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P, 빈소 차려지자마자 YS 조문… "신뢰의 분, 다른 사람 못할 일 했다"
  • ▲ 김종필 전 국무총리가 22일 김영삼 전 대통령의 빈소를 찾아 조문하고 유족인 차남 현철 씨를 위로하고 있다. ⓒ사진공동취재단
    ▲ 김종필 전 국무총리가 22일 김영삼 전 대통령의 빈소를 찾아 조문하고 유족인 차남 현철 씨를 위로하고 있다. ⓒ사진공동취재단

    현대정치사를 이끌어온 풍운의 3김(김영삼·김대중·김종필) 중에 이제 김종필 전 국무총리만 남겨졌다. 22일 휠체어를 타고 김영삼 전 대통령의 빈소가 마련된 서울대병원을 찾은 김종필 전 총리는 만감이 교차하는 듯 많은 발언을 남기지 않았다.

    김종필 전 총리는 이날 오전 빈소가 개방되자마자 조문에 나섰다. 거동이 불편해 휠체어를 탄 채 조문을 마친 김종필 전 총리는 취재진과 만나 "신념의 지도자로 국민들의 가슴 속에 영원히 기억될 것"이라며 "더 살아 있었으면 좋았을텐데… 애석하기 짝이 없다"고 애통한 심경을 짧게 표현했다.

    이후 김종필 전 총리는 먼저 도착해 빈소를 지키고 있던 새누리당 김무성 대표최고위원을 만나서도 ""(김영삼 전 대통령은) 신뢰의 분"이라며 "신뢰로 못할 것, 어려울 것, 다른 사람이 못하는 일을 하신 분"이라고 고인을 회상했다.

    ◆현대정치 이끌어온 3김… 남겨진 JP, 빈소 차려지자마자 YS 조문

    김종필 전 총리(JP)는 이날 서거한 김영삼 전 대통령(YS), 6년 전 먼저 세상을 떠난 김대중 전 대통령(DJ)과 함께 우리나라의 현대 정치를 이끌어와 통칭 '3김'으로 불린다. 1987년 대선에서는 셋이 나란히 대선에 출마해 함께 낙선의 고배를 마시기도 했다.

    이후 김종필 전 총리가 있는 쪽이 이기고, 이기는 쪽에 그가 있는 상황이 연출되기도 했다. 1992년 대선에서는 김종필 전 총리를 등에 업은 김영삼 전 대통령이 김대중 전 대통령을 눌렀다. 5년 뒤에 치러진 1997년 대선에서는 역으로 김종필 전 총리와 'DJP 연합'을 형성한 김대중 전 대통령이 당선되기도 했다.

    3김은 각자 부산·경남, 광주·전라, 대전·충남이라는 확고한 지역 기반을 바탕으로 수많은 이합집산과 창당 등을 해왔다. 그 과정에서 독보적인 카리스마로 타 정치인들과는 레벨이 다른 위상을 구축했다. 정계 개편이나 신당 창당 등이 난관에 봉착할 때마다 정치권에서는 "이런 것은 3김이나 할 수 있었던 일"이라는 말이 항상 회자되곤 했다.

  • ▲ 김종필 전 국무총리가 22일 김영삼 전 대통령의 빈소를 찾아 조문한 뒤 취재진과 만나 문답을 나누고 있다. ⓒ사진공동취재단
    ▲ 김종필 전 국무총리가 22일 김영삼 전 대통령의 빈소를 찾아 조문한 뒤 취재진과 만나 문답을 나누고 있다. ⓒ사진공동취재단

    ◆김종필, 김영삼 제명결의안에 "아무리 대통령 뜻이라도"

    3김 중에 유일하게 현세에 남겨진 김종필 전 총리와, 이날 서거한 김영삼 전 대통령과의 인연은 결코 작지 않다.

    5·16 혁명과 민주공화당(공화당) 창당의 주도자였던 김종필 전 총리와, 민정당~민중당~신민당에 몸담은 야당 소장파 의원이던 김영삼 전 대통령은 줄곧 정적(政敵) 관계에 있었다. 그러나 서로는 이 시절부터 내심 서로의 능력을 인정하고 있었다는 게 정치권의 중론이다.

