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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한민국 죽이기'의 作戰名은 '이승만 죽이기'

    趙甲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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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는 19일로 서거 50주년을 맞는 李承晩은 공산주의자들의 도전을 물리치고 한반도에 자유의 나무를 심은 사람이다.
    제퍼슨의 말대로 자유라는 나무는 애국자와 독재자의 피를 마시면서 큰다고 한다. 이승만 또한 자유의 祭壇(제단)에 희생물로 바쳐졌다.
    그는 하와이에서 죽은 다음에야 屍身(시신)이 되어 조국으로 돌아와 묻혔다.
    朴正熙 당시 대통령의 弔辭(조사)대로 이승만은 한민족을 자유와 自主의 가나안 땅으로 이끈
    '십자가를 진 어린 양'이었다.  

    이승만은 한민족 중에게 가장 먼저 공산주의의 악마성을 간파한 사람이었고,
    가장 높은 수준에서 세계정세를 파악할 줄 아는 인물이었으며,
    이런 지식과 경륜을 무서운 집념과 효율적인 경영술과 결합시켜 국민국가 건설에 쏟아 부었다.

    이승만은 독립, 건국, 호국의 영웅이었고, 박정희와 함께 한국 민주주의의 2대 건설자이다.
    시아누크는 외교 전략으로 대한민국을 세우고 지켜내고 키워간 이승만을 ‘우리와는 급이 다른
    지도자였다’고 평가하였다.  

    그는 공산주의의 거짓선동을 분쇄한 가장 성공적인 선전가였다.
    그의 3대 명언은 지금도 실용적이다.

    “공산주의는 호열자와 같다. 인간은 호열자와 같이 살 수 없다”,
    “공산주의자들은 韓人의 얼굴을 한 러시아인이다. 민족반역자이고 사대주의자이다”
    “무조건적 평화주의자는 간첩과 같다”. 

    이승만의 眞價(진가)를 안 이들은 김일성, 모택동, 스탈린이었다.
    특히 김일성은 南侵 전쟁이 실패한 것은 이승만의 대전략에 말렸기 때문이란 점을 실감하였다.
    그 후 남북한의 좌익들은 ‘이승만 죽이기’를 對南전략의 핵심으로 삼았다.
    ‘이승만 정신’을 파괴하면 대한민국의 영혼을 빼앗을 수 있다고 판단한 것이다.  

    ‘이승만 죽이기’는 대한민국 죽이기, 자유민주 체제 죽이기를 거쳐 한국인의 노예화로 가는 길이다. 남북한의 좌익연합 세력은, 李承晩 죽이기를 이념전쟁의 가장 중요한 전략으로 삼고 있으며 이를 매개로 하여 건국의 민족사적 정통성, 자유민주체제의 정당성, 그리고 국군의 역할을 부정하고 韓美동맹의 해체를 겨냥한다.
    이승만 죽이기를 위하여 좌익들이 내어놓는 전술이 ‘친일타령’이고, ‘독재자 몰이’다.  

    李承晩은 超人(초인)이었다.

    凡人이 이해할 수 없는 깊이와 폭, 그리고 능력을 가진 이였다.
    이승만을 이해하기 위하여는 스스로 큰 사람이 되어야 한다. 巨木의 크기는 멀리서 봐야 안다.
    나이, 시간, 경험이 필요하고 종합적이고 역사적인 視角이 있어야 한다.
    이승만을 이해하는 것만큼 사람이 커진다. 사람이 커진 만큼 이승만을 이해한다.
    여기에 이승만의 비극이 있다.  

    대한민국은 이승만을 부정하고는 제대로 설 수 없다.
    터키 사람들이 케말 파샤를 미워하고, 미국인들이 워싱턴을 저주하며,
    프랑스 사람들이 드골을 무시한다면
    오늘의 미국, 프랑스, 터키가 존재할 수가 없는 것과 같다.  

    대한민국은 이승만을 제대로 알게 될 때 온전한 나라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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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역사의 어린 양 李承晩 할아버지, 정말 죄송하게 되었습니다

    42週忌를 하루 앞두고.

    趙甲濟    

    내일은 建國 대통령 李承晩 대통령 서거 42週忌 날이다. 한국 민족사의 10대 인물에 꼽혀야 할 분인데, 그 분의 노고로 해서 잘 먹고 잘 사는 후손들이 그를 너무나 푸대접하고 있다. 작년 그분의 생일 때는 국립현충원도 그 사실을 모르고 묘소 앞에 그 흔한 꽃다발 하나 갖다 놓지 않았었다. 대한민국이 복을 받으려면 李 대통령의 위대성을 알아보고 감사하는 마음이 국민들 마음 속에 뿌리내려야 할 것이다. 감사할 줄 모르는 인간, 조직, 국가는 반드시 禍(화)를 부른다.
     
