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조선과 대한민국의 정신분열적 자기부정

    자신의 건국에 반대했던 정몽주를 기린 조선, 김구를 기리는 대한민국

    배진영   

  • 중종 이후 성리학이 조선의 지도이념으로 굳건히 뿌리를 내리면서,
    사림(士林)들 사이에서는 조선 성리학의 도통(道統)을 어떻게 규정하느냐 하는 문제가 제기됐다. 고려말 성리학을 들여온 안향, 고려말~조선초의 쟁쟁한 유학자들을 길러낸 이색,
    그리고 사림들의 직접적 선배가 되는 김종직-김굉필-조광조 등은 당연히 포함되어야 했다.
    문제는 이색과 김종직 사이에, 누구를 넣느냐 하는 것이었다.

    이때 도통의 기준을 어디에 두어야 하느냐를 놓고 논란이 벌어졌다.
    성리학의 학문적 공적을 앞세우는 공적론(功積論)과 의리명분을 중시하는 의리론(義理論)이
    그것이다.

    공적론의 관점에서 생각한다면, 우선 조선 건국의 1등 공신으로 성리학을 치국(治國)의 이념으로 채택한 정도전(鄭道傳)을 생각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는 ‘왕자의 난’으로 태종 이방원에 의해
    ‘역적’으로 단죄된 사람이어서 제외될 수밖에 없었다.

    그 다음으로 생각할 수 있는 인물은 권근(權近)이었다. 그는 이색의 애제자로 고려말 신진사대부의 대표 주자 중 한 명이었다. 조선 건국의 주체세력은 아니었지만, 태조 이성계의 부름을 받고
    출사(出仕)한 후에는 태조~태종 재위 기간 중 제도 정비, 대명(對明)외교 등에서 공을 세웠다.
    성리학에 대한 이해도 깊어서 <입학도설>등의 성리학 입문서를 지었다.
    그의 철학은 이황의 4단7정론에 영향을 미쳤다. 유학제조로 유학자 양성을 위한 제도를 정비하는 데도 기여했다. 그는 조선 성리학의 정통을 세울 때, 그 첫 자리를 차지해도 손색이 없는 인물이었다.

    하지만 조선 사림들이 자신들의 종주(宗主)로 선택한 인물은 권근이 아니라 정몽주(鄭夢周)였다. 사실 정몽주는 정도전이나 권근에 비하면 성리학에 대해 철저하지 못한 사람이었다.
    그럼에도 그가 선택된 것은, 그가 절의(節義)의 상징이었다는 이유가 컸다.
    ‘의리론’이 ‘공적론’을 누른 것이다.

    이미 정몽주는 그를 살해한 태종 이방원이 즉위한 직후 복권(復權)되어
    ‘대광보국숭록대부 영의정부사 수문전대제학 감예문춘추관사 익양부원군’이라는
    으리으리한 벼슬을 추증(追贈)받았다. 고려의 충신이 조선의 영의정으로 대접받게 된 것이다.

    태종의 이러한 조치는, 일단 자신이 정권을 잡은 이상 충절(忠節)의 상징인 정몽주를
    현창(顯彰)함으로써 신민(臣民)들의 충성을 확보하기 위한 정치적 제스처였다.
    하지만 성리학의 도통을 세우고, 문묘(文廟)에 배향(配享)하는 것은 다른 문제였다.
    그럼에도 정몽주는 1517년(중종 12) 문묘에 배향됨으로써 공식적으로 조선 성리학 도통의
    중심으로 인정받았다.

