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도적 베껴쓰기'가 아니라면? 나도 몰라" 횡설수설

  • 지난달 27일 자신의 페이스북에 '표절 의혹'에 휩싸인 소설가 신경숙을 두둔하는 발언을 남겨 네티즌의 공분을 산 백낙청(77) 서울대 명예교수가 또 다시 신경숙을 옹호하고 감싸는 '억지'를 부려 비난을 자초하고 있다.

    백낙청은 31일 마찬가지로 자신의 페이스북에 글을 올려 "신경숙의 글이 일부러 베껴 쓰지 않고는 절대 나올 수 없는 결과라고 보는 문학관, 창작관에는 원론적으로도 동의하기 어렵다"며 "한국문학에 소중한 기여를 해온 소설가를 매장하려는 움직임에는 결코 합류할 수 없다"고 밝혔다.

    상상력까지 동원해 파렴치한 베껴 쓰기를 (사실이라고)단정하고 신경숙은 원래가 형편없는 작가였다는 자의적 평가마저 곁들여 한국문학에 소중한 기여를 해온 소설가를 매장하려는 움직임에는 결코 합류할 수 없습니다.


    백낙청은 "자신의 먼젓번 글을 읽고 호의적인 반응을 표하신 분도 계셨습니다만 부정적인 반응이 압도적인 것 같다"면서 "호의적 논평이나 적대적 감정의 표현에 일일이 답할 필요는 없겠지만, 진지한 비판에는 저나름의 추가해명을 시도하는 게 도리라고 생각했다"며 페이스북에 추가 의견을 달게 된 배경을 설명했다.

    백낙청은 "신경숙의 표절을 재빨리 시인하고 사과하는 것이 이로울 텐데 왜 저러나 하고 안타까워하는 분이 적지 않은 것 같다"고 밝힌 뒤 "그러나 문학담론에서건 사회담론에서건 진실에 입각해야 긴 생명을 누릴 수 있다"며 '신경숙의 소설을 표절로 단정짓는 분위기가 결코 진실은 아니'라는 취지의 궤변을 늘어놨다.

    신경숙의 해당 작품에서 표절 논란을 자초하기에 충분한 문자적 유사성이 발견된다는 사실에 합의했습니다. 하지만 그런 유사성을 의도적 베껴쓰기로 단정할 수는 없다고 판단했습니다. 앞으로 더 본격적인 논의를 시도하겠노라고 했던 것도 문학의 진실을 이제부터 제대로 탐구하고 토론해보자는 취지였습니다.


    백낙청은 마찬가지 논리로 "예술창작의 과정에서 모방, 차용 또는 도용의 결과를 마트에서 들고 나오는 고정된 물체처럼 생각하는 발상 자체가 과연 적절한지 의문"이라면서 "그런데도 신경숙에 대한 '표절시비'는 마치 베껴쓰기의 현장을 CCTV로 지켜본 듯한 '고발'로 출발했다"고 지적했다.

    이런 식의 상상을 통해 하나의 추론에 도달하는 것도 물론 당자의 자유입니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추론이요 추정이지 그와 다른 모든 추정을 봉쇄하고 토론을 종결할 진실 자체는 아닌 것입니다.


    그러나 백낙청은 "'신경숙의 해당대목이 의식적인 베껴쓰기가 아니면 도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라는 질문에는 자신 역시 정확한 진실은 모른다"고 밝혀, 평소답지 않게 확고한 결론을 내리지 않는 '애매모호한' 스탠스를 취했다.



  • "신경숙, 의도적인 베껴쓰기 아냐" 옹호 발언


    백낙청은 지난달 27일 자신의 페이스북에 "논란이 된 신경숙 단편의 대목을 '의도적인 베껴쓰기'로 단정지을 수는 없다"는 글을 올려 네티즌의 이목을 집중시켰다. 

    이 글에서 백낙청은 "'문제 대목이 표절 혐의를 받을 만한 유사성을 지닌다는 점을 확인하면서도 의도적인 베껴 쓰기, 작가의 파렴치한 범죄 행위로 단정하는 데는 동의할 수 없다'고 밝힌 백영서 편집주간의 입장을 지지한다"고 밝혔다.