    그 속내가 세상에 드러난 것이 1979년 김영삼 전 대통령의 제명안 의결 때였다. 그 해 9월 16일 김영삼 전 대통령이 뉴욕타임스와의 인터뷰를 통해 "미국은 국민과 끊임없이 유리되고 있는 정권과 민주주의를 열망하는 다수, 둘 중 어느 쪽을 선택할 것인지를 분명히 할 때가 왔다"며, 미국이 직접 나서서 유신 정부를 제어할 것을 압박했다.

    이 인터뷰를 보고 '이거 심상치 않겠다'고 느낀 김종필 전 총리는 김영삼 전 대통령에게 전화를 걸어 "왜 국내 문제를, 대통령 욕을 외국 신문에 이야기하느냐"고 꼬집자, 김영삼 전 대통령은 "국내에서 (보도가 전혀) 되지 않으니, 외국에 이야기해서 역수입이라도 해야겠다"고 맞섰다.

    아니나다를까 이 인터뷰가 다시 국내 신문에 보도되자 박정희 전 대통령은 '사대주의'라고 펄펄 뛰며 "저런 친구가 국회에 있으면 국회를 버리니, 내쫓아야 한다"고 지시했다.

    이에 박준규 공화당 의장대행이 회의를 소집해 '대통령의 지침'이라며 공화당과 유신정우회의 단독 본회의로 제명결의안을 강행 처리할 뜻을 비추자, 김종필 전 총리는 "아무리 대통령의 뜻이라 해도 세상에는 되는 일이 있고, 안 되는 일이 있다"고 강하게 반대했다. 결국 당시 5선 의원이자 공화당 상임고문이었던 김종필 전 총리는 공화당과 유정회 의원을 통틀어 유일하게 부표를 던진 의원이 됐다.

    ◆'서울의 봄' 때 김종필, 김영삼에 "춘래불사춘" 조언했지만

    이후 사태는 10월 16일 부마 항쟁으로 이어졌으며, 부산과 마산 시민들은 "김영삼 총재 제명을 철회하라"고 들고 일어났다. 그로부터 열흘 뒤 박정희 전 대통령은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의 흉탄을 맞고 비명에 갔다.

    10·26 사태로 유신 정부가 붕괴하자, 자연스레 3김의 움직임에 정치권의 시선이 쏠렸다. 1980년 2월 25일 인촌 김성수 선생의 추도식을 계기로 김종필 공화당 의장(당시)과 김영삼 신민당 총재(당시), 그리고 김대중 씨(당시)가 회합했다. 1963년 3공화국 성립 이래로 정치를 주도해 온 세 사람이지만 공개 석상에서 한 자리에 모인 것은 처음이었다.

    김영삼 전 대통령은 자신의 제명결의안 의결이 기폭제가 돼서 부마 항쟁이 터지고 유신 정부가 무너진 만큼, 마치 이미 대통령이라도 된 양 의기양양해 있었다. 김종필 전 총리는 그런 김영삼 전 대통령을 향해 "춘래불사춘(春來不似春)이라는 말을 아느냐"고 넌지시 말을 건넸다.

    "봄이 온 것 같지만 진짜 봄은 아니란 뜻"이라며 "봄이 오기도 전에 외투를 벗으면 감기에 걸리고 폐렴이 돼 죽을 수도 있듯이, 지금 봄이 왔다고들 하는데 생각지도 않은 일이 벌어질 것 같다"고 경고했었다던 김종필 전 총리는 최근 중앙일보에 연재되고 있는 회고록에서 "나의 경고성 발언은 김영삼 전 대통령의 귀에 들어가지 않은 것 같았다"고 털어놨다.

