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趙甲濟, "김영삼과 김대중의 다른 점"

    채널 A 좌담회 발언 정리: "김영삼이 제1 민주투사이지만 한국 민주주의 건설의 제1 공로자는 이승만, 두 번째는 박정희라고 봅니다."

  • 趙甲濟  

내가 어제 채널 A 좌담회에 나가서 한 발언을 정리하였다.

“저는 김영삼 전 대통령은 제1 민주투사라고 생각합니다. 
대통령이 된 뒤의 평가는 별론으로 하고요. 김대중 전 대통령과
비교하면 그의 역사적 위치가 설명될 것입니다. 김영삼, 김대중, 두 사람은 한국 민주화 투쟁의 두 類型을 보여줍니다.

먼저 김영삼은 자신이 독재라고 주장하는 남북한의 모든 정권을 상대로 싸우고 비판하였습니다. 이승만, 박정희, 전두환, 그리고 북한 독재자들이었습니다. 김대중은 북한의 독재자를 비판하지 않았습니다.

김영삼 총재는 민주화 투쟁을 하면서 폭력적으로 나아가거나 좌경화되지 않았습니다. 의회민주주의자로서 국회를 중심으로, 언론과 여론을 중시하면서, 특히 선거를 통한 민주화 투쟁을 하였습니다.

그가 지휘한 1985년 2·12 총선은 전두환 정권의 야당 분열 시나리오를 깨고 민주화를 大勢로 만든 역사적 전환점이 되었습니다.

1972년 10월17일 박정희 대통령이 유신을 선포하였을 때 김영삼, 김대중 두 사람은 해외에 있었습니다. 김영삼 의원은 도쿄로 와서 밤을 세워가면서 박정희 욕을 한 뒤 서울로 돌아갔습니다. 김대중 의원은 해외에 남았고 나중에 親北 인사들과 反국가단체인 한통련을 만들었으며 납치되어 왔습니다.

 김영삼은 승부에 승복하는 사람이었습니다. 1970년 신민당 경선에서 김대중에게 패배한 이후 이듬해 대통령 선거에선 김대중 후보 유세를 하고 다녔습니다. 1987년 대통령 직선을 앞두고 김대중은 신민당을 나와 평민당을 따로 만들어 출마하였습니다[김영삼 김대중이 분열하는 바람에 노태우 당선].

그래서 저는 김영삼 전 대통령이 ‘제1 민주투사’라고 평가하는 것입니다.

 김영삼 총재의 행운은 그의 야망이 용기를 만들고 이것이 시대의 흐름과 맞았다는 점일 것입니다. 그는 시간의 사나이였습니다. 시간 약속을 어기는 적이 없었습니다. 당무회의를 소집하였을 때 한 사람만 나와도 회의를 했다고 합니다. 여러 번 인터뷰를 하였지만 늦는 법이 없었습니다. 그는 시간약속이 모든 약속의 근본이라고 믿었습니다. 시간약속을 지키지 못하면 믿을 수 없는 사람이라고 생각하였습니다. 부친에게 문안 전화를 정해진 시간에 평생 한 사람입니다.

그는 또 타이밍을 잡는 데 귀재였습니다. 결단을 빨리 내렸습니다. 졸속이라도 빠른 결정이 深思熟考보다 낫다고 본 사람입니다. 잘못되었더라도 고칠 시간이 있으니까요.

예를 들면 1992년 봄 총선입니다. 3당 합당으로 탄생한 민자당이 고전하여 겨우 과반수를 확보하였습니다. 대표로서 이 선거를 지휘하였던 김영삼은 곤경에 처하게 되었습니다. 그 순간 김영삼은 판을 바꿉니다. 민자당의 대통령 후보 경선 개시와 참여를 선언하여 언론의 관심을 당내 경선 판으로 돌려 버렸습니다.

1995년 노태우 비자금 사건이 터집니다. 김대중 총재는 자신이 노 대통령으로부터 20억 원을 받았다고 먼저 고백한 다음 김영삼 대통령을 몰아붙였습니다. 김영삼 대통령은 12·12 사건, 5·17 조치 등은 공소 시효도 끝났으므로 역사의 평가에 맡겨야 한다는 소신을 갖고 있었습니다만 코너로 몰리니 하나의 탈출구로서 5·18 특별법을 제정, 소위 역사바로세우기 재판으로 전두환 노태우를 단죄하게 됩니다. 소급 입법이었으므로 위헌 소지가 있었습니다.

김영삼 전 대통령이 생전에 하나회 숙청을 가장 큰 공으로 꼽았다는데 저는 조금 생각이 다릅니다. 하나회는 박정희 시절에 정규 육사 출신 장교 중심으로 조직된 군내 私組職이었습니다. 보스는 전두환, 노태우 정호용 같은 사람도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12·12 사건의 주체세력이 되었으니 문제가 많았지만 김영삼 대통령이 등장하였을 때는 문민 대통령에게 충성을 바치는 집단으로 바뀌어 있었습니다. 쿠데타를 모의한다는 게 원천적으로 불가능한 시대가 되어 있었습니다. 하나회 소속 장교들 중에는 엘리트가 많았습니다. 이들까지 불이익을 받았습니다.

김영삼 대통령의 금융실명제 조치는 한국의 부패구조와 한국의 정치판을 淨化하는 데 획기적 의미가 있습니다. 한국의 부패 구조는 출발점이 정치자금이고, 특히 대선자금이었습니다. 대통령 후보로 나오면 수천억 원을 거두고 써야 했습니다. 김영삼이 당선된 1992년 대선에서 노태우 당시 대통령이 3000억 원을 지원하였다고 회고록에서 밝힌 바가 있습니다. 금융실명제 실시로 大選 자금의 규모가 줄어들고 대기업의 비자금을 동원하기가 어렵게 되었습니다. 2007년 선거 때부터 대선 자금 수사가 사라졌고, 2012년 선거는 거의 법정 선거 자금의 규모 내에서 치러지지 않았나 생각됩니다. 그만큼 한국이 깨끗해진 셈이죠. 

김영삼을 배짱과 용기의 인물이라고 하는데, 그런 배짱이 북한에 통하였는지는 의문입니다. 1994년에 미국의 클린턴 행정부가 북한의 핵시설을 폭격하려고 하였을 때 김영삼 대통령이 말렸다고 자랑하였지만 최근엔 후회하였다는 이야기도 있습니다. 그때 폭격하였더라면 핵문제는 해결되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지금은 北이 핵무장을 한 상태이므로 폭격할 수가 없게 되었습니다. 찬스를 놓친 거지요.

김영삼이 제1 민주투사이지만 한국 민주주의 건설의 제1 공로자는 이승만, 두 번째는 박정희라고 봅니다. 이승만, 박정희는 민주주의의 기초가 되는 안보 경제 제도 등을 건설하고 지켜낸 사람이고 김영삼 김대중은 민주주의의 일부인 기본권, 즉 언론의 자유, 선거의 자유, 개인의 자유를 확보하기 위하여 싸운 사람입니다. 이승만, 박정희, 김영삼, 김대중은 방법은 달랐지만 다 한국의 민주주의를 발전시키기 위하여 각자의 방식으로 노력하였다고 평가하고 싶습니다.“

[조갑제닷컴=뉴데일리 특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