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4년 3월에는 ‘전쟁 공포’로 사재기 등 극성…현재는 “못살겠다, 붙어보자” 반응 많아
  • ▲ 1994년 3월 북한의 '서울불바다' 발언 다음날 조선일보. 당시 한국 사회는 패닉에 빠졌다. ⓒ네이버 옛날신문 캡쳐
    ▲ 1994년 3월 북한의 '서울불바다' 발언 다음날 조선일보. 당시 한국 사회는 패닉에 빠졌다. ⓒ네이버 옛날신문 캡쳐


    “우리는 전쟁도 불사할 겁니다. 여기서 서울은 멀지 않습니다. 전쟁이 나면 서울도 ‘불바다’가 되고 말 것입니다. 송 선생 당신도 살아남지 못해요.”


    1994년 3월 19일, 북한의 핵개발과 NPT 탈퇴 등을 두고 판문점 남측 ‘평화의 집’에서 남북 실무대표가 만난 자리에서 북한 박영수 단장이 내뱉은 말이다.

    이에 한국 측 송영대 단장이 “회담하러 나온 사람이 전쟁 운운할 수 있느냐”며 격분했다. 하지만 이 발언은 곧 언론을 통해 그대로 전달돼 한국 사회를 공포에 몰아넣었다.

    여기다 “미국은 2개 항공모함 전단과 해병기동부대를 태운 함정 등 30척의 군함을 한반도로부터 하러 거리에 집결시켰다”는 美언론들의 보도가 더해지면서, 한국 사회는 말 그대로 ‘공황(恐惶)’에 빠졌다.

    ‘서울 불바다’ 발언 이후 전국 곳곳의 슈퍼마켓, 백화점 등에서는 사재기가 극성이었고, 해외로 탈출하려는 사람들은 공항과 항구 등으로 몰려갔다. 군대에 자녀와 형제를 보낸 사람들은 안부를 알아보느라 발을 동동 굴렀다.

    21년 뒤인 2015년 8월 22일, 북한은 대남도발에 대한 책임을 회피하며, “앞으로 48시간 뒤인 22일 오후 5시까지 대북 심리전용 확성기 방송을 중단하지 않으면, 강력한 군사적 조치가 있을 것”이라고 협박했다.

    하지만 한국 사회는 조용했다. 주요 도시에 사는 사람들은 여름 막바지 피서를 가느라고 고속도로로 몰렸을 뿐 어디서도 사재기나 해외 도피 등의 움직임을 찾아볼 수 없었다. 일부 좌익 성향 매체들이 국민들의 불안감을 전하려고 인터뷰를 했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정반대였다.

  • ▲ 지난 22일 TV조선 보도화면. 북한의 최후통첩에도 국민들은 동요하지 않았다. ⓒTV조선 보도화면 캡쳐
    ▲ 지난 22일 TV조선 보도화면. 북한의 최후통첩에도 국민들은 동요하지 않았다. ⓒTV조선 보도화면 캡쳐


    “이제는 지겹다. 한 판 붙어보자.”

    일부 네티즌들이 온라인 커뮤니티에 올린 말은, 마치 1993년 3월 북한 대표단이 했던 말처럼 들릴 정도로 과격했다. “이 참에 정은이 집단을 박살내고 통일을 이루자”는 말도 나왔다.

    전방 군부대에서는 북한의 군사도발 가능성이 농후한 상황임에도 전역을 연기하는 장병들이 곳곳에서 나오고 있다. 예비역이나 해외 유학생 가운데서는 “북괴가 쳐들어오면 언제든지 나가 싸우겠다”면서 SNS에 군복 사진 등을 올리며, 결전을 다짐하는 사람들까지 있었다.

    21년이라는 세월이 긴 시간이기는 하지만, 이 같은 한국 국민들의 반응은 김정은 집단이 기대하던 반응과는 정반대였다. 국민들은 왜 이런 반응을 보이는 걸까.