      남북한의 오늘날 차이는 무식장이 김일성이 다스린 나라와 유식한 엘리트 李承晩이 세운 나라의 차이이기도 하다. 서로 많이 다투었던 무초 미국 대사는 이승만에 대해서 이런 평을 했다.
     
      <그는 복잡한 세계정세를 가장 높은 수준에서 정확하게 간파한 사람이다>
     
      국가지도자에 대해서 이 이상의 찬사는 없을 것이다. 위대한 독립투사이나 대한민국 건국에는 반대했던 金九 기념관은 거대하게 만들어놓고 건국 대통령의 기념관은 만들 생각도 하지 않는 이런 국가 지도층을 가진 한국이 망하지 않은 것도 이승만 대통령 덕분이다. 아래 글은 20세기를 마지막 보내던 1999년 12월호 월간조선에 썼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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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역사의 십자가를 지신 어린 羊 : 李承晩할아버지, 정말 죄송하게 되었습니다
      
       건국 대통령 李承晩(이승만)은 1965년 7월19일에 滯留(체류)중이던 하와이에서 만 90세로 殞命(운명)하고 23일에 유해로 귀국하여 27일에 국립묘지에 묻혔습니다. 흔히 李承晩이 하와이에 망명했다고 쓰고 있는데 이는 사실과 다릅니다. 4·19혁명 직후 대통령직에서 下野(하야)한 그는 政局(정국)이 騷然(소연)해지자 잠시 하와이에 머물 작정으로 출국했던 것입니다. 그곳에서 몇 번 귀국하려고 시도했으나 朴正熙(박정희) 정부는 국내정치에 충격을 준다는 이유로 이를 허가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가 죽어서 돌아온 이후에도 장례의 格(격) 문제로 말이 많았습니다. 그의 추종자들은 당연히 國葬(국장)을 해야 한다고 주장했었고 일부 언론 재야 단체에선 국장도, 국민장도, 사회장도 안된다고 했습니다. 정부에선 국민장으로 결정했지만 유족들이 「故人의 뜻에 따른다」면서 가족장을 선택했습니다. 물론 朴대통령의 지시에 따라 국민장 수준의 禮(예)를 갖추었지만 기록상으로는 「건국대통령이 가족장으로 묻혔다」고 되어 있습니다. 외국인들은 아마도 「무슨 죄를 그리도 많이 지었기에 건국 대통령을 가족장으로 대우했을까」 하고 고개를 갸우뚱할지도 모릅니다. 이승만의 장례식에서 박정희 대통령의 弔辭(조사)를 丁一權(정일권) 총리가 대신 읽었는데 이런 대목이 있습니다.
      
       <어쨌든 박사께서는 개인적으로나 민족적으로나 세기적 비극의 주인공이었던 것을
    헤아리면 衷心(충심)으로 뜨거운 눈물을 같이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만 그보다는 조국헌정사상에 최후의 십자가를 지고 가시는 「어린 羊(양)」의 존재가 되심으로써
    개인적으로는 「한국의 위인」이란 거룩한 명예를 되살리시고
    민족적으로는 다시 이 땅에 4·19나 5·16과 같은 역사적 고민이 나타나지 않도록
    보살피시어 자주독립의 정신과 반공투쟁을 위한 선구자로서
    길이 길잡이가 되어주시기 바라는 것입니다.
      
       여러 가지 사정으로 말미암아 박사로 하여금 그토록 寤寐不忘(오매불망)하시던 고국 땅에서 임종하실 수 있는 최선의 기회를 드리지 못하고 異域(이역)의 쓸쓸한 海濱(해빈)에서 고독하게 최후를 마치게 한 것을 가슴 아프게 생각하는 바입니다. (중략).
      
       생전에 손수 創軍(창군)하시고 또 그들로써 공산침략을 격파하여 세계에 이름을 날렸던 그 국군장병들의 英靈(영령)과 함께 길이 이 나라의 護國神(호국신)이 되셔서
    민족의 多難(다난)한 앞길을 열어주시는 힘이 되실 것을 믿고 삼가 두 손을 모아 명복을 비는 동시에 유가족 위에도 신의 가호가 같이 하시기를 바라는 바입니다>
      

       근대화 대통령이 건국 대통령에게 「역사의 십자가를 진 어린 羊」이 되시어 다시는 4·19와 같은 민중혁명이나 5·16과 같은 군사혁명이 일어나지 않게 해달라고 당부하고 있는 점이 흥미롭습니다. 이승만 대통령이 독실한 기독교 신도로서 초대 국회의장으로 선출되었을 때 제헌국회의 개원식을 기도로써 시작했다는 것은 널리 알려져 있지만 朴대통령도 구미보통학교 학생 시절
    집 근처의 교회 주일학교에 다녀 성경구절이 낯설지 않았습니다.
      