    이는 계간지 '창작과 비평'의 백영서 편집주간이 (창작과비평)가을호 첫머리를 통해 "신경숙씨의 작품 '전설'이 미시마 유키오의 '우국'과 문자적 유사성은 있지만 의도적 베껴쓰기로 볼 순 없다"고 주장한 것에 이견이 없다는 뜻을 나타낸 것. 백낙청은 96년부터 '창작과 비평'의 편집인으로 참여하고 있다.

    백영서 편집주간의 명의로 나간 이 글은 비록 제가 쓴 것은 아니지만 저도 논의과정에 참여했고 거기 표명된 입장을 지지한다는 말씀을 먼저 드립니다.


    백낙청은 "애초에 표절혐의를 제기하면서 그것이 의식적인 절도행위에 해당한다고 단정했던 일부 언론인과 상당수 문인들에게 창비의 이런 입장표명은 불만스러운 정도가 아니라 불쾌한 도전행위일 수도 있을 것"이라며 "우리 나름의 오랜 성찰과 토론 끝에 그러한 추정(고의적 표절)에 동의하지 않는다는 입장에 도달할 수도 있다는 점을 이해해달라"고 밝혔다.

    이같은 주장은 표절 의혹으로 도마 위에 오른 신경숙이 "아무리 기억을 뒤져봐도 '우국'을 읽은 기억은 나지 않지만, 이제는 나도 내 기억을 믿을 수 없는 상황이 됐다"며 표절은 인정하나 '고의성'은 부인했던 것과 동일한 맥락으로 풀이된다.


  • 소설가 이응준의 주장에 따르면 신경숙은 일본의 탐미주의 작가 미시마 유키오(平岡公威)의 작품 일부를 표절한 것으로 의심 받고 있다.

    실제로 두 작품은 특정 문단에서 매우 유사한 단어와 문장 구조를 갖고 있는 것으로 드러났다. 100% 동일한 문장은 아니지만, 미시마 유키오의 작품 발간 시기가 앞서 있다는 점을 감안할 때 신경숙이 이 작품의 영향을 받았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는 게 학계의 공통된 중론이다.
      

    두 사람 다 실로 건강한 젊은 육체의 소유자였던 탓으로 그들의 밤은 격렬했다. 밤뿐만 아니라 훈련을 마치고 흙먼지투성이의 군복을 벗는 동안마저 안타까워하면서 집에 오자마자 아내를 그 자리에 쓰러뜨리는 일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레이코도 잘 응했다. 첫날밤을 지낸 지 한 달이 넘었을까 말까 할 때 벌써 레이코는 기쁨을 아는 몸이 되었고, 중위도 그런 레이코의 변화를 기뻐하였다.

        - 미시마 유키오 '금각사, 우국, 연회는 끝나고' 중에서

    두 사람 다 건강한 육체의 주인들이었다. 그들의 밤은 격렬하였다. 남자는 바깥에서 돌아와 흙먼지 묻은 얼굴을 씻다가도 뭔가를 안타까워하며 서둘러 여자를 쓰러뜨리는 일이 매번이었다. 첫날밤을 가진 뒤 두 달 남짓, 여자는 벌써 기쁨을 아는 몸이 되었다. 여자의 청일한 아름다움 속으로 관능은 향기롭고 풍요롭게 배어들었다. 그 무르익음은 노래를 부르는 여자의 목소리 속으로도 기름지게 스며들어 이젠 여자가 노래를 부르는 게 아니라 노래가 여자에게 빨려오는 듯했다. 여자의 변화를 가장 기뻐한 건 물론 남자였다.

        - 신경숙 '전설' 중에서


    27일에 이어 31일에도 백낙청이 '억지성 발언'으로 신경숙의 행위를 두둔하고 나서자 네티즌들은 "창작과 비평이란 잡지가 이제 '향우회 회보' 수준으로 전락했다"는 장탄식을 내뱉으며 한층 격앙된 반응을 보이고 있다.

    진실을 추론으로 눙치는게 당신이 말하던 문학의 양심이덥니까.

            - dkwl****

    사건의 본질을 전혀 이해못한 견해만 내놓으시는군요. 매장이라? 오히려 독자를 아주 비하하는 발언을 하고 계신데 이해 관계 때문이라기엔 옹색하기 짝이없군요 .

        - kea5****

    한국 문학에 기여... 추론이지 진실 아냐.

        - sang****

    물론 기여한 바도 크지만 우리나라 수준도 많이 올라왔고. 국민들 수준은 21세기인데 니들은 19세기.

