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관여할 일 아니다'라는 태도로는 300만 농민의 가슴에 피멍 남길 뿐
  • 선거구획정위원들이 2일 저녁 지역구 정수 확정에 실패한 뒤, 침통한 표정으로 엘리베이터를 통해 중앙선관위 관악청사를 빠져나가고 있다. ⓒ뉴데일리 이종현 기자
    ▲ 선거구획정위원들이 2일 저녁 지역구 정수 확정에 실패한 뒤, 침통한 표정으로 엘리베이터를 통해 중앙선관위 관악청사를 빠져나가고 있다. ⓒ뉴데일리 이종현 기자

    선거구획정위원회가 2일, 8시간에 가까운 마라톤 회의를 벌였으나 20대 총선에 적용될 지역구 정수를 결정 짓는데 실패했다.

    김금옥·조성대 획정위원은 이날 저녁 10시를 넘긴 시각, 현장 브리핑을 통해 "지역구 244~249석의 범위 내에서 시뮬레이션을 하고 심도 있게 검토와 논의를 했으나, 헌법재판소가 제시한 인구 기준을 준수하는 동시에 농어촌 지역대표성을 실질적으로 확보하는 방안을 마련하는데 어려움을 겪었다"며 "오늘 지역구 정수를 결정 못하고 회의를 마쳤으며, 다음 회의 일정도 잡지 못했다"고 밝혔다.

    이날 선거구획정위 전체회의는 오후 2시에 개회했으며, 저녁 9시 50분에 산회한 것으로 알려졌다. 선거구획정위원장을 겸하고 있는 김대년 중앙선거관리위원회 사무차장은 "죄송하다"며 "(일정에) 차질이 빚어지지 않도록 최선을 다하겠다"는 말을 남겼다.

    김금옥·조성대 위원은 합의에 이르지 못한 쟁점을 묻는 취재진의 질문에 "답변드릴 수 없다"며 입을 굳게 다물었다. 하지만 유력하게 검토된 지역구 246석 현행유지안과 249석 증원안, 두 가지를 모두 검토해도 헌재의 인구 상하한 2대1 기준을 지키는 한 농어촌 선거구의 급격한 통폐합을 막을 길이 없어 획정위원들의 고심이 컸던 것으로 전해졌다.

    당초 선거구획정위는 법정시한인 이달 13일까지 국회 정치개혁특별위원회에 획정안을 제출하겠다는 입장이었다. 그러자면 필요한 시간을 역산할 때 2일 전체회의에서는 지역구 정수가 결정돼야 한다는 관측이 지배적이었다.

    스스로 다짐한 법정시한 준수 약속을 지키기 어려울 정도의 상황이 초래된 이유는 뭘까. 농어촌 지역대표성을 지켜야 한다는 요구에 거대한 국민적 공감대가 형성되고 여론의 지지와 성원까지 실리면서, 사상 최초로 독립기구로 구성된 선거구획정위도 이 목소리를 외면할 수 없게 됐기 때문으로 보인다.

    사실 제헌의회 이후로 농어촌 선거구는 줄곧 감소했다. 산업화와 이촌향도(離村向都)에 따라 농어촌 인구가 감소했기 때문에 불가피한 변화였다. 일례로 제헌의회 당시 22석에 달했던 전라북도의 지역구 정수는 1988년 총선에서 14석으로 줄어든 데 이어, 2008년 총선에서는 다시 11석으로 줄어들었다.

    당시에도 지역구를 지켜야 한다는 농어촌 지역 국회의원들의 단체 행동은 있었다. 하지만 여론은 이들을 '농촌당' '밥그릇 지키기' 등으로 칭하며 싸늘한 시선으로 바라봤다. 상경투쟁(上京鬪爭)이 있었지만, 진정한 민심을 반영하는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이번에는 민심의 풍향이 전혀 다르다는 지적이다. 농어촌·지방 주권지키기 의원 모임들이 초창기에 모여서 대책을 논의할 때, 습관적으로 '농촌당'이나 '밥그릇 지키기'의 프레임으로 바라보려는 시도가 있었지만 곧 사그러들었다. 오히려 지금은 언론이 이들의 일거수일투족에 집중해 동향을 보도하고 있다. 전남과 전북, 경북 등 큰 도(道)의 의석 수가 한 자릿 수로 떨어질 위기에 처한 상황에서, 국민들이 '더 이상은 안 되겠다'고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이번 추석 명절 연휴 때 지역구를 찾은 의원들은 '(서울에) 올라가야 하는 것 아니냐' '올라가겠다'며 상경투쟁을 하겠다고 자발적으로 나서는 지역구민들을 오히려 뜯어말려야 했다. 국회 로텐다홀에서 농성 중인 새누리당 황영철 의원(강원 홍천·횡성)은 "여론의 지지와 공감을 얻지 못했더라면 여기까지 오지 못했을 것"이라고 술회하기도 했다.

