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극 '챙!' 모노드라마로 한층 더 깊어진 덤덤한 이별 한국 연극계의 두 거장 임영웅, 이강백의 만남
  • [연극리뷰]
    연극 '챙'은 1년 전 비행기 사고로 실종된 어느 심벌즈 연주자 함석진의 이야기다.

    그를 기리기 위해 그가 연습했던 연습실에서 그의 아내와 지휘자와 동료들이 그를 떠올리면서 대사를 주고받는다.

    함석진의 아내 이자림에 의해 평소에 동료들에게 베풀기를 좋아하고 가정적인 남자로 회상된다.

    아내는 함석진을 회상하면서 그의 성격이 어떠한지를 잘 드러낸다. 처음 만남에서 그가 쭈뼛거리며 연신 '죄송합니다'를 외치는 대목이 인상깊다.

    초연때에는 그녀에게 프로포즈를 하지 않는 소심한  그의 성격을 드러냈다면, 이번 공연에는 아이들 앞에서 자상한 아버지로 그려진다.

    #. 심벌즈는 클라이맥스에 울린다

    박자를 세며 1시간동안 기다린 끝에 딱 한 번 심벌즈를 울린다. 그의 성격과 심벌즈가 매치가 되면서 심벌즈가 곧 함석진이고 함석진이 심벌즈가 돼 버린다.

    심벌즈는 두 짝이 있어야 하는 얼마 없는 악기이다. 1시간이 넘는 공연시간 중 한 번에서 두 번 정도 클라이맥스에서만 등장하는 악기이기도 하다. 현악기 관악기 등 쉼 없이 소리를 내는 악기와는 달리, 심벌즈는 그렇게 오랜 기다림 끝에 클라이맥스에서만 친다는 매력적인 악기라는 것을 처음 알게 됐다.

    박자를 세면서 기다리는 심벌즈 연주자의 마음은 어떤 마음 일까? 생각한 적 없던 심벌즈 연주자의 기다림에 대해 생각하게 된다.

    나는 어떤 악기일까. 누군가에게는 내가 바이올린처럼 보일지도 모르고 어떤 사람에게는 심벌즈처럼 보일지도 모르고 스스로는 내가 비올라처럼 보일지도 모른다.

    모두는 누군가의 어떤 악기이며, 또 스스로에게 어떤 악기인지를 생각하게 해주는 연극이다.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다. 모두 소리를 내면 아름다운 소리를 낼 수 없다.

    쉴 때 쉬고 불어줄때 불어주고 칠 때 치고, 현악기 타악기 관악기가 서로가 등장해야 할 때 해야 비로소 아름다운 소리를 만들어낸다.

    인간 세상도 똑같다. 모두 자신의 소리만 내려고 한다면, 세상은 시끄러울 것이다. 하지만 여기서 말하고 싶은 것은 클라이맥스를 기다리는 바로 심벌즈. 심벌즈의 위력이다.

    심벌즈가 혼자서 소리를 낼 때는 매우 시끄럽다. 실제로 공연장에서 심벌즈를 '챙' 하고 울렸더니 듣기 싫은 소리가 났다.

    하지만 다 같이 합주한  LP의 녹음된 클라이맥스 부분에서는 심벌즈 소리를  들으니, 절정을 알 수 있었다.

    혼자 소리를 내는 심벌즈는 의미가 없다. 그러기에 조화를 이루어야 한다고 생각이 들었다. 이 극이 말하고자하는 것은 사람들 사이에서의 조화를 말하고자 하는 듯 보인다. 

    초연때와 마찬가지로 관객들을 그와 함께 일했던 동료로 설정해서 직접 나와서 연기를 하기도 하고, 심벌즈를 치게 하기도 했다. 그 부분에서 웃음을 유발했는데, 특히 남자가 어머니 역할을 하는 부분이 그랬다.

    초연때 배우가 2명이었고, 지금은 모노드라마로 손봉숙 홀로 독무대에 서지만, 혼자처럼 보이지 않게 연출했다.  종업이며 아버지 어머니 그리고 동료들 모두 관객들이나 배우 스스로가 직접 따라하거나 언급으로 끝내면서 희곡의 제한적인 성격을 제대로 보여주는 대목이기도 했다.

    하지만 연출가가 그 부분을 아주 매끄럽게 진행시켰다. 그리고 가장 좋았던 점이 산울림 소극장이 작은 곳이라서 배우의 표정과 숨소리까지 가까이에서 느낄 수 있었다는 것.