     학자들은 ‘의리론’이 ‘공적론’을 누른 것을 두고 성리학에 대한 이해가 그만큼 깊어졌기 때문이라고 해석하는 것 같다. 하지만 내가 보기에는 코미디도 이런 코미디가 없다.
    성리학을 치국의 이념을 채택한 조선을 건국하고 그 기틀을 다짐으로써 자신들을 존재할 수 있게 해 준 정도전이나 권근을 제치고, 조선의 건국을 부정했던 정몽주를 자신들의 도통으로 선택한 것은 정신분열적인 자기부정에 다름 아니다.
  • ▲ 이승만 건국대통령이 최초의 자유민주공화국 정부수립을 선포하는 연설을 하고 있다.(1948.8.15. 중앙청)
    ▲ 이승만 건국대통령이 최초의 자유민주공화국 정부수립을 선포하는 연설을 하고 있다.(1948.8.15. 중앙청)
    그런 정신분열적 자기부정이 21세기 대한민국에서도 되풀이되고 있다.
    우정사업본부가 광복(光復) 70주년 기념우표에 백범 김구 선생을 등장시킨 것이다.

    광복이란 무슨 뜻인가? 국립국어원의 <표준국어대사전>에 의하면 ,
    ‘빼앗긴 주권을 도로 찾음’이라고 풀이하고 있다.

    우리가 빼앗긴 주권을 도로 찾은 날은 언제인가? 1948년 8월15일이다.

    1945년 8월15일은 우리가 일제(日帝)로부터 해방된 날이기는 하지만,
    주권을 도로 찾은 날은 아니다.
    해방 이후 3년간 남한에서는 미(美) 군정이, 북한에서는 소(蘇) 군정이 통치권을 행사했기 때문이다. 우리가 주권을 도로 찾은 날은 대한민국이 건국된 1948년 8월15일이다.

    제헌국회에서도 원래 이날을 ‘건국기념일’로 기념하려 했다.
    하지만 삼일절, 제헌절, 개천절 등 다른 국경일과 통일성을 기해야 한다는 주장이 나와서
    광복절로 하게 된 것이다.
    이후 세월이 흐르면서 광복절이라는 말에서 ‘건국’의 의미는 잊혀졌다.
    대신 ‘광복’이 ‘해방’을 의미한다는 오해가 뿌리를 내리게 됐다.
    때문에 엄밀히 말하면 금년은 해방 70주년일 수는 있어도 광복 70주년일 수는 없다.

    광복, 즉 ‘잃었던 주권을 도로 찾음’을 기념할 때 우리가 기억해야 할 사람은 누구일까?

    당연히 대한민국 건국을 주도했던 우남 이승만 대통령이다.
    1945년 이후 3년 동안, 그는 공산주의자, 좌우합작세력은 물론 미 군정, 미 국무부 등과 싸워가면서 대한민국을 건국했다. 당시 해방공간의 지도자들 중에서 냉전(冷戰)이라는 세계사적 흐름을
    정확하게 읽고, 그에 상응하는 전략적 사고(思考)를 가지고 대처한 인물은 이승만이 유일했다.

     대한민국은 이승만의 작품이었다.
    거기에 더해 대한민국의 ‘건국의 아버지들(founding fathers)';;을 꼽는다면,
     독립운동가 출신으로 대한민국 건국에 참여한 이시영(부통령), 신익희(국회의장), 이범석(국무총리), 조병옥(유엔특사), 장면(유엔특사/주미대사) 등을 꼽을 수 있을 것이다.
    만일 광복을 기념하는 우표를 낸다면, 이승만 대통령 혹은 이승만 대통령과
    대한민국 건국에 참여한 ’건국의 아버지들‘을 등장시키는 것이 마땅하다.

    백범 김구 선생의 경우,
    평생에 걸친 항일독립투쟁을 통해 보여준 고결한 애족(愛族)의 정신에도 불구하고
    마지막 순간에 대한민국의 건국에 반대하고 소련과 김일성의 대남공작에 이용당했다는
    하자(瑕疵)가 있다.
  • ▲ 대한민국 건국을 반대하고 평양으로 북한을 찾아간 김구(오른쪽). 그는 소련의 통일전선 공작에 이용물이 되는 줄도 몰랐던지 모른다.(자료사진)
    ▲ 대한민국 건국을 반대하고 평양으로 북한을 찾아간 김구(오른쪽). 그는 소련의 통일전선 공작에 이용물이 되는 줄도 몰랐던지 모른다.(자료사진)
    때문에 김구 선생은 항일의 역사를 기리는 기념우표의 주인공은 될 수 있을지언정,
    광복이나 건국을 기념하는 우표의 주인공으로는 적절치 않다.