    선거구획정위는 헌정 사상 최초로 독립기구로 구성됐기 때문에 국회 산하였던 예전과는 달리 정치권의 눈치를 볼 이유가 없다. 김금옥·조성대 획정위원도 이날 브리핑에서 정치권의 연기 요청이 지역구 정수 결정 불발에 영향을 미쳤느냐는 질문에 대해 "다룬 바 없다"고 일축했다.

  • 새정치민주연합 황주홍 전남도당위원장이 2일 오후 전남·전북 의원들과 함께 문재인 대표를 면담한 이후, 취재진과 만나 면담 결과를 설명하고 있다. ⓒ뉴데일리 이종현 기자
    ▲ 새정치민주연합 황주홍 전남도당위원장이 2일 오후 전남·전북 의원들과 함께 문재인 대표를 면담한 이후, 취재진과 만나 면담 결과를 설명하고 있다. ⓒ뉴데일리 이종현 기자


    하지만 민심까지 외면할 수는 없다. 사상 최초로 독립기구로 구성된 선거구획정위가 당리당략에 맞서기 위해 우군(友軍)으로 삼아야 할 것이 민심이기 때문이다.

    결국 농어촌 지역대표성을 지켜야 한다는 거센 민심의 요구에, 선거구획정위원들이 244~249석의 지역구 의석 정수만으로는 이를 지킬 수 없다는 사실을 인정한 것이나 다름 없다. 이러한 어려움을 풀어줘야 하는 것이 정치의 본령이고, 정치인이 해야 할 의무다. 국회의원 정수 300석은 유지하라는 것이 국민의 명령이니 이를 대전제로 할 때, 부득불 비례대표를 줄이고 지역구 정수를 늘려 해결할 수밖에 없다.

    이에 대해서는 정치권에 여야를 막론하고 폭넓은 공감대가 이미 형성돼 있다. 오로지 단 한 사람이 반대하고 있다.

    새정치민주연합 전남·전북 의원 10여 명은 이날 오후 2시부터 문재인 대표를 만나 담판을 벌였다. 3시간여 뒤에 발표될 예정이었던 선거구획정위의 지역구 정수 확정을 앞두고 문재인 대표를 마지막으로 설득해보기 위한 시도였다.

    이 자리에는 새정치연합 황주홍 전남도당위원장, 유성엽 전북도당위원장과 주승용 최고위원, 김영록 수석대변인과 이춘석 원내수석부대표, 그리고 김성주·김승남·신정훈·이개호 의원이 참석했다. 문재인 대표는 정개특위 야당 간사인 김태년 의원과 함께 이들을 맞이했다.

    호남 의원들은 이 자리에서 농어촌 지역대표성을 유지하기 위해 △농어촌 특별선거구 설치 △자치구·시·군 분할 금지 조항의 예외 허용 △지역구 정수 증원과 비례대표 축소 등을 산발적으로 거론했지만, 그보다는 농어촌과 호남을 대하는 문재인 대표의 태도에 대한 섭섭함을 토로한 것이 주된 포인트였던 것으로 전해졌다.

    황주홍 전남도당위원장(전남 장흥·강진·영암)은 면담 종결 직후 취재진과 만나 "농어촌 특별선거구 등이 제시됐지만 공통된 의견은 아니었다"며 "농어촌 선거구의 민감성과 주권을 당에서 충분히 반영하는 모습을 보여달라고 문제제기했다"고 이를 뒷받침했다.

    황주홍 위원장은 "여론에 비치는 모습이 새누리당에 비해 우리 새정치연합이 농어촌 선거구에 덜 예민하고 둔감한 모습인데 이는 바람직한 게 아니다"라며 "비례대표(의 정수)라든가 이런 문제에 대해서도 유연한 입장을 가져줄 것을 요청했다"고 설명했다.

    다만 문재인 대표는 전남·전북 의원들의 절절한 호소와 문제제기에도 불구하고 별반 공감을 이루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문재인 대표는 면담 종결 직후 취재진과 만나 "농어촌 지역 의원들이 선거구 획정 과정에서 농어촌 선거구가 줄어들 우려를 말씀했다"며 "농어촌 지역대표성을 살려나가는 것도 중요한 문제이기 때문에 어떻게 조화를 할지 잘 강구해 나가겠다"는 원론적 입장을 밝혔다.

    그러나 취재진에서 당장 이날 저녁에 있을 예정인 선거구획정위의 지역구 정수 발표에 대해 연기 요청을 할 것이냐고 묻자, 문재인 대표는 "그것은 뭐, 내가 관여할 문제 같지 않다만"이라고 선을 그었다. 당장 2시간여 뒤에 선거구획정위가 244~249석 사이에서 지역구 정수를 결정할 예정이었고, 만일 확정 발표가 이뤄졌다면 농어촌 지역대표성의 사멸은 되돌이킬 수 없는 수순이 됐을 것임에도 '내 일이 아니다'라는 입장을 보인 것이다.