    당시 중앙일보에 소속돼 공화당을 출입하던 김영희 기자는 "정치권외에서 부는 바람에 예상되는 게 없느냐"고 질문했고, 김종필 전 총리는 "지금 항간에 돌고 있는 이야기들이 기우이길 바란다"며 "정치하는 사람들이 옳게 하면 기우는 현실화되지 않을 것"이라고 다시 꼬집었지만, 역시 김영삼 전 대통령은 알아듣지 못했다는 지적이다.

  • ▲ 김영삼 전 대통령과 김종필 전 국무총리가 1989년 골프 회동을 하고 있다. ⓒ뉴시스 사진DB
    ▲ 김영삼 전 대통령과 김종필 전 국무총리가 1989년 골프 회동을 하고 있다. ⓒ뉴시스 사진DB

    ◆87년 대선·88년 총선 거치며 공동 운명 모색

    이후 5·17 등이 이어지며 허망하게 신군부에 정권을 내주고 뿔뿔이 흩어졌던 김종필 전 총리와 김영삼 전 대통령은 1987년 대선 국면에서 다시 조우했다.

    이듬해 총선에 나설 생각으로 창당했기 때문에 기실 대통령 당선에는 뜻도 없었고 노리지도 않았던 김종필 전 총리가 보기에 판세는 명약관화했다. 이대로라면 노태우 전 대통령이 당선되는 것이었다. 김종필 전 총리는 이희일 비서실장을 통해 '야3당 후보 회동'을 제안했고, 여기에 김영삼 전 대통령이 "먼저 김종필 후보가 사퇴하고 나에 대한 지지를 선언해준다면 함께 만나겠다"고 화답하는 듯 하면서 불가능한 조건을 내걸었다. 김대중 전 대통령 측은 "김영삼 씨가 사퇴하지 않을 것"이라며 처음부터 거절했다.

    1987년 대선과 1988년 총선을 거치며 정국은 4당 체제로 굳어졌다. 총선이 끝난 직후인 1988년 5월 18일, 3김은 김종필 전 총리의 야3당 총재 회동 제안으로 국회 귀빈식당에서 오랜만에 다시 한 자리에 섰다. 이 자리에서 김영삼 통일민주당 총재, 김대중 평화민주당 총재, 김종필 신민주공화당 총재는 5공 청산을 위한 특위 구성에 합의했다.

    ◆3당 합당 위한 靑 회동… 김종필, 김영삼에 "그쯤 하라"

    5공 청문회가 끝난 뒤 정국은 다시 한 번 급변했다. 이번에는 김종필 전 총리의 제안으로 민정당과 공화당의 합당이 추진됐다. 여소야대 속에서 정국이 마비될 것을 우려한 제안이었는데, 여기에 박철언 청와대 정책보좌관의 아이디어가 끼어들어 민주당까지 포함해 거대 여당을 구축하는 '3당 합당' 프로젝트로 발전했다.

    이런 국면 속에서 1989년 10월, 김종필 전 총리와 김영삼 전 대통령은 골프 회동을 가졌다. 라운딩이 끝난 뒤에는 "두 총재가 우정과 소신을 가지고 협력해 나가기로 한다"는 합의문까지 발표됐다. 바야흐로 김영삼 전 대통령이 만 26세에 국회에 입성한지 38년, 김종필 전 총리가 5·16 혁명을 통해 출사한지 29년 만에 두 사람이 한 배에 몸을 싣을 시간이 다가오고 있었던 것이다.

    1990년 1월 22일, 노태우 전 대통령과 김종필 전 총리, 김영삼 전 대통령이 마침내 청와대에서 만났다. 김영삼 전 대통령은 "3당 합당을 한 뒤에는 (노태우) 대통령이 명예총재를 맡고 내가 총재, 김종필 총재께서 최고위원을 맡으시는 게 좋겠다"며 막판에 노태우 전 대통령이 총재를 맡기로 한 기존 합의를 뒤엎으려 했다. 이 때문에 노태우 전 대통령과 김영삼 전 대통령이 설전을 벌이기 시작해 3당 합당이 마지막에 어그러질 위기에 봉착했다. 회동은 9시간째 진행되고 있었다.

