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의주 反共학생의거 잊어선 안 된다

    이주영 / 건국대 명예교수·사학

해방된 지 3개월 만인 1945년 11월 23일에 일어난
 ‘신의주 반공(反共) 학생의거’가 오늘로 70주년을 맞았다.
제2차 세계대전 후 소련과 공산주의는 역사가 자기네 편이라면서
의기양양해 전 세계로 뻗어 나가고 있었다. 그 거대한 힘에 처음으로 맞섰던 것이 신의주 반공 학생의거였다. 당시 그것은 달걀로 바위를
치는 것과 같은 무모한 일로 보였다. 하지만 지금 돌아보면 공산 체제는 결국 무너지고 말 것임을 보여준 예언적인 사건이었다.

사건은 그 며칠 전, 평안북도 도청 소재지이던 신의주 남쪽 항구인 용암포의 제일교회에서 열린 인민위원회 지지대회에서 시작됐다. 인민위원회의 업적을 찬양하도록 돼 있는 학생 대표가 연단에 오르자마자 갑자기 공산당을 규탄했기 때문이다. 그의 발언에 청중이 환호하면서, 집회는 완전히 반공 분위기로 바뀌었다. 당황한 공산당은 공장 노동자들을 동원해 학생들을 공격해 수십 명을 다치게 했다. 그 과정에서 학생들을 보호하려던 그 교회 장로가 살해됐다.

이 소식이 신의주에 알려지자, 흥분한 6개 중학생(지금의 고교생) 3500여 명은 권력기관으로 달려가 항의 시위를 벌였다. 동중과 제1공업학교는 인민위원회를, 사범학교와 제2공업학교는 공산당을 맡았다. 그러나 보안대와 소련군의 총격을 받았다. 보안서를 맡았던 상업학교와 평안중학교 학생들은 야크 전투기들의 기총소사를 받았다. 이 사건으로 24명이 즉사하고 350여 명이 부상했으며, 200여 명이 처형되거나 시베리아 강제노동수용소로 끌려갔다.

소련군과 공산당도 당황했다. 그들은 공산 정권이 대중의 지지를 받고 있다고 당당해하던 터였다. 김일성을 신의주로 보내 진상을 조사한 결과, 주민들이 공산당을 극히 무서워하고 미워한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인민 대중이 그렇게 생각하게 된 것은 일제시대에 일본인들이 공산주의자는 빼앗고 죽이는 혁명가라고 교육받은데다, 해방돼서는 소련군의 약탈·체포·살인·강간을 직접 겪은 데 있었다. 주민들의 속마음을 알게 된 소련군과 공산당은 당장 공산주의를 민주주의로 바꿔 불렀다. 공산당도 노동당으로 바꾸었다. 위장과 거짓말의 역사가 시작된 것이다. 거짓말로 시작했기 때문에 북한은 그 후로도 계속 거짓말을 해야 하는 운명이다.

신의주 반공 학생의거는 북한의 공산사회에 또 다른 재앙을 가져다주었다. 당시 밥술이나 먹고 교육 받은 사람은 모두 반동과 친일파로 몰렸기 때문에, 엘리트는 저항하다가 죽거나 남한으로 탈출하는 길밖에 없었다. 그 때문에 북한 사회는 ‘인재 부족’이란 무서운 재앙을 맞게 됐다. 그것이 처음 나타난 것은 1946년 9월에 김일성대학과 다른 고등교육기관들이 처음 신입생을 모집했을 때였다. 이공계 학과들이 정원을 채우지 못한 것이다. 그때쯤 북한에는 엘리트가 별로 남아 있지 않았던 것이다. 오늘날 북한을 ‘중국식 개방’의 방향으로 유도해야 한다는 주장이 나오지만, 처음부터 엘리트를 잃은 북한 사회에 과연 그 같은 거창한 일을 해낼 인재들이 있는지 의심스럽다.

제1공화국은 의거 사실을 교과서에 수록하고 그날을 ‘반공학생의 날’로 기념했다. 하지만 제5공화국 때 폐지된 이후 그것은 거의 완전히 잊어졌다. 지금은 노인이 된 당시 참가자들의 ‘신의주학생의거기념회’만이 남아 있을 뿐이다. 희미해져 가는 1948년 건국 당시의 국가 정체성을 재확인하기 위해서라도 이 역사적인 사건에 대한 정부 차원의 관심이 요구된다.
[문화일보 2015.11.23 칼럼=뉴데일리 전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