  • 새정치민주연합 문재인 대표가 2일 오후 전남·전북 의원들과 면담한 뒤 취재진의 질문에 답하고 있다. 문재인 대표는 선거구획정위에 지역구 정수 결정 연기 요청을 할 것이냐는 질문에 대해 관여할 문제가 아니라는 입장을 밝혔다. ⓒ뉴데일리 이종현 기자
    ▲ 새정치민주연합 문재인 대표가 2일 오후 전남·전북 의원들과 면담한 뒤 취재진의 질문에 답하고 있다. 문재인 대표는 선거구획정위에 지역구 정수 결정 연기 요청을 할 것이냐는 질문에 대해 관여할 문제가 아니라는 입장을 밝혔다. ⓒ뉴데일리 이종현 기자

    황주홍 위원장도 면담 내용을 설명하는 과정에서 "문재인 대표는 답은 없었지만, 알겠다는 표정으로 응답했다"라든지 "여론조사 결과 국민여론이 지역구 의석이 줄어들거나 농어촌 지역대표성이 훼손되는 것에 대해 우려한다는 말씀드렸고, (문재인 대표는) 그에 대해 전적으로 동의한 것은 아니었다"고 언급했다.

    추석 명절 연휴 기간 동안 수렴한 절박한 지역구민의 민심을 전달하는 호남 의원들과 심정적 공감을 이루지 못한 것이다.

    면담에 배석했던 한 호남 지역 의원은 "문재인 대표는 별다른 반응 없이 고개를 끄덕이며 듣기만 하다가 '무슨 방법이 있겠느냐'고 물으면, 배석해 있던 김태년 (정개특위) 간사가 '이것은 이래서 안 되고, 저것은 저래서 안 된다'고 일축하는 식이었다"며 사견을 전제로 "마치 역할을 분담한 듯한 인상을 받았고, 우리의 의견이 진지하게 고려되지 않겠느냐는 기대는 솔직히 가지기 힘든 분위기였다"고 토로했다.

    황주홍 위원장도 면담의 의미를 묻는 질문에 "(문재인) 대표에게 전남·전북 의원들이 가진 속내와 하고 싶었던 이야기, 전남 주민들의 생각과 전북 주민들의 뜻을 전달했다는 데 오늘 만남의 의미를 두고 싶다"고 밝혀, '전달' 이외에 큰 의미와 기대감을 부여하기는 힘들다는 점을 우회적으로 시사했다.

    선거구획정위가 244~249석의 지역구 정수로는 농어촌의 지역대표성을 실질적으로 확보할 수 없다고 고백한 이상, 이제는 문재인 대표가 결단해야 한다. 전남·전북 의원들이 전달한 호남 민심에 과감히 부응하는 모습을 보여줘야 한다.

    문재인 대표는 지난달 25일 인터넷 팟캐스트 방송에서 "영남패권주의 등의 말을 듣는데 너무 서글프다"며 "호남에 대한 애정은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는다"고 주장했다. '호남에 대한 애정'은 말로만 표현한다고 알 수 있는 것이 아니니, 행동으로 보여줄 일이다.

    적어도 전남·전북 양 도(道)의 도당위원장을 비롯한 지역 의원단과 회동하고 나오자마자, 농어촌 지역대표성에 비수를 꽂을 예정인 선거구획정위에 지역구 정수 결정 연기 요청을 할 것이냐는 질문에 "그것은 내가 관여할 문제 같지 않다"며 '남의 일' 보듯 말하는 게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는 호남에 대한 애정'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취할 언행 같지는 않다.

    지금까지 농어촌 선거구 문제를 다룸에 있어 문재인 대표가 보여준 언동에 대한 호남 민심의 섭섭함을 언급하자면 한 권의 수첩 전체가 모자랄 지경이다. 하지만 이미 지나간 일에 대해 잘잘못을 따지는 것은 생산적이지 않다. 다행히도 선거구획정위가 지역구 정수 결정을 불발시키며 솔직한 고백을 했기 때문에, 문재인 대표로서는 지금이 호기다.

    호남 민심이 진정으로 원하는 농어촌 지역대표성 유지를 위해 지역구 정수 증대·비례대표 축소에 과감하게 마음을 열고 동의하면 된다. 그것으로 더 이상 서글픔을 느낄 필요 없이 '호남에 대한 애정'을 행동으로 보여줄 수 있다.

    선거구획정위의 지역구 정수 확정 불발로 300만 농민이 다시 한 번, 그리고 마지막으로 기대를 걸고 정치권을 주시할 것이다. 사실 이들이 주시하는 것은 단 한 사람이며, 이들이 바라는 것은 단 한 사람의 결단이다. 국민은 우매하지 않다. 농어촌 지역대표성의 실질적 확보를 가로막는 단 한 사람이 누구인지 이미 국민은 모두 알고 있다.

    오랫동안 자신에게 비판적이었던 호남 민심을 과감한 결단을 통해 끌어안을 것인가, 다시 한 번 호남 민심은 물론 전국 농어촌에 산재한 300만 농민의 가슴에 피멍이 들게 할 것인가. 선택은 문재인 대표의 몫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