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도국장-보도본부장-사장은 묵묵부답..데스크급 인사들만 강등 조치

  • 전쟁 발발 65주년을 하루 앞둔 6월 24일, "이승만 정부가 일본에 망명을 요청한 것은 사실이었다"는 황당무계한 기사를 내보내 물의를 빚은 공영방송 KBS가 관련 보도 책임자들을 일괄 교체하는 인사를 단행했다.

    KBS는 지난 14일 보도국 국제부문 주간, 국제부장, 디지털뉴스국장, 디지털뉴스부장 등 데스크급 간부들을 모두 '평기자'로 내리는 인사 발령을 내렸다.

    국제부 용태영 국제주간 → 심의실 평기자

    이재강 국제부장 → 디지털뉴스부 평기자

    디지털뉴스부 송종문 디지털뉴스국장 → 심의실 평기자

    백진원 디지털뉴스부장 → 라디오 뉴스제작부 평기자


    국제부는 지난달 24일 KBS '뉴스9'를 통해 '이승만 정부, 한국전쟁 발발 직후 일 망명 타진'이라는 보도를 낸 당사 부서. 디지털뉴스부는 이튿날 같은 내용으로 '전쟁 통에 지도자는 망명 시도…선조와 이승만'이라는 온라인판 기사를 작성한 부서다.

    조정된 직급과 발령 시기 등을 놓고 볼 때 이번 오보 사태에 대한 '문책성 인사'가 분명했다.

    그러나 KBS 측은 "이번 인사는 각 보직 임기에 따른 교체 인사"라며 '망명 요청설' 오보와는 관련이 없다고 못 박았다.

    ◇ 언론계 인사 "'도마뱀 꼬리 자르기식' 문책" 쓴소리


    KBS는 당시 보도 책임자였던 보도본부 간부 네 명을 '강등'시키는 조치에 머물지 않고, "KBS의 반론 보도가 굴욕적이었다"며 이인호 이사장과 각을 세운 '전국언론노조 KBS본부(제2노조)'에 대해서도 '메스'를 들이댔다.

    소식통에 따르면 KBS는 조대현 사장의 결재를 받아 제2노조 집행부와 조합원들에게 정직 2개월이나 감봉 5월 등의 중징계를 내린 것으로 전해졌다.

    이는 "초대형 오보 사태를 빚은 KBS가 국민 앞에 머리 숙여 사과를 하고, 공영방송으로서 책임있는 자세를 보일 것"을 촉구한 뉴데일리와 여러 시민단체들의 의견을 일부 반영한 처사로 풀이된다.

    하지만 이번 문책성 인사를 두고, '도마뱀 꼬리 자르기식 인사 조치'라는 지적도 만만치 않다.

    14~15일 공표한 강등·감봉 대상자에 보도의 '최종 책임자'인 보도국장이나 보도본부장, 사장의 이름이 포함되지 않아, "정작 책임져야 할 임원(몸통)들은 아무런 불이익도 받지 않고, 애꿎은 깃털만 건드렸다"는 쓴소리가 나오고 있는 것.

    이와 관련, 한 언론계 중진 인사는 "KBS는 대한민국을 수립한 이승만 정부의 도덕성에 흠집을 내기 위해 있지도 않은 날짜를 집어 넣는 '만행'을 저질렀음에도 불구, 아직까지 제대로 된 사과조차 하지 않고 있다"면서 "이번 인사 조치도 조대현 KBS 사장이 연임하려는 속셈에서 자신의 실수는 감추고 후배들의 허물만 부각시킨 비겁한 처사"라고 맹비난했다.

    또 다른 원로 인사는 "조대현 사장은 '실수'라는 말로, 고의적으로 저지른 범죄에 대한 '법적 책임'을 회피하려는 꼼수를 부리고 있다"면서 "더욱이 부하들에게 책임을 전가하는 모습은 스스로 자격미달임을 입증하는 꼴"이라고 일침을 가했다.