    이에 김종필 전 총리가 나서서 "김영삼 총재, 그쯤 하시라"고 면박을 줬다. "다음 시대의 주연은 김영삼 총재일 테니 그렇게 알고 돕겠다"고 '다음 대권'에 대한 확약을 주기도 했다. 그러자 비로소 김영삼 전 대통령이 수긍해 3당 합당이 결실을 맺을 수 있었다.

  • ▲ 김영삼 전 대통령과 김종필 전 국무총리가 1989년 골프 회동을 하고 있다. ⓒ뉴시스 사진DB
    ▲ 김영삼 전 대통령과 김종필 전 국무총리가 1989년 골프 회동을 하고 있다. ⓒ뉴시스 사진DB

    ◆김종필, 김영삼을 '홍곡' 자신을 '연작'에 비유했지만

    1990년의 3당 합당으로 김종필 전 총리와 김영삼 전 대통령은 한 배에 올랐다. 이후 1992년 민자당 대선 후보 경선에서도 김종필 전 총리는 민정계의 박태준 최고위원이나 이종찬 의원 대신 김영삼 전 대통령의 손을 들어 그를 대선 후보의 길로 이끌었고, 끝내 당선까지 시켜냈다.

    이 과정에서 민자당을 출입했던 경향신문 이용호 기자의 회고에 따르면 1992년 4월 8일 밤 9시, 김영삼 전 대통령과 김종필 전 총리는 하얏트 호텔에서 독대를 하고 △국무총리를 당에서 지명 △박정희 전 대통령 기념관 건립을 조건으로 김종필 전 총리는 김영삼 전 대통령을 대통령으로 지지하기로 하는 합의를 했다.

    하지만 1993년 김영삼 전 대통령이 마침내 대통령에 취임한 이후 약 3년간 같은 배를 탔던 두 사람의 관계는 삐꺽거리기 시작했다. 토사구팽이 발생한 것이다.

    집권여당인 민자당의 대표최고위원으로서 김영삼 전 대통령과 주례회동을 하던 김종필 전 총리는 "홍곡의 큰 뜻을 연작이 어찌 헤아릴 수 있겠느냐"라고까지 말하며 극진한 예의를 갖췄으나, 김영삼 전 대통령은 김종필 전 총리를 내치기로 마음먹은 상황이었다. 김종필 전 총리는 김영삼 전 대통령을 가리켜 "어려움은 함께 했어도 즐거움은 함께 할 수 없는 사람"이라고 한탄하며 당을 떠났다.

    1995년 1월 10일 두 사람 간의 마지막 청와대 주례회동에서 김종필 전 총리는 "당을 떠나겠다"고 통보했고, 김영삼 전 대통령은 김종필 전 총리가 자신의 생각대로 순순히 정계를 은퇴해 줄 것으로 믿었던지 "네에? 당을 나가서 뭘 하시려느냐"고 놀라움을 표했다.

    ◆97년 3김 최후의 대회전… 김영삼 승부수, 공중에 붕 떠

    자유민주연합을 창당하고 김영삼 전 대통령에게 대항한 김종필 전 총리는 1995년 4월 전국동시지방선거에서 약진한 데 이어 이듬해 4·11 총선에서도 무려 50석을 얻는 대성공을 거뒀다. 김영삼 전 대통령의 신한국당은 과반 의석에 훨씬 모자라는 139석에 그쳤다. 이렇게 되자 다시 아쉬워진 것은 김영삼 전 대통령이었다.

    그 이듬해에 벌어진 1997년 대선은 3김 간의 얽히고 설킨 인연을 마무리짓는 최후의 대회전이었다. 김종필 전 총리는 이 해 1월 4일 자민련 신년 기자회견에서 "이번 대선은 3김 씨의 마지막 싸움"이라며 "3김의 싸움은 반드시 밟아야 할 과정이고 현실이며 순서"라고 정의했다.

    김종필 전 총리는 중앙일보에서 "김영삼 전 대통령은 자신이 출마할 수는 없지만 평생 경쟁자인 김대중 전 대통령의 집권만은 막아야겠다는 일념으로 후계구도를 짜는 데 심혈을 기울였다"며 "한편, 김대중 전 대통령은 오매불망 대통령을 향한 도정에 나를 끌어들여 반드시 당선하겠다는 집념으로 넘쳐났다"고 회고했다.