    1994년 3월 ‘서울 불바다’ 발언이 있기 전까지 북한은 한국에 대해 강력한 군사도발을 하지 못했다. 주한미군의 존재도 있었지만, 무엇보다 군 출신 대통령들이 북한의 군사도발에 항상 강력한 대응을 주문했고, 실제 그렇게 움직였기 때문이다. 때문에 국민들은 북한의 군사도발이 곧 전쟁으로 이어진다는 생각을 갖게 됐다.

    하지만 1998년 김대중 정부가 들어선 뒤 ‘햇볕정책’으로 북한에 ‘무차별·묻지마 지원’을 해주고, 2003년 노무현 정부의 주요 인사들은 한 걸음 더 나아가 한국 사회의 안보의식을 해체하는 정책을 추진했다.

    그동안 북한은 NPT 재탈퇴와 핵실험, 장거리 탄도미사일 실험 등을 줄기차게 했다. 북한은 여기서 그치지 않고, 이란-시리아와의 ‘대량살상무기 개발 커넥션’을 통해 막대한 외화를 벌어들였다. 북한의 평화위협이 한반도를 넘어 중동으로까지 퍼진 것이다.

    한국에 대한 북한의 협박도 갈수록 도를 더했다. 하지만 한국 정부는 제대로 된 대응을 하지 않고 항상 양보했다. 그 과정에서 한국 국민들의 자존심은 점점 더 바닥으로 떨어졌다.

  • ▲ 지난 22일 버스 터미널에서 부대복귀 버스를 기다리는 장병들. 북한이 바란 미복귀, 탈영 소식은 없었다. ⓒ연합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 지난 22일 버스 터미널에서 부대복귀 버스를 기다리는 장병들. 북한이 바란 미복귀, 탈영 소식은 없었다. ⓒ연합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명박 정부가 들어선 뒤인 2008년 7월, 금강산 관광객이었던 故박왕자 씨가 북한 인민군의 조준 사격으로 피살되고, 2010년 3월 천안함 폭침, 같은 해 11월 연평도 포격 도발이 일어난 뒤에도 한국 국민들이 원했던 ‘보복’은 없었다. 늘 ‘무적의 강군’이라고 선전하던 군 당국의 모습은 무력해 보였다.

    자존심에 상처를 입은 한국 국민들의 감정은 돌고 돌아 북한 김정은 집단에 대한 ‘분노’가 됐다.

    2011년 12월 김정일이 죽은 뒤 서른 살도 채 안 된 김정은이 집권했다. 김정은은 집권 후 한국을 향해 더욱 심한 막말과 협박으로 위협을 했다. 아직은 ‘유교적 사고방식’이 남아 있는 한국에서 ‘어린 놈’이 말을 함부로 내뱉으며 기고만장해 하는 모습은 국민들의 감정을 더욱 자극했다.

    여기다 최근 젊은 세대들의 자신감도 한 몫을 했다. 객관적으로 볼 때 한국의 군사력이 북한의 그것에 절대적으로 뒤처지지 않고, 미국이라는 막강한 동맹이 있음에도 “전쟁이 나면, 우리는 북한에 비해 잃을 것이 많다”며 북한 김정은 집단의 요구를 들어줘야 한다는, ‘자칭 진보’ 세력들에 대한 염증도 매우 커졌다.

  • ▲
    ▲ "야, 니네가 말한대로 최후통첩하고, 잠수함도 보냈어. 그런데 왜 항복을 안하냐고!" 열 받은 김정은의 모습. 한국에서 활동하는 간첩들은 한국 국민들이 김정은을 우습게 본다는 사실은 절대 보고하지 않는다. ⓒ北선전매체 화면캡쳐


    현재 온라인과 SNS 상에서는 “전쟁이 나면 우리에게 잃을 게 많은 것이 아니라, 지킬 것이 많다”는 말이 젊은 층을 중심으로 점차 확산되고 있다.

    김정은 집단의 대남 군사위협과 ‘최후통첩’에도 한국 사회의 반응이 21년 전과 전혀 다른 것은 이런 여러 가지가 복합적으로 작용한 때문으로 보인다.

    즉 김정은의 대남 협박이 더 이상 통하지 않게 된 것은, 북괴의 ‘자업자득’이라는 뜻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