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천하대란이나 정세는 찬란하다’
    일본 아베담화 이후 – 벼랑에 선 한국 외교
    허문도/전 통일부 장관

  • 일본 아베 수상이 14일 발표한 담화는 미리부터 세계의 주목 속에 있었다.
    일본 아베 총리는 제2차세계대전에 패전한 지 70년에,
    지난날의 죄과를 반성하고 마음으로부터의 사죄를 하여
    새로운 미래지향을 해보이겠다고, 미리부터 온 세계에 떠벌렸기 때문이다.
    일본 국내로서도 아베가 스스로의 국정지표로 내걸었던
    <’전후레짐(체제)으로부터의 탈각’이
    이 담화로 종착역>을 맞이해 보일 것이라고 무게를 두고 있었다.

    그런데 세계의 면전에서 아베가 담화를 통해 드러내 보인 자세는,
    미국을 추켜세우고, 중국에 아양 떨고, 한국을 깡그리 무시하는 것이었다.

    그동안 한국이 정상회담을 거부하는 등으로 외교관계를 암초에 얹으면서까지,
    관계수복의 전제조건으로 걸어가며 요청했던 역사인식과 위안부문제 해결을
    아베담화는 냉혹하게 깡그리 무시하고는 막장포즈를 취하고 나왔다.
    아베의 정치계산과 역사감각 앞에 한국은 존재하지 않는 것이었다.

    과거사의 죄업을 사과할 것이라고 기대를 모은 자리에서,
    한국에 대해 공개적으로 무시하여 여타국에 대한 저자세와 대비시킴으로서,
    아베는 아주 교활한 수법으로 한국외교를, 나아가서는 한국이란 나라를
    세계 앞에 자기류로 모멸해 보인 것이다.

    아베는 지금 한국한테 교만을 떨고 있다.
    52년 샌프란시스코 조약으로 독립한 일본을 미국의 ‘속국’이라 하는 사람들은
    일본 내외에 많다.(대표적으로 현대일본연구의 세계적 대가 죤 다우어).
    일본의 외교와 전략을 장악해 온 미국에의 추종을 당연시 하고 정치적 자산으로 아는 것이
    집권권에 있는 일본 정치가들의 평균이었다 할 것이다.
    (당연히 대미(對美) 자주파와의 갈등이 일본정치사에 잠복해 있었다.)

    이 같은 일본에서 아베수상은 전쟁포기를 선언한 평화헌법의 제약을 박차고서
    집단자위권 행사체제를 이룩하여, 일본을 ‘전쟁할 수 없는 나라’에서 ‘전쟁할 수 있는 나라’로
    환골탈태해 가고 있다.

    아베의 전쟁국가노선에 반대하는 국민들이 더 많지만, 일본 최대∙최강의 정치’빽’인 미국이
    적극적으로 지지해 주는데 아베는 흔들리지 않는다.
    더욱 중국이 대두한 현하의 동아시아의 대 전환기에 미국은 일본을 거의 동격으로 끌어 올려,
    미일동맹을 압도적으로 강화함으로서, 세계4강이 주목해 마지않는 전략요충인 한반도에
    출병할 수 있는 근거까지 아베 일본은 손에 넣은 것이다.
    골수의 군국주의자 아베가 어떻게 기고만장하지 않겠는가.
    아베, 오늘의 교만의 연원은 이 부근일 것이다.

    한나라의 주권을 약탈하고 그 영토를 식민지로 하는 것은
    무릇 모든 침략의 최고형태이며 완결형이라 할 것이다.
    일본이 미국을 침략하여 태평양전쟁을 시작했을 때 그 앞 10년간은 중국을 침략하고 있었다.
    그 시발인 31년의 만주사변을 미국의 전쟁관료들이 태평양전쟁의 기점으로 알고
    동경전범재판의 소추상한으로 하고 있다. 이는 세계경찰역을 마다하지 않는 미국관료들의
    오늘에까지 문제를 남긴 치명적인 몰 역사성의 경우이다.
    식민지 조선에 진치고 있던 일본군대가 압록강을 월경하여 만주침략은 본격화 된 것이다.
    ‘식민지 조선은 일본의 중국침략 기지였다.
    일본은 침략전쟁의 결행단계에서, 미국의 실력이 겁났던지,
    미국하고 전쟁 회피교섭을 8개월 간이나 벌였다.
    미국이 요구한 최저선은 일본이 침략한 중국에서 물러가라는 것이었다.
    일본은 중국침략에서 물러나기 싫어 진주만을 기습하여, 세계와 전쟁했던 것이다.

    아베 수상이 패전 70년에 침략의 죄업을 반성할 것처럼 해놓고서는,
    죄업의 원점인 한국은 세계 앞에서 눈감아 버렸다.
    이것이 아베 일본이 내걸고 있는 ‘적극적 평화주의’의 외교수법이란 말인가.