    여기에서 김영삼 전 대통령과 김종필 전 총리 간의 마지막 접촉과 제안이 오고갔다. 청와대 고위 관계자는 자민련에 접근해 "김영삼 대통령이 95년 탈당하는 총재님(JP)을 붙들지 못한 걸 몹시 안타까워한다"며 "지금이라도 내각제 개헌을 추진해 총재님과 손을 잡자고 했더니 대통령께서는 '그렇게 할 수 있으면 좋겠구나'라고 했다"고 전했다.

    이에 김종필 전 총리는 그 해 9월 5일 기자회견을 자청해 "김영삼 대통령이 내각제를 결심하고 선두에 나서 개헌을 위한 국민투표를 실시하겠다면 적극 협조할 생각"이라며 "개헌을 위해서라면 대선을 연기할 수도 있을 것"이라고 화답했다.

    하지만 이후 청와대의 반응은 없었다. 한보·기아그룹의 부도 사태에 이어 차남 현철 씨가 구속되는 등 악재가 잇따르면서, 차기 대권주자군의 반발을 무릅쓰고 청와대가 나서서 개헌을 추진할 동력이 없었다. 이렇게 김영삼 전 대통령의 김종필 전 총리를 향한 마지막 제안은 허공으로 떠올라버렸다.

  • ▲ 김영삼 전 대통령과 김종필 전 국무총리. ⓒ뉴시스 사진DB
    ▲ 김영삼 전 대통령과 김종필 전 국무총리. ⓒ뉴시스 사진DB

    ◆김종필 "김영삼이 다른 사람 못해내는 일 해내는 이유는…"

    이날 김영삼 전 대통령의 빈소를 방문해 조문한 김종필 전 총리는 최근 중앙일보에 연재된 회고록에서 평생 함께 정치를 해온 3김 파트너, 김영삼 전 대통령과 김대중 전 대통령에 대해 촌평을 남기기도 했다.

    김종필 전 총리는 김영삼 전 대통령을 가리켜 "김영삼 전 대통령은 상황 판단이 집중·단선적이고, 권력의 본성을 감각적으로 느낀다"며 "하나회 청산은 전격적으로 이뤄져야 하며 꼭대기 전두환·노태우를 정리해야만 완성된다는 판단이 그런 류의 것"이라고 설명했다.

    반면 김대중 전 대통령에 대해서는 "생각이 복합적이고 신중하며 논리적인 연결을 중시하며, 단계적이고 복선적인 접근 스타일"이라며 "서생적(書生的) 문제의식과 상인적 현실감각으로 실제 정치에서 따지고 의심하고 계산하는 측면이 많다"고 밝혔다.

    그러면서 혹자의 평가를 빌려 "누구는 김영삼 전 대통령이 동물적 후각이 발달했다고 하고 김대중 전 대통령은 유리한 결론을 도출해내기 위해 설득논리 개발에 능하다는 얘기를 했는데 사실 그런 면이 있다"고 대조했다.

    반면 '김영삼 전 대통령이 김대중 전 대통령보다 기가 세다'는 정치권 일각의 평가에 대해서는 고개를 저었다.

    김종필 전 총리는 "김대중 전 대통령은 김영삼 전 대통령에 비해 마음이 약하지 않다"며 "권력을 쟁취할 때 보면 (김대중 전 대통령의) 그 끈기와 오기, 강인함을 따라갈 사람이 없다"고 단언했다.

    다만 김종필 전 총리는 세인들이 감히 따라갈 수 없는 김영삼 전 대통령만의 능력으로 순발력과 속전속결을 꼽았다. 김종필 전 총리는 "김영삼 전 대통령은 틀렸다 싶으면 바로 정면으로 부딪쳐 가부간 결단을 낸다"며 "다른 사람이 할 수 없는 일을 해내는 것은 그 때문"이라고 분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