    조대현 KBS사장은 공영방송과 언론의 명예회복은 뒷전이고, 자신의 연임 운동에만 올인하는 것 같습니다. 지금 결단하지 않는다면 일평생 노조의 반국가적 조작행위를 방조했다는 비판을 면하기 어려울 겁니다. 그는 KBS 내외에서 불거지는 이같은 쓴소리에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 ◇ 조대현 KBS 사장, 연임 위해 후배들 가지 치기?


    '조대현 KBS 사장이 이번 오보 사태를 전적으로 책임져야한다'는 시각에 대해선 KBS 기자협회도 동일한 스탠스를 취했다.

    KBS 기자협회는 15일 '비겁한 징계의 칼날을 당장 거둬라'라는 제하의 성명을 내고 "정말로 보도가 잘못됐다면 보도의 최종 책임자가 책임을 져야할 사안 아니냐"며 "보도본부장과 보도국장, 사장도 책임에서 자유로울 수 없음은 분명하다"고 일갈했다.

    KBS 기자협회는 "현재 조대현 사장이 연임을 위해 곳곳에서 무리수를 두고 있다는 얘기가 나오고 있다"면서 "이번 징계 인사와 기자 6명에 대한 징계 추진이 청와대를 향한 구애의 손짓이 아닌가하는 의구심을 지울 수 없다"고 지적했다.

    지금의 조대현 사장이 후배들의 희생을 발판으로 사장이 됐음은 누구도 부인할 수 없다. 그런데 1년도 넘은 지금, 후배들을 징계하겠다는 것인가?


    그러나 KBS 기자협회는 "'오보 사태'가 불거진 뒤 KBS가 '이승만 기념사업회 망명정부설 부인'이라는 정정·반론 보도를 한 것은 대단히 굴욕적이었다"고 밝혀 여전히 비뚤어진 시각을 견지했다.

    특히 KBS 기자협회는 "잘못된 팩트 정정은 한 줄이었던 반면, (이승만 기념사업회의)반론을 담는데 대부분의 시간을 할애한 것은 '망명 요청' 사실 전체가 오보임을 스스로 인정한 셈"이라며 보도 전체가 '허위'라는 지적에는 동의할 수 없다는 입장을 취했다.

    ◇ 이승만 깎아내리기 위해 고의로 허위 방송

     
    KBS 기자협회는 망명 요청설 보도와 관련, '날짜 표기 문제'만 잘못으로 인정했을 뿐, 여전히 기사의 전반적인 내용은 사실에 부합하다는 고집을 부리고 있다.

    하지만 이 기사는 거론할 가치도 없는 허위 기사다.

    KBS는 "당시 다나카 타쓰오 야마구치현 지사가 한국전쟁 발생 이틀 뒤인 6월 27일, 외무성을 통해 '한국 정부가 6만명의 망명정권을 야마구치현에 세우고 싶어한다'는 전보를 받았다"고 주장했으나, 정작 일본 야마구치 현청 원문 기록에는 "6월 27일에 외무성 전보를 받았다"는 대목이 빠져 있었다.

    KBS 제작진이 무슨 이유에서인지, 있지도 않은 '외무성(1950.6.27)'이라는 날짜를 방송 화면에 삽입하는 조작을 저지른 것.

    원문을 살펴보면 외무성 전보를 받은 시점은 북한군이 부산을 위협할 당시인 1950년 8~9월을 가리키고 있었다.

    … 釜山の北のね,洛東江の川の所まで北朝鮮軍 ママが来てね。それで,このまま行ったならば,釜山は第二のダンケルクになると。そういった時にどうするかという問題ですが,外務省の方から電報が入って ね,韓国政府は六万人の亡命政権を山口県に作るということを希望しとると。


    하지만 KBS는 해당 원문에서 "북한군이 부산의 북쪽, 낙동강까지 진격해 들어왔다"는 대목을 삭제한 뒤 "한국 정부가 6만 명의 망명정권을 야마구치 현에 만들기를 바라고 있다고 한다"는 번역 문구만 방송에 내보냈다.