        - ys62****

    추론이 아니면 어떻게 표절을 가려내냐? 자백해야지만 표절임?

        - epar****

    야아...한입으로 두말하는거 대단하네...발전에 기여했다고 매장하지 말자는 논리를 여기저기 갖다대자면 스스로 제일 부끄러워지는거 아닌가? 당신이 원탁회의인가에 앉아서 여태까지 해온일을 생각해보슈...진짜 나이들면 뇌가 굳어서..고집만 남나보다.

        - chul****

    창작과 비평이란 잡지가 이제 "향우회 회보" 수준으로 됐구나!!!

        - khdk****


    다음은 백낙청이 지난달 31일 페이스북에 올린 '신경숙 옹호 글' 전문

    창비 계간지가 나올 때마다 페북을 통해 내용의 일부를 소개해왔습니다. 이번호의 경우 '책머리에'와 '긴급기획'만 간략히 소개했는데 거기 덧붙인 저의 의견 때문에 기왕의 논란이 더욱 가열되면서 다른 내용을 소개할 겨를도 없었습니다.

    저의 먼젓번 글을 읽고 호의적인 반응을 표하신 분도 계셨습니다만 부정적인 반응이 압도적인 것 같습니다. 그중 상당수는 단순히 불쾌감이나 실망감을 표시했고 또다른 상당수는 애당초 자신이 내렸던 단정적 판단에 제가 동의하지 않음에 분개하며 이미 너무도 익숙해진 주장을 되풀이하는 성격이었습니다. 반면에 기존의 입장대로지만 자기 견해를 성의있게 정리하고 근거를 제시하는 비판도 있었습니다. 호의적 논평이나 적대적 감정의 표현에 일일이 답할 필요는 없겠습니다만, 진지한 비판에는 저나름의 추가해명을 시도하는 게 도리겠지요.

    하지만 그 일은 잠시 뒤로 미루고 가을호 특집을 먼저 소개하겠습니다. 이번호는 비문학 분야 특집인데 '시대 전환의 징후를 읽는다'를 큰 제목으로 달았습니다. 국내 필자의 글 3꼭지와 중국 글의 번역 한개를 실었지요. 저는 이번 특집에도 다른 잡지가 별로 관심을 안 갖는 창비식 담론, 주류학계는 물론 세칭 진보학계에서도 외면하기 일쑤인 우리 나름의 문제의식을 담았다고 자부합니다.

    물론 우리가 항상 그 문제의식을 충분히 살리는 성과를 올려왔다는 주장은 아닙니다. 이번 특집도 그 점은 마찬가지입니다. 저의 과한 욕심인지 몰라도 좋은 글이라도 성에 안 차는 대목이 있곤 합니다. 독자 입장에서는 더 그러실지 모르지요.

    예컨대 김종엽 교수의 '87년체제의 정치적 전환을 위해'는 오늘의 한국사회를 포괄적이면서도 역사적으로 이해하는 틀로서 '87년체제'와 함께 이른바 분단체제 개념이 동원되고 있습니다. 주된 내용은 87년체제의 말기국면에 부쩍 두드러지는 '탈민주화'와 '국가능력의 약화' 현상을 서로 연결시켜가며 구체적으로 분석한 것이지요. 분단체제의 작용에 대한 명시적 언급도 나옵니다. 그러나 구체적인 한국사회 분석과 서술의 과정을 시종 분단체제의 작동현상으로 인식하는 자세가 더 철저했으면 좋았겠다는 게 저의 욕심으로 남습니다.

    김연철 교수의 '거울 앞에서'는 '분단체제와 북한의 변화'라는 부제를 달고 있습니다. 그간 북한연구계는 북한을 '반국가단체' 또는 '미수복지역'으로 보는 관점을 넘어 좋든 싫든 그나름으로 하나의 국가요 사회라는 인식을 정립하는 데 많은 기여를 해왔습니다. 그러나 북한이 분단체제의 일익에 해당하는 분단사회라는 인식은 부족했던 것 같습니다. 그 점에서 김연철 교수의 글이 돋보이며, 지난 70년의 북한역사를 간결하고 평이하게 정리해낸 솜씨도 남다릅니다. 하지만 이 글에서도 분단체제가 단순히 동서냉전체제의 산물이 아니라 여러가지 복합적 요인이 결합된 독특한 체제라는 인식이 한층 투철했으면 하는 욕심입니다.

