中 “아덴만 작전 장병들 위한 휴식처 제공, 병참 목적”…서방 진영 예의주시
  • ▲ 中공산당은 오래 전부터 지부티에 눈독을 들여 왔다. 사진은 지난 3월 예멘 내전 당시 피란민을 실어 지부티에 내려놓는 中인민해방군 해군 함정의 모습. ⓒ홍콩 사우스차이나모닝포스트(SCMP) 보도화면 캡쳐
    ▲ 中공산당은 오래 전부터 지부티에 눈독을 들여 왔다. 사진은 지난 3월 예멘 내전 당시 피란민을 실어 지부티에 내려놓는 中인민해방군 해군 함정의 모습. ⓒ홍콩 사우스차이나모닝포스트(SCMP) 보도화면 캡쳐


    中공산당이 지난 26일 아프리카 지부티에 군사기지 건설을 위한 협상을 진행하고 있음을 공식 시인했다.

    훙레이 中공산당 외교부 대변인은 26일 정례 브리핑에서 “중국과 지부티는 우호국가로 양국 간에 관련 시설 건설에 대한 협상을 진행 중”이라며 “시설 건설은 中인민해방군 해군의 유엔 평화유지군 작전 참여, 아덴만에서의 선박 보호 작전 강화, 인도적 지원에 초점이 맞춰질 것”이라고 설명했다.

    中공산당도 동아프리카 지부티에 건설하는 군사기지가 “유엔 결의안에 따른 아덴만 해역 작전을 수행하는 장병들을 위한 휴식장소 제공 및 병참 목적으로 사용될 것”이라고 밝혔지만, 이를 그대로 받아들이는 나라는 없다.

    中공산당은 지부티에 건설하는 군사기지의 사용 계약에 대해 구체적으로 밝히지 않았으나, 美정부는 10년 단위로 계약을 한 것으로 보고 있다.

    데이비드 로드리게스 美아프리카 사령관(육군 대장)은 美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중국이 지부티와 10년 동안 군사기지 사용계약을 체결했다”면서 “지부티는 중국의 첫 아프리카 군사기지가 될 것”이라고 밝혔다.

  • ▲ 아프리카 최대의 미군기지 '캠프 리모니어'. 지부티에 있다. ⓒ이란 관영 '프레스TV' 보도화면 캡쳐
    ▲ 아프리카 최대의 미군기지 '캠프 리모니어'. 지부티에 있다. ⓒ이란 관영 '프레스TV' 보도화면 캡쳐


    동아프리카 소말리아와 인접해 있는 지부티에는 이미 미국, 프랑스, 일본 등이 군사기지를 운용하고 있어, 中인민해방군의 군사기지가 들어선다고 해서 특별히 달라지는 것은 없다. 하지만 일각에서는 中인민해방군의 지부티 군사기지 건설이 ‘진주목걸이’ 전략의 일환이라고 해석한다.

    中공산당은 지난 11월 초 파키스탄과 과다르항 장기 임차계약을 맺었다. 中인민해방군이 이곳을 43년 동안 사용할 수 있다는 조건도 포함된 것으로 알려졌다. 中공산당은 또한 과다르항과 中신장 지역을 잇는 송유관 건설도 추진 중이라고 한다. 중동, 아프리카에서 중국으로 석유를 수송하는 거리는 1만 5,000km지만 과다르항과 신장 지역을 이을 경우 거리가 2,000km 정도여서 비용을 크게 줄일 수 있기 때문이라고 한다.

    中공산당은 또한 지난 11월 10일 우성리 인민해방군 해군 사령관이 말레이시아를 방문, 中인민해방군 군함이 코타키나발루 항구를 사용할 수 있다는 허락을 받았다. 인도양에서 남중국해로 들어서는 길목에 있는 코타키나발루가 中인민해방군의 중간 기착지를 넘어 병참 기지로 변하게 되면 남중국해는 中공산당의 뜻대로 ‘내해(內海)’처럼 될 수 있다.

  • ▲ 中공산당이 아프리카 지부티에 군사기지를 건설한다는 소식에 국내 언론은 '진주목걸이 전략'을 위한 것이라고 해석하고 있다. ⓒ조선닷컴 캡쳐
    ▲ 中공산당이 아프리카 지부티에 군사기지를 건설한다는 소식에 국내 언론은 '진주목걸이 전략'을 위한 것이라고 해석하고 있다. ⓒ조선닷컴 캡쳐


    여기서 끝이 아니다. 군사정보전문지 ‘IHS 제인스 디펜스 위클리’는 2014년 “중국이 세계 20여 곳에 해군 거점항구를 만들기 위해 뛰고 있다”고 보도한 바 있다. 다른 외신들도 中공산당이 아프리카 주요 항구 10여 곳에 中인민해방군 해군이 기착할 수 있도록 노력 중이라고 전한 바 있다.

    中공산당과 인민해방군의 이 같은 해외 거점항구 확보 전략은 2013년 10월 시진핑 中공산당 총서기가 “해양 新실크로드를 구축하자”고 제안한 데 따른 것이라는 분석이 많다. 하지만 中공산당의 해외 거점 확보 전략은 10여 년 전에 이미 나온 것이어서, 서방 국가들은 이를 등소평 시절에 뼈대를 마련한 장기 전략의 일환으로 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