    한국외교의 벼랑은 어디에 있는가.
    군국주의자 아베가 그 속성을 한국 향해 노출했다고, 한국외교의 벼랑인 것은 아니다.
    문제는 외교당국이 아베로부터의 수모체험을 직시하지 못하고,
    분노를 표시할 줄도 모르는 이류적 상황인식 자체에 있다.
    수모체험의 직시에서 만이 역사의 추동력과 설욕의 에너지는 작동되는 것이다.

    벼랑은 대도약의 챤스일 수도 있다.
    현하의 상황전망을 압축해 놓은 것 같은 표현이 있다.
    ‘천하대란(天下大亂)이나 정세는 찬란하다(splendid)’.
    이는 모택동이 한 말이다.
    1971년 미국의 키신져가 중국과 수교하고자 북경을 비밀방문 했을 때,
    주은래에게 내린 지침 속에 들어 있다.
    모택동(毛澤東)은 이 같은 정세전망을 미국측에 과시해 보이라고 일렀던 것이다.

    그때 중국은 아직 문화대혁명 속에 있었고, 공산대국 구소련의 침공위험 속에 있었으며,
    사회주의 경제는 바닥이었다. 이 같은 ‘천하대란’의 한복판에서 키신져를 앞에 하여
    중국의 지도부가 피력해 보인 것은 온세계를 적으로 한 대결에서도,
    중국은 스스로를 지켜낼 전략공산을 가졌다는 것이었다.

    아베의 교만 앞에서 외교당국이 한번 다져야 할 것은 상황인식과 발상의 전환이다.

    먼저 전환기 인식이다.
    중국이 대두하고 미국이 재정적으로 기울고 있는, 동아시아의 대전환기에
    일본은 전쟁하는 나라가 되고, 북한은 핵무력을 고도화하고 있다.
    이 상황을 한국 쪽에서 압축하면 ‘천하대란’의 상이라 해도 될 것이다.

    그러나 한국외교가 발상을 바꾸기만 한다면, 전환기 상황에서 한반도가 가질수 밖에 없는
    지정학적 중핵성에 눈이 간다면, 정세는 찬란하다’는 것을 모를 수 없을 것이다.

    미국을 다녀온 박대통령이 일본에 가지 않고, 중국에 먼저 간데서부터
    한일관계는 껄끄러워졌던 것을 돌이켜 볼 것이다.
    대전환기의 한복판에서 박대통령이 보인 외교행보의 혁명적 선견성을
    외교당국이나 보좌진은 따라가지 못했다.
    외교당국은 대통령의 선견성을 적극적 논리로 국민 앞에 풀지 못했고,
    한반도 위에 역사적으로 드물게 찾아온 지정학적 전략챤스를 알아보지 못하는듯,
    한∙미∙일 냉전구조 밖으로 운신을 못했다.
    그동안의 국력차의 반영이기나 한 것처럼 대통령의 외교감각이 과거지향적이고 감정적이라고
    몰아부치는, 일본쪽 홍보논리가 모든 한∙일관계 전문가라는 자들의 입과 국내 미디어를 통해
    한국내에 차고 넘쳤던 것을 곱씹어 보아야 할 것이다.
    그것은 일본에 붙어야 한국이 산다는 구한말의 일진회 풍조에 닮아 있다.
    그 결과가 70년 담화에서 아베의 교만으로 드러난 것 아닐 것인가.

    다음으로 역사적으로 드물게 한반도에 찾아온 전략균형점을 깊이 자각하는 일이다.
    긴 역사 속에서 한반도의 지정학적 요충성은 국가자주에 짐을 안기는 경우가 더 많았다.
    세계경제 문명의 중심이동과 함께, 동아시아가 맞이한 대전환기는
    반도위에 해양세력과 대륙세력 간의 전략적 균형점을 만들어 놓고 있다.

    지금부터의 자주∙자존의 요체는 이 균형점의 지정학적 유연성을 어떻게 유지하느냐이다.
    역사적 악연을 청산 못하는 약삭빠른 일본이 벌써 미국을 업고 지정학적 유연성의 일부를
    잠식하고 있다.(유사시의 반도 출병권 확보, 이번 가을에 약속된 제반 군사협력 등).
    바로 잡아야 할 것이다.

    지정학적 전략균형점을 딛고 서서, 평화 조율자로서의 사명을 세계 앞에 천명해 보이는 것이다. 상대는 안보의 기반국가인 미국과 제일의 교역대국인 중국일 뿐이다.

    이번 가을, ‘지금은 돌아와 거울 앞에 서게 된’ 한국이
    오바마 대통령과 시진핑 주석을 만나게 되어있다.
    창조적 외교가 계절의 꽃 국화처럼 피어날 것이다.
    ‘정세는 찬란하다’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