    다나카 타쓰오 지사가 말했다는 전보도 실제로 존재했던 것인지, 한국 정부가 당시 망명 의사를 공식적으로 타진했는지조차 확실치 않은 상황.

    다나카 타쓰오 지사의 구술 기록은 일본 외무성은 물론, 한국 외교부와 미국 국무부 문서에도 존재하지 않는 미확인 문건에 불과하다. 한미일 최고급 정부 문서에도 없는 내용을 KBS는 마치 사실처럼 '단독'이라는 타이틀까지 붙여 내보냈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누군가 과거 대한민국 정부와 이승만 대통령의 얼굴에 먹칠을 가하기 위해, 6.25 하루 전날 "이승만 정부의 망명 요청설이 사실"이라는 허위 방송을 내보냈다고 밖에는 해석할 수 없는 일이다.

  • 2003년에 실린 뉴욕타임즈의 관련 기사.   ⓒ 뉴데일리
    ▲ 2003년에 실린 뉴욕타임즈의 관련 기사. ⓒ 뉴데일리



    ◇ 뉴욕타임즈, 진상조사위원회 꾸려 내부 시스템 개혁


    한편, 자국의 역사를 깎아내린 '허위 기사'를 내보내고도, '최종 책임자'에 대한 문책을 하지 않은 KBS의 처사는 여러모로 아쉬움이 남는다.

    특히 대형 오보 사건이 발생하면 담당자는 물론, 최고 윗선까지 동반 책임을 지는 일이 허다한 선진국의 예를 비쳐볼 때 우리나라는 아직도 갈 길이 멀다는 느낌이 든다.

    창립된지 150년이 넘는 전통의 뉴욕타임즈도 '허위 기사'로 곤욕을 치른 바 있으나, 경영진이 철저한 자기 반성을 하고 국민 앞에 재발 방지를 약속하는 모습을 보이면서 위기를 극복한 전례가 있다.

    2003년 제이슨 블레어(Jayson Blair)라는 27살 난 젊은 기자가 수년간 타 신문의 기사를 베끼거나 가상의 인터뷰를 진행해 기사를 써 온 사실이 뒤늦게 발각되면서 위기를 맞은 뉴욕타임즈는 즉각 편집인과 편집국장을 경질하고 옴부즈맨 제도를 도입하는 구조 조정을 단행했다.

    또한 외부 인사가 포함된 진상조사위원회를 꾸려, 수개월간 제이슨 블레어의 과거 행적을 추적해 그가 저지른 모든 잘못을 공개하고 '오보'가 만들어지기까지의 전과정을 담은 한편의 보고서를 제출토록 했다.

    그 결과 기자들의 취재 내역을 필터링하는 시스템에 중대한 문제가 있음이 드러났고, 이는 뉴욕타임즈의 정책에 반영됐다.

    이후 사내 윤리 교육은 강화됐고, 기사가 출고되는 과정은 한층 더 엄격해졌다. 편집국 시스템이 이전보다 훨씬 투명해졌음은 물론이다.

    ◇ 방송사 사장이 TV에 나와 머리 숙여 사과


    오보를 낸 뒤 신문사 수뇌부가 책임을 지고 물러나는 예는 일본 언론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지난해 11월 일본 아사히(朝日)신문의 기무라 다다카즈(木村伊量) 사장은 "지난 9월, 2건의 오보 사태를 일으킨 데 대해 진심으로 사과의 말씀을 드린다"며 사장직에서 물러나겠다는 입장을 밝혔다.

    2건의 오보는 앞서 보도된 '제주도에서 여성들이 위안부로 강제 연행됐다'는 내용의 기사와, 2011년 당시 후쿠시마(福島) 제1원전 사고의 책임자에 대한 조사 결과를 기록한 기사를 가리킨다.

    당시 아사히는 "해당 기사들은 검증이 제대로 안 된 기사들이고, 도쿄전력 직원들에 대한 명예를 훼손하는 등 적잖은 물의를 일으켰다"며 "바로 취소 조치를 내렸다"고 밝혔다.