백번을 양보해서, 광복을 해방과 건국을 포괄하는 의미로 이해할 수도 있다. 그러면
이승만 박사와 김구 선생이 나란히 선 사진을 기념우표의 도안으로 사용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김구 선생 한 분만을 광복 70주년 기념우표에 등장시킨 것은 적절치 않다.

하긴 대한민국에서 살면서 백범을 높이고 우남을 낮추어보는 것은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다.
백범의 동상은 사람들이 많이 찾는 남산에 당당하게 서 있지만, 그 동상보다 훨씬 초라한 우남의 동상은 장충동 자유총연맹 입구와 이화장에 서 있을 뿐이다.
고액권 지폐에 넣을 인물을 묻는 각종 설문에서도 김구 선생에 대한 선호도가
이승만 대통령에 대한 선호도보다 훨씬 높다.

정치인들에게 존경하는 인물을 물으면, 많은 이들이 김구 선생을 꼽는다. 이승만 대통령이나 박정희 대통령을 꼽는 사람은 그보다 훨씬 적다. 야당인 새민련 의원들만 그런 게 아니라 여당인 새누리당 의원들 가운데서도 그런 사람들이 많다.

웃기는 일이다.
야당인 새민련의 뿌리를 거슬러 올라가면 이승만 박사를 도와 대한민국 건국에 참여했던
한국민주당이다. 김성수, 신익희, 조병옥, 장면, 윤보선 등등 ‘건국의 아버지’들이
한민당-민주당의 거두들이자 새민련의 조상이다. 새누리당은 더 말할 것도 없다.
그들은 누가 뭐라고 해도 자유당, 공화당의 후예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모범답안’이라도 되는 것처럼 백범 김구 선생을 가장 존경한다고 말한다. 개인적인 소신이라고? 장삼이사(張三李四)들은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다고 치자.
하지만 대한민국을 이끌어가는 정치인들이 그런 생각을 하는 건 문제가 있다.

대한민국을 건국한 이승만 대통령을 외면하고 폄훼하면서,
대한민국 건국에 한사코 반대했던 백범 김구 선생만을 기리는 것은
중증 정신분열이라고밖에 할 수 없다.

백범을 기리는 이들이 내세우는 이유는 열이면 열 다 똑같다.
백범이 ‘38선을 베고 누울 지언정’이라며 단독정부 수립에 반대하고 통일조국을 건설하기 위해
헌신했다는 것이다. 당시의 엄혹한 상황에서 단독정부 수립 반대는 곧 대한민국 건국에 반대하는 것이고, 통일조국 건설은 곧 공산당과의 연립정부 수립과 공산화를 의미했었다.
그들은 이 사실을 아는지, 모르는지.....

여기서 나는 조선시대 성리학의 망령을 본다.
조선을 건국했던 정도전이나 권근을 버리고, 조선 건국에 반대하다 죽은 정몽주를
자신들의 도통(道統)으로 받들었던 조선의 성리학자들이나,

'통일'이니 '민족'이니 하는 명분론에 사로잡혀 대한민국을 건국한 이승만 대통령을 외면하면서
김구 선생을 기리는 오늘날 대한민국의 지식인,정치인들은 너무나도 닮은꼴이다.
'명분론'이라는 망령이 아직까지도 우리 사회를 지배하고 있는 것이다.

누구는 ‘1948년 체제’의 해체를 주장하고, 누구는 ‘1987년 체제’의 해체를 주장한다.
하지만 우리가 진정 해체해야 하는 것은 ‘1392년 체제’다.
실질보다 명분, 현실보다 관념에 사로잡혀 자신의 뿌리도 제대로 인식하지 못하게 만드는
성리학적 명분론이 주류 이념이 되게 만든 ‘1392년 체제’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