       그런 당부를 한 朴대통령 자신도 金日成(김일성) 정권이 보낸 암살자 손에 먼저 아내를 잃은 데 이어 측근의 손에 목숨을 앗겼으니 「십자가를 진 어린 羊」이란 단어의 선택이 말의 씨가 된 것이 아닌가 생각될 지경입니다.

    「인터넷 月刊朝鮮」(monthly.chosun.com)이 실시한 「20세기 한국의 대표인물」 설문조사에서 朴正熙가 20명의 후보자들 가운데 과반수의 득표로써 1위를 차지했고 2위는 金九(김구), 3위는 金大中(김대중)이었습니다. 그런데 李承晩의 득표율은 1%에도 미달했습니다.

    그런가 하면 姜英勳(강영훈)-南悳祐(남덕우)-盧在鳳(노재봉) 세 전 총리의 좌담에서 세 元老는 『20세기 한국인의 최대 성취는 민족국가 건설이며 대표인물은 李承晩, 朴正熙 두 분인데 우열을 가리기가 어렵다』라고 말했습니다.
      
       저도 같은 생각입니다. 20세기 한국의 前半部(전반부)를 대표하는 분은 독립 건국운동의 지도자였던 李承晩, 후반부는 조국 근대화의 旗手(기수)였던 朴正熙라고 생각합니다. 그렇다면 저나 전 총리 세 분 같은 기성세대와 젊은 네티즌은 이승만 대통령에 대한 생각이 왜 이렇게 큰 격차를 보이고 있는 것일까요.
      
       李承晩은 金九 지지자들과 金日成 지지자들로부터 남북 분단의 책임자란 협공을 너무 오랫동안 당해왔습니다. 몇 년 전 한 여론조사에선 대학생들 사이에서 李承晩의 인기가 金日成보다도 아래라는 결과가 나왔습니다. 몇 달 전 어느 주간지가 대학교수들을 상대로 한 「20세기 한국의 대표 知性」 조사에선 金九가 1위, 金日成이 10위로 朴正熙(18위)와 李承晩(20위)을 앞서고 있었습니다. 인간생명을 말살한 숫자를 기준으로 하면 히틀러, 스탈린과 함께 20세기의 3대 악마적 독재자로 불려야 마땅할 金日成을 그렇게 평가하는 사람들을 과연 지식인이라고 불러야 할지 절망감을 느꼈습니다만 이런 사람들의 교육과 언론활동에 오랫동안 노출되어 있었던 젊은 세대들이
    이승만을 잔인할 정도로 低評價(저평가)하고 있는 것은 당연한 귀결인 듯도 싶습니다.
      
       知識人 이야기가 나왔으니 말입니다만 제가 생각하는 지식인의 조건은 이렇습니다.
    지식인은 무엇을 아는 사람인가. 그 漢字語에 비밀이 숨어 있습니다. 知識이란 단어를 분해하면 이렇게 됩니다. 矢(시=화살), 口(입=먹는 문제), 言(언=말), 音(소리=예술), 戈(과=창). 즉 지식인이란 矢로 상징되는 전략(총이 발명되기 전에는 화살이 미사일과 같은 전략무기였다. 창칼은 근접전투 때 쓰는 전술무기)과 口로 상징되는 경제문제와 言으로 상징되는 말 글과 音으로 상징되는 예술과 戈로 상징되는 전술을 두루 잘 아는 全人的 인격체여야 한다는 뜻입니다.
    文武兼全(문무겸전)이란 뜻이기도 합니다.
      
       군사와 예술에는 무식한 儒生(유생) 같은 창백한 지식인들은 진정한 의미의 지식인이 아닌 것입니다. 그런 정신적 不具의 사람들이 李承晩 같은 巨人을 제대로 볼 수 없다는 점에 있어선 하등 놀랄 일도, 신경 쓸 일도 아닙니다.
    문제는 다음 세기의 주인공인 젊은 세대의 李承晩觀인 것입니다.
    건국 대통령 李承晩에 대한 沒理解(몰이해)는 대한민국 건국에 대한 오해로 이어져 우리 현대사를 잘못 보게 될 가능성이 매우 높기 때문입니다. 李承晩, 朴正熙를 보는 시각이 제대로 정리되면 자연스럽게 우리 현대사를 정확하게 이해할 수 있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李承晩이 主導한 국민국가로서의 대한민국 건국, 그 의미를 이해하려면 국가의 건설과 해체과정에서 빚어지고 있는 엄청난 流血사태를 보면 될 것입니다. 東티모르 사태, 러시아와 체첸 사이의 전투,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의 爭鬪(쟁투), 舊유고연방의 내전 같은 일들은 모두가 한 민족국가가 탄생하고 해체되는 과정에서 치러지는 통과의례인 것입니다. 19세기 유럽의 後發國인 독일과 이탈리아가 통일국가를 건설해간 과정, 2차 세계대전 후 영국과 프랑스 식민지들이 독립을 쟁취해갈 때 일어났던 流血사태도 같은 경우입니다. 민족국가는 祝砲나 祝歌 속에서 탄생하는 것이 아니라 砲煙(포연)과 학살의 피범벅 속에서 피어나는 경우가 보통입니다.
      