    예컨대 필자는 북한에서 동구와 같은 내적 변화가 일어나지 않은 것을 '냉전체제' 탓으로 돌리는데(49면), 이럴 때는 '분단체제'라고 하는 게 더 정확하고 일부 동구 사회주의국의 변화가 냉전시대에 이미 일어났다는 반박에서 자유로워집니다. 물론 저자가 ‘냉전체제'라 할 때는 ‘분단체제라는 한반도형 냉전체제'를 염두에 두었겠지만요.

    김동춘 교수의 '한국사회 대전환의 길'은 지난 5월 제가 펴낸 대담집 '백낙청이 대전환의 길을 묻다: 큰 적공을 위한 전문가 7인 인터뷰'에 대한 서평을 겸한 본격적인 논문입니다. 먼저 저는 대다수 사회과학자들이 분단체제론을 아예 묵살하는 현실에서 평소부터 한국사회 분석작업에서 분단과 전쟁 및 준전시상태를 빼놓지 않던 전문가가 이토록 성의있게 논평해준 데에 고마움을 느끼지 않을 수 없습니다. 책과 저 개인에 대한 덕담도 많이 해주셨어요. (그렇다고 '문학권력'에 영합할 분은 아닙니다.^^)

    글의 후반부 3~4절로 가면 김교수의 독자적 견해가 주로 나오고 저에 대한 명시적 또는 암시적 비판이 적지 않습니다. 제가 해온 작업 중 공백이나 허점을 많이 지적해주셨다고 생각합니다. 다만 김교수의 논지 중 많은 부분은 저하고 크게 다를 바 없는 이야기라고 느꼈어요. 앞부분에서 저의 분단체제 개념을 비교적 자상하게 소개해주던 필자가 뒤로 가면 '분단-전쟁체제'라는 자신의 한층 축소된 개념을 동원하면서 그것 외에 이것도 들어가고 저것도 들어가야 한다고, 저의 분단체제론과 딱히 어긋난다고 할 수 없는 주장을 하신 것 같아요.

    한국에도 이미 소개된 중국의 사상가이자 '3농문제' 전문가 원 톄쥔(溫鐵軍)과 그의 연구팀이 중국의 '일대일로(一帶一路)' 정책에 관해 내놓은 연구성과가 네번째 꼭지입니다. 우리가 한반도를 넘어 동아시아 및 세계적 차원의 대전환을 모색할 때 깊이 참고함직한 글이라 믿습니다. 아시아인프라투자은행(AIIB) 구상과도 직결된 중국의 국가전략이 나오게 된 배경과 미국이 지배하는 기존질서에 비했을 때의 중국측 전략의 상대적 합리성 등 흥미로운 이야기가 많습니다.

    그러나 제가 특히 감명깊게 읽은 것은 결론부분입니다. "자생적인 사회정의 담론이 결핍된 상태에서 인프라 발전주의를 내세우는 한 중국은 서구의 자유민주주의 이데올로기에 도전할 수 없다."(97면) "말하자면, '일대일로' 그 자체는 영혼이 없다. 한층 깊고 두터운 사회정의의 사상과 문화적 내용으로 그것을 채워가야 한다"(98면)는 것입니다.

    이런 사상적 탐구를 위해서도 특집에 뒤이어 실린 '대화'는 같이 읽어볼 만한 글입니다. '신실학'의 정립을 위해 폭넓은 연구를 해온 한학자 임형택 명예교수, 일본인으로서 한국에 정착하여 한국사를 연구해온 미야지마 히로시 성균관대 특임교수, 중국사 전공자이자 동아시아 지식인연대의 일선에서 활약해온 백영서 연세대 교수 등 세분의 대화인데, 논평할 거리가 많습니다만 제 글이 너무 길어지므로 자제하겠습니다.

    신경숙사태의 여파로, 창비가 분단체제론을 포함해서 무슨 그럴싸한 이야기를 해도 이제는 믿음이 안 간다고 말씀하신 분도 계십니다. 또, 창비에 매우 호의적인 입장에서, 안할 말로 ‘꼬리자르기’를 해서라도 신경숙의 표절을 재빨리 시인하고 사과하는 것이 창비가 추구하는 대의에 대한 설득력을 유지하는 데 이로울 텐데 왜 저러나 하고 안타까워하는 분도 적지 않습니다.