    #. 어느 심벌즈 연주자의 유언

    어느 심벌즈 바로 함석진 연주자의 유언은 잠시 혼란스럽게 했다. 자신의 죽음을 예견을 한  것 인가 아니면 시각장애인이 될지 몰랐던 그도 시각장애인이 된 것처럼 혹시 모를 일에 앞둬서 유서를 작성했는지는 모르겠지만, 나는후자에 더 가깝다고 생각이 들었다.

    그의 유서를 보면 '세상의 모든 음악에 심벌즈가 등장하는 것은 아닙니다. 거의 대부분, 심벌즈는 침묵한다. 그런데도 여러분은 내가 침묵 속에서도 모든 음악의 연주를 함께 하고 있다는 것을 잘 아십니다. 오케스트라 단원 여러분, 언제가 나는 영원히 침묵하겠지요. 그 때는 내 분신이었던 심벌즈를 후임자에게 주십시오. 절정의 순간, '챙!' 울려 퍼지는 심벌즈 소리가 영원한 침묵도 하나의 오케스트라 음악임을 증명할 것입니다.'라는 대사가 나온다.

    이 유언이 아마도 이 연극의 말하고자 하는 바가 모두 들어있는 곳이라고 생각이 든다. 먼저 언급했었던 인간은 사회적인 동물. 이 간단한 것과 오케스트라에서 심벌즈를 연출하는 사람의 삶 이 두 가지의 조합을 가지고 이야기를 구상하고 간단한 플롯으로 한 남자의 삶을 말해준다.

    그는 단 한 번도 등장하지 않고 오로지 언급이나 아내의 회상에 의해 등장한다. 하지만 그 파급력은 어마어마하다. 실종된 설정이기 때문에 등장하지 않고 그의 아내와 동료들이 그를 이야기하고 떠올린다.

    그가 실종되기 전으로 돌아가서 그를 등장시켰다면 극의 재미를 떨어뜨릴 것이다.  그가 등장하지 않고 언급을 하는 설정이 이 연극의 묘미다.

    함석진이 심벌즈를 울릴 때 마다 봄꽃이 피어났다고 했다. 왜 봄꽃일까. 새로운 시작을 알리는 것일까. 봄에 꽃이 피지 않았는데, 그가 그 나무를 돌면서 챙 하고 심벌즈를 연주하자 다음날 봉우리가 돋아난다는 설정은 상징이 강한 부분이라고 생각이 됐다.

    그의 연주가 죽은 것에 생명을 불어넣는다는 것을 유서를 빗대서 보자면, 그가 죽고 새로운 후임이 그의 심벌즈로 그의 자리에서 심벌즈를 연주하는 것이 어쩌면 자신의 죽음과 새로운 후임 즉 새로운 시작을 알리는 것을 상징한다고 생각된다.

    그의 심벌즈 자체가 상징이다. 혼자서는 시끄러운 소리를 내는, 어쩌면 무엇인가를 깨우는 소리. 심벌즈의 소음도 상징이고 조화를 이뤄 절정의 소리를 내는 것도 상징이다.

    초연에서 함석진의 아내 이자림이  함기석이 타고 있던 비행기 사고 현장으로 간다. 그때 그곳에서 느낀 것을 아이들에게 이야기 해줬다. '아빠는 없어도 있더라.'  이 대목에서 마음이 짠했다.

    없어도 있다는 것이 가슴속에서 기억 속에서 항상 존재하고 함께 한다는 것이다. 아이들도 마찬가지고 함석진의 아내처럼 '아빠는 죽어도 살아있다' 라고 말을 해줬고, 그것은 감동을 줬다.

    이번 공연에는 상징적인 부분이 많이 배제된 것 같다. 

    함석진의 아내 이자림의 아빠가 이자림이 자신의 얼굴을 그려줘서 그것을 감동하고 동네사람들에게 자랑을 하고 다닌다. 그녀를 화가로 키우려고 했던 것이 보여지는데, 초연때에는 함석진도 자신의 아이들이 그림을 잘 그리는 것을 단원사람들에게 자랑을 했다. 하지만, 이번 공연에서는 아내 이자림이 직접 자신이 그린 그림과 아이들이 그린 그림을 비교하면서 관객들에게 보여주는 장면으로 대체됐다.

    공연을 본 사람들은 오케스트라를 보면 심벌즈가 언제 일어나서 클라이맥스를 알리는 것을 보고 이 연극을 떠올리게 될 것이다. 그리고 자신 스스로는 어떤 악기일지 다른 사람의 눈에는 어떤 악기일지를 생각하면서 박자를 셀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