       프러시아는 독일을 통일하는 과정에서 1864년엔 덴마크와, 1866년엔 오스트리아와,
    1870년엔 프랑스와 결전을 벌였습니다.
    대한민국도 마찬가지였습니다. 1946년의 대구 10월 폭동, 1948년의 제주도 4·3 공산폭동, 그해 10월의 여순 14연대 반란사건, 그리고 6·25 남침. 이런 流血 속에서 나라를 세우고 나라를 지켜내는 한가운데 있었던 李承晩을 평화시의 기준으로써 평가할 수는 없는 법입니다.
      
       李承晩 시절에 벌어졌던 학살사건으로 요사이 말이 많습니다만 광복 이후 한반도에서 이루어진 대부분의 학살사건에서 원인 제공자이자 선제공격자는 북한공산당과 그들에 의해 조종된 세력이었음을 잊어버려선 因果關係(인과관계)를 이해하기 힘듭니다.
    우리나라는 단일민족에다가 포용력이 큰 토착종교 샤머니즘의 영향이 강해 유럽이나 중동에서
    되풀이되었던 인종·종교학살의 전통이 없었습니다(19세기에 천주교 박해가 있었지만 규모면에서 유럽과는 비교가 되지 않습니다).
      
       그런 나라에서 未曾有(미증유)의 살육극이 벌어진 것은 「증오의 과학」인 공산주의 이념이
    들어와서 계급간의 적대의식을 고취시키고 「계급의 원수들」에 대한 보복을 위대한 혁명과업이라 선동함으로써 인간양심을 마비시킨 때문이었습니다. 공산주의자들에 의해 촉발된 학살에 대한민국측이 대응하는 과정에서 많은 무리가 있었던 것은 사실이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과잉방어였다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朴正熙가 인터넷 月刊朝鮮 독자들로부터 받은 지지표의 상당수는 李承晩에게 갖다 바쳐야 할 것들입니다. 李承晩이 없었으면 朴正熙도 없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李承晩이 주도한 建國, 强軍건설, 農地개혁, 교육확충, 韓美 상호방위조약 체제 구축. 이것들은 1960, 70년대에 朴正熙가 근대화를 추진하도록 지켜주고 떠받쳐준 울타리이자 주춧돌이었던 것입니다. 民主主義의 형식은 선거이고 실질은 안보, 복지, 자유라고 볼 수 있습니다.
    안보, 복지, 자유가 보장되어야 민주주의, 즉 글자 그대로 국민이 주인이 되는 제도가 되는 것입니다. 建國과 建軍으로써 안보의 기반을 만든 李承晩, 경제개발로써 복지의 기틀을 다진 朴正熙, 정치적 자유의 쟁취에 앞장서온 金大中.
      
       이 세 사람은 민주주의의 세 가지 實質(실질)을 각각 맡아서 키워온 사람들이란 점에서 민주주의와 국가건설에 기여한 사람들이었다고 역사는 평가할 것입니다. 민주주의를 정치적 자유라고 좁게 해석하면 李承晩, 朴正熙를 反民主라고 비판할 수 있지만 넓게, 제대로 해석하면 건국 및 근대화 대통령을 民主의 이름 아래서 다 아우를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포용의 역사관이자 관용의 민주觀이라 생각합니다.
      
       그런 점에서 아직도 역사의 십자가를 내려놓지 못하시고 망각과 무지의 언덕길을 오르고 계시는 어린 羊, 李承晩 할아버지, 정말 죄송합니다.
    저희 기성세대가 젊은 세대를 제대로 가르치지 못해 이렇게 욕되게 만든 점 용서해주십시오.
    언젠가는, 아마도 통일의 그날 우리 국민들은 건국 대통령의 위대함을 뒤늦게나마 깨닫게 될 것입니다. 그때까지 이 나라의 호국신이 되셔서 민족의 多難(다난)한 앞길을 열어주시기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1999년 12월 월간조선>
    [ 2007-07-18, 10:07 ]