    아사히는 이전에도 몇 건의 오보 사태에 대해 사장이 '자진 사퇴'하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

    1989년 4월, 오키나와 이리오모테지마(沖縄・西表島) 해상에서 촬영한 산호초 사진이 조작이라는 사실이 드러나자 당시 히토쓰야나기 토이치로(一柳東一郎)사장이 사표를 냈고, 2005년엔 나가노(長野)총국 기자가 다나카 야스오(田中康夫) 나가노현(長野県)지사에 관한 허위 기사를 쓴 사실이 공개되자 역시 담당 기자와 하코시마 신이치(箱島信一) 사장이 물러나는 인사 조치가 이뤄졌다.

    일본 니혼TV는 일련의 오보 사건에 대해 전·현직 간부와 제작진이 방송에 출연해 사과 방송을 하는 이례적인 모습을 연출했다.

    2009년 8월 23일 오후 6시에 방송된 니혼TV의 '진상보도, 현장기자!'에는 현직 간부들이 줄줄이 나와 "시청자 여러분께 깊이 사죄드린다"며 90도로 절을 하는 모습이 전파를 탔다.

    또 같은날 자정 무렵엔 '오보 검증 특별 방송'을 편성, "다시는 실수를 저지르지 않겠다"는 경영진의 다짐을 재차 내보냈다.

    문제가 된 프로그램은 2008년 11월 방송된 '진상보도, 현장기자!'의 건설사 비리 의혹 편이었다. 당시 '진상보도, 현장기자!' 제작진은 모 건설사의 전 임원의 주장을 인용해 기후(岐阜) 현이 공사비를 과대하게 부풀려 비자금을 조성했다고 밝혔다.

    그러나 이 주장은 사실과 달랐다. 제보자의 주장에 신빙성이 거의 없었던 것.

    논란이 커지자 구보 신타로(久保伸太郞) 사장은 2009년 3월 사직서를 냈다. 이와 함께 보도국장과 담당 프로듀서도 경질되거나 징계를 당하는 인사 조치가 이뤄졌다.

  • 기무라 다다카즈(木村伊量) 아사히신문 사장(오른쪽)이 지난해 9월11일 기자회견에서 자사의 오보와 관련해 사과하며 고개를 숙이고 있다.   ⓒ 연합뉴스
    ▲ 기무라 다다카즈(木村伊量) 아사히신문 사장(오른쪽)이 지난해 9월11일 기자회견에서 자사의 오보와 관련해 사과하며 고개를 숙이고 있다. ⓒ 연합뉴스



    ◇ "통렬한 자기 반성 없인 발전할 수 없어"


    이상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오랜 기간 독자로부터 신뢰를 얻고 있는 언론사들의 면면을 보면, 잘못을 과감히 인정하고, 실수를 '발전의 자양분'으로 삼으려는 공통된 자세를 찾아볼 수 있다.

    그러나 KBS 수뇌부의 인식은 좀 다른 듯 하다. 취재 과정에서 사실 여부를 확인할 기회가 있었음에도 하지 않았고, 간부들 역시 올바른 판단을 내리지 못했음에도 불구, 그 누구 하나 책임지려는 모습을 보이지 않고 있다.

    공정성과 신뢰도가 추락한 언론이 살아남는 방법은, 잘못된 보도 하나가 '국가적 재앙'을 초래할 수도 있음을 사원 모두가 뼛 속 깊이 새기는 길 뿐이다.

    통렬한 자기 반성과 뼈를 깎는 구조 개혁을 하지 않는다면 시청자로부터 외면 받는 방송이 되는 건 시간 문제다.

    면피용 가지치기가 아닌, 근본적인 쇄신이 이뤄지기 위해선 뉴욕타임즈의 경우처럼 독립적이고 객관적인 인사들로 채워진 '진상조사위원회'를 구성하는 것도 한 방편이 될 수 있다.

    KBS가 이번 기회를 통해 뉴욕타임즈나 일본 언론처럼 '고개를 숙일 줄 아는' 언론사로 거듭나길 기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