    그러나 문학담론에서건 사회담론에서건 진실에 입각해야 긴 생명을 누릴 수 있습니다. 우리가 "신경숙의 해당 작품에서 표절 논란을 자초하기에 충분한 문자적 유사성이 발견된다는 사실에 합의했습니다. 하지만 동시에 그런 유사성을 의도적 베껴쓰기로 단정할 수는 없다고 판단했습니다"(2~3면)라는 입장을 표명하고 앞으로 더 본격적인 논의를 시도하겠노라고 했던 것도 문학의 진실을 이제부터 제대로 탐구하고 토론해보자는 취지였습니다.

    그런데 '책머리에'나 저의 페이스북 발언이나 짧은 지면에 주로 골자만 전달하다보니, 처음부터 적의를 갖고 대하지 않는 분들도 도저히 이해하기 어렵다고 반발하셨습니다. 문자적 유사성이 확인되었으면 베껴쓰기요 도둑질이지 무슨 이야기가 그리도 복잡하냐, 마트에서 물건을 들고 나오다 들켰으면 본인이 자백하거나 CCTV에 훔치는 장면이 반드시 찍혔어야 도둑질이냐 ... 등등의 반론이 제기되었지요.

    하지만 예술창작의 과정에서 모방, 차용 또는 도용의 결과를 마트에서 들고 나오는 고정된 물체처럼 생각하는 발상 자체가 과연 적절한가요? (이에 대해서는 윤지관 교수 외에도 장정일, 박민규 같은 작가들이 다른 견해를 이미 발표한 바 있습니다.) 그런데도 신경숙에 대한 표절시비는 마치 베껴쓰기의 현장을 CCTV로 지켜본 듯한--“자, 이제 눈을 감고 내가 말하는 장면을 각자의 머릿속에 그려보자...."(가을호 353면의 인용문)--고발로 출발했습니다. 이런 식의 상상을 통해 하나의 추론에 도달하는 것도 물론 당자의 자유입니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추론이요 추정이지 그와 다른 모든 추정을 봉쇄하고 토론을 종결할 진실 자체는 아닌 것입니다.

    Onook Oh님이 언급하신 표절소프트웨어도 학술논문이 아닌 문학작품의 경우에는 그대로 믿기 힘든 면이 있습니다. 말이란 원래 아 다르고 어 다르다고 하는데, 말을 가장 섬세하고 정교하게 구사하는 언어예술인 문학에서는 소프트웨어를 돌려서 나오는 일치율보다 그러한 단어들이 작품 전체의 일부로 어떤 효과를 내고 의미를 구성하는지가 더 중요하기 때문이지요.

    그런데 잡담 제하고 신경숙의 해당대목이 의식적인 베껴쓰기가 아니면 도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이 질문에 답할 정확한 진실은 저도 모릅니다. 다만 두어가지는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먼저 신경숙의 변호인을 자임한 윤지관씨도 “신경숙의 ‘전설'의 일부 문장들이 미시마 유끼오의 ‘우국’을 표절한 혐의가 있는 것은 분명하다"(357면)고 했는데, 그 점마저 제대로 인정하려 들지 않은 창비사의 1차 보도자료는 명백히 잘못된 것이었고 회사 대표가 곧바로 사과했습니다.

    둘째로, 그렇다고 그것이 일부러 베껴쓰지 않고는 절대 나올 수 없는 결과라고 보는 문학관, 창작관에는 원론적으로도 동의하기 어렵지만, 더구나 상상력까지 동원해서 저자의 파렴치한 베껴쓰기를 단정하고 거기다 신경숙은 원래가 형편없는 작가였다는 자의적 평가마저 곁들여 한국문학에 어쨌든(항상 좋은 작품만 써낸 건 아니지만) 소중한 기여를 해온 소설가를 매장하려는 움직임에는 결코 합류할 수 없습니다.

    끝으로 창비나 저의 이런 입장을 상업주의적 타락이나 노쇠한 권위주의 탓으로 규정하는 동료 평론가, 동업 편집자, 문학교수 그리고 문학담당 기자들이 적지 않은 사실에 대해서는, 조금만 더 시간을 두고 지켜봐달라고 부탁하고자 합니다. 창비의 실상이 그러하다면 누구도 창비의 조속한 몰락을 막을 수 없을 테니까요.

    긴 글 읽어주셔서 고맙습니다. 페북 친구 여러분의 건승을 빕니다.

    8/31 백낙청 드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