(苦楚)도 자주 겪었지 않았느냐고 반문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 최고 권좌를 차지하려면 그만큼의 투자는 어찌보면 당연하다.

    더욱이 권좌를 차지하고 난 이후 전부 보상(報償)받지 않았는가 말이다.

    몇 배, 아니 몇 십 배 이상으로...

    따라서 대한민국 ‘민주화의 공(功)’이 결코 그들에게만 돌아가서는 안 된다.

    그리고 한 가지 더....

    이 나라에서 ‘민주화라는 사업’를 벌려 선거(選擧)로써 ‘북악(北岳) 산장’을 차지할 수 있다는 확신과 집념을 유지할 수 있었던 이유가 무엇인지 그 두 사람이 살아생전에 깊이 성찰(省察)해 보았다는 소리를 들어 본 바 없다.

    왜 “행동하는 욕심(慾心)”과 “대도무문(大盜無門)”이 통할 수 있었을까?

    바로 이 나라가 ‘자유민주주의 시장경제’를 근간으로 건국(建國)되었고, 그 건국 정신이 궁민(窮民)들의 머리와 가슴 속에 계속 머물러 있었기 때문이었다.

    또한 ‘한강의 기적’이라 불리는 중흥(中興)의 과실이 넉넉했기에 가능했다.

    건국과 호국, 그리고 중흥은 이들이 ‘민주화라는 사업’을 벌리는데 적합한 비옥한 토양(土壤)을 만들었고 엄청난 축복이었으며, 이로 인해 그들 자신과 언저리들도 알토란 같은 ‘열매(=권좌/권력)’를 얻을 수 있었다. 

    허나 이 두 사람은 이를 무시한 채, 이 나라 역사에 대해 오만(傲慢)과 무례(無禮)를 범했다.

    ‘역사 바로 세우기’와 ‘제2의 건국’이야말로 독선(獨善)과 아집(我執)의 결정체였다.

    대한민국의 숭고한 건국 정신을 훼손·폄하하고, 공산전체주의의 도전·도발과 지긋지긋한 가난을 극복한 호국과 중흥의 위대한 발자욱에마저 먹칠을 해 버렸다.

    그리고 입으로는 항상 “정치 보복을 없애야...”를 중얼거렸다.


  • 두 사람이 ‘북악(北岳) 산장’ 주인이던 시절의 여러 정치·경제·사회적인 일들, 정책과 법과 제도에 대해서는 궁민(窮民)들 간에 호·불호와 평가 기준이 갈릴 것이다.

    그리고 현재의 시각(視角)에서 다시 조명해야 할 것들도 있다고 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나라의 생존과 정체성(正體性)에 직결된 사안은 엄정하게 다루고 따져야 한다. 망자(亡者) 예우라는 온정적 분위기에 휩쓸리거나, 특정 지역이나 세력의 자의적(恣意的) 잣대가 작용되어서는 안 될 것이다.

    이제 그들은 모두 갔다.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그나 저나 유감스럽지만 어떤 경우에도 두 사람이 이 나라의 ‘국군 통수권자’였었다는 사실만은 부정할 수도, 되돌릴 수도 없다. 필자 또한 ‘동방예의지국’에서 태어나서 살고 있다.

    이제는 고인(故人)이 된 두 인간의 명복(冥福)을 빈